137화.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모르겠다. 설핏 잠들긴 했지만 우느라 퉁퉁 부은 눈 주변이 쓰라렸다.
거울을 보니 예상대로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까맣고 긴 생머리가 반가우면서도 낯설다. 그러고 보니 리사의 얼굴과 비슷한 내 얼굴에 놀란 참이다.
머리 모양과 눈동자 색만 바꿔도 위화감 없이 비슷해 보일 듯했다. 도플갱어라 해도 믿겠다.
이름도 그랬다. 내 이름은 ‘안리사’다. 할머니가 지어 준 이름으로, 성씨 또한 할머니의 성씨를 따랐다.
공포 게임 속에서 허구한 날 ‘리사’라고 불렸던 것이 어쩐지 자연스럽고 친숙하다 했다.
일단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뜨끈뜨끈하고 얼큰한 라면이 딱 떠올랐다. 그래서 고픈 배를 새우처럼 구부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라면을 끓여 냄비째로 들고 혼자 6인용의 거대한 식탁에 앉았다. 할머니가 6인용 식탁을 고집하셨던 걸 그땐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가족들. 또는 새로 생길 가족들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게 아닐까.
후루룩거리며 입 안으로 찰싹 달라붙어 빨려 들어오는 면발이 쫄깃하고 뜨거웠다. 붉고 탁하고 진한 국물 한 숟가락을 들이켜니 이제야 몸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역시… 라면이 최고야. 난 이걸 먹기 위해 돌아온 거야. 거긴 라면이 없잖아.”
그러니까 잘 돌아온 거야.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떻게 케이크만 먹고 살겠어. 케이크를 먹었으면 라면도 먹어 줘야 균형이 맞지. 여긴 둘 다 있잖아.
남자는 또 만나면 되지. 노엘 같은 남자는 없겠지만 노력한다면 분명,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사랑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젠 괴물이라든가 무서운 것을 보지 않아도 되잖아. 맨날 긴장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처음으로 평온한 일상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절절히 느꼈다. 그러니 모두 잘된 일이었다.
“그래. 다 잘된…….”
뜨거운 국물이 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걸까. 갑자기 속이 답답해지며 꽉 막힌 것처럼 아팠다. 뜨거운 무언가가 점차 번져서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아랑곳하지 않고 면을 한입 가득 넣고 삼키려 했지만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라면을 한가득 문 채로 굳어 버렸다. 또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훌쩍이기만 했다.
“흐으…. 프으으….”
어깨가 들썩이고 명치가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올랐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흐려진 시야 속으로 노엘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믿기지 않았다.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정말로 믿기지 않았다.
심장이 뜯겨 나간 듯했다. 그곳에 내 심장을 반도 아니고 전부 떼어 두고 왔나 보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지만 다시 한번 되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 할머니와의 기억을 찾으러 돌아왔을 것이다. 리마의 다리가 빠지지 않았어도 자력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괴로워도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라면은 결국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 버렸다. 그토록 좋아했던 라면인데 입맛 자체가 사라져 더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커피가 든 머그잔을 들고 거실에 앉아 멍하니 바깥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앙상한 겨울의 나뭇가지에 눈동자를 고정하고 있으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평화로움도 잠시였다.
끼이익.
……?
갑자기 위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는데…. 그러니 행여라도 바람에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일 또한 있을 리가 없었다.
“뭐지?”
그 뒤로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내 방이 있는 층이었기에 모른 척하고만 있기엔 영 찝찝해 올라가 보기로 했다.
삐걱. 삐걱.
오래된 나무 계단은 특정 부분을 밟았을 때 기괴한 소리를 냈는데, 하필 별장에서 들었던 신음과 비슷해 기분이 묘했다.
슬금슬금 올라가 문소리가 난 곳으로 가 보니 열린 건 내 방 문이었다. 난 언제나 문을 닫아 둔다.
이곳에서 10년 넘게 살아오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일단 방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들어온 김에 벽장도 열어 보고 침대 밑도 샅샅이 확인해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열린 문처럼 또 이상한 걸 발견했다. 내 이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불 정리를 하지 않아 돌돌 말려 있어야 정상일 텐데.
충격에 석상이 된 것처럼 굳어 다리만 벌벌 떨고 있을 때였다. 이번엔 다시 아래층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의 수도꼭지가 열린 게 틀림없었다.
쿵쿵쿵쿵! 크게 울리는 소리가 세차게 뛰는 내 심장 소리인지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내 발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패닉에 빠져 부엌으로 정신없이 내려갔다.
정말 물이 틀어져 있어 얼른 잠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뇌가 정지해 버릴 것 같았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도 괴이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비웃듯 샹들리에가 갑자기 무언가에 휩쓸린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지진이라도 난 건가 했는데 그렇다면 집 전체가 흔들려야지 저것만 저렇게 흔들린다고?
말이 안 되잖아. 이게 대체 뭐람?
“……아악!”
나는 당장 미친 사람처럼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커다란 창문으로 아직도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미친 걸까? 공포 게임 속에 너무 오래 있다 와서 그런 건가? 환각인 건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까 싶어 급히 두리번거렸지만, 이 언덕엔 이 정도 되는 크기의 저택이 겨우 다섯 채 있을 뿐이었다. 휴가철에만 쓰는 별장 용도의 저택이 대부분이었기에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도 마침 크리스마스이기도 하니 사람이 있을까 싶어, 가장 가까이 있는 아래 저택으로 가 보기로 했다.
경찰을 부를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 내가 미친 건지 아닌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저 샹들리에가 나만 저렇게 보이는 건지 말이다.
“안녕하세요.”
근처에 다다랐을 때쯤, 어떤 남자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리게 보였지만, 키도 훤칠하고 모범생처럼 단정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 괜찮으세요?”
“네?”
남자가 내 전신을 위아래로 훑으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나는 분홍색 파자마 차림으로, 겨울의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겨울바람보다도 집에서 일어난 일이 더욱 오싹하여 추운지도 몰랐다. 뒤늦게 몰려든 창피함에 몸을 움츠리니, 남자가 제 검정 코트를 벗어 내게 걸쳐 주었다.
“아!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집이 바로 저기거든요. 잠시 급하게 볼일이 있어서….”
“아뇨. 언덕을 한참 올라왔더니 더워서 어차피 벗으려 했어요.”
바로 벗어서 돌려주려 하니 남자는 고집스럽게 마다했다. 그래서 그냥 걸치기로 했다.
“그, 그럼 잠시만 빌릴게요. 어디로 돌려 드리러 가면 되나요?”
“여기요.”
마침 내가 가려던 목적지를 남자가 손으로 가리키니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하다니.
“저기…! 그럼, 저기요! 그렇지 않아도 찾아뵈러 가는 중이었어요.”
나는 집에서 일어났던 이상한 일을 말하며 샹들리에가 아직도 흔들리는지 같이 봐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남자는 선량해 보이는 이미지만큼이나 정중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선뜻 동행에 나섰다.
그렇게 그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갔는데 밖에서 보니 샹들리에가 멈추어 있었다. 마치 나를 농락이라도 하는 듯이.
“어…. 계속 흔들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멈추어 있네요.”
“제 눈에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네요.”
괜히 그한테 수작 부리는 걸로 인식될까 봐 걱정되어서 덮고 있던 코트를 냉큼 벗어 강제로 돌려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헛걸 봤나 봐요.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세요. 감사했습니다.”
“저기요.”
“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셔도 돼요. 이쪽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사람이 사는 집이 있다니 반가워서 그래요. 저희 누나도 혼자 자취하겠다고 나가서 이래저래 절 괴롭히거든요.”
“아….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반가워요!”
이웃 남자는 작게 미소 짓고는 코트를 다시 걸치고 종종걸음으로 돌아갔다. 역시 추운 걸 억지로 견디고 있었는지 몸을 한껏 움츠리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집으로 다시 들어온 나는 겨우 진정된 가슴을 부여잡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겪은 일들이 생생해서 착각일 리가 없다는 생각에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그 뒤로 거실의 소파에 앉아 한참을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견뎠는데, 다행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체 뭐였지….”
다시 커피나 한잔하며 차가워진 몸을 녹이려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식탁에 엽서 크기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라면 먹을 때도 없었고,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걸 보았을 때도 없었던 종이가 지금에서야 떡하니 발견될 리는 없었다. 분명히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다시 한번 두근거리는 심장을 타이르며 다가가 종이에 쓰인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우리의 숨바꼭질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장소가 바뀌었으니 술래도 다시 정하는 게 좋겠지? 이번엔 네가 술래야. 시간은 오늘이 지나기 전까지.>
……!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손이 떨리니 종이까지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림에 내 가슴마저 하얗게 흔들렸다.
<리사, 이제 네가 나를 찾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