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응? 저세상이라니.
“자, 잠깐! 방금 뭐라고 했어?”
“널 저세상으로 보내 주겠다고.”
노엘은 자신만만한 어조와 달리 얼굴을 수줍게 붉혔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저세상과 그가 생각하는 저세상은 아주 다른 모양이다.
“푸훕.”
결국 웃음이 나 배를 잡고 깔깔거리니 노엘이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아까 어떻게 한 거야? 아직 밤이 아닌데.”
“마력석으로 만들어 낸 거야. 네가 그런 하늘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다행히 제작 시간이 아주 짧았어.”
“그걸 기억하고 바로 실행하다니.”
“그럼, 네가 좋다는 건 무조건 기억해. 그러니 또 좋아하는 게 생기면 얼마든지 다 얘기해.”
마치 자기가 다 이루어 줄 것처럼 듬직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그렇게 할 것만 같았다.
“노엘, 넌 네가 사랑스럽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어.”
“…….”
노엘은 놀랐는지 눈을 치켜뜨고 입을 꾹 다물었다. 감당이 되지 않겠지. 그는 받는 사랑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익숙해지도록 표현했어야 했는데.
“널 사랑해. 아주 많이…. 이 마음은 아마 변하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짙게 떨리는 성대와 입술의 감각을 두려워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저 떨리면 떨리는 대로, 그가 내 진심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온전히 느끼기를 바랐다.
“…….”
그리고 그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노엘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벅찼구나. 생각한 난 아무 말 않고 그를 꼭 안아 주며 나를 파묻었다. 나를 조금이라도 흘리지 않고 전부 소화할 수 있도록.
***
오붓한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높이 떠올랐던 해가 붉은빛을 물들이며 저물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
“노엘, 우리 결혼식 전에 다 같이 숨바꼭질하는 거 어때?”
“숨바꼭질?”
“응!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난 너와 좀 더 껴안고 있고 싶은데….”
“…….”
“그렇지만 네가 재밌을 것 같다니 그렇게 하자.”
“…응!”
벌써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기세로 연소하고 있었다.
이런 내 심장을 들켰다간 눈치 빠른 노엘이 귀신같이 알아채겠지. 웃는 척하느라 얼굴 근육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모여 숨바꼭질을 하게 되었다. 작은 축제라도 벌이는 듯 모두 들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베키는 내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알겠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그녀라면 역시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모두가 숨는 동안 귀환의 마력석을 사용해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술래는 누가 하는 거죠?”
타란티나가 질문을 하며 노엘을 흘깃거렸다. 리마 역시 약속이라도 한 듯 노엘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음흉하게 눈을 휘었다.
“그러게. 술래는 누가 한담? 무엇으로 정해야 하지?”
모두 노엘을 쳐다보는 것이 어쩐지 다들 그가 술래가 되길 한마음으로 바라는 듯했다. 나 역시 그가 술래가 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시선을 고정했다.
노엘은 황당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가 마지못해 하는 수 없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땐 아주 살벌한 미소를 띠었다.
“알았어. 첫 번째 술래는 내가 하지. 대신 가장 먼저 잡히는 녀석은 오늘 있을 결혼식의 뒷정리를 감당해야 할 거야.”
“그럴 수가! 그건 너무 무섭잖아요.”
타란티나는 껑충 뛰며 리마의 뒤로 숨었다. 정리라면 아주 질색이라는 얼굴이었다.
다들 같은 마음인지 표정들이 급격히 일그러졌지만, 절대 걸리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을 하는 비장미가 엿보였다.
“자, 그럼 술래는 이 방에서 100까지 세고 찾기!”
짓궂게 입꼬리를 올린 토드는 노엘의 등을 때리듯이 팍팍 떠밀어 아까 있던 작은 방으로 들여보냈다. 얼떨결에 떠밀려 간 노엘은 그대로 방 안에서 곧장 초를 세기 시작했다.
“1, 2, 3….”
“뭐야. 너무 빠르게 세는 거 아니야?”
노엘의 성의 없이 빠른 목소리에 알프레드가 지레 겁을 먹자 다들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나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간 뒤 마력석을 쓸 생각이었다.
“리사! 내가 길을 알아. 이리로.”
모두와 함께 흩어지는 척하던 베키가 내 팔을 붙잡았다. 순순히 그녀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더니 식장만큼이나 광활한 공간에 다다랐다. 가운데에 거대한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었는데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수풀이 군데군데 우거진 희한한 풍경이었다.
“여기가 노엘이 있는 곳에서는 제일 멀 거야.”
“고마워. 베키….”
“그래도 서둘러야 해. 어서!”
“응!”
머리카락 속에 엮어 둔 마력석을 풀려고 팔을 올렸는데, 갑자기 길게 우거진 수풀들 사이로 정겨운 얼굴들이 사부작거리며 하나둘씩 나타났다.
“누나…!”
에디가 울 것 같은 얼굴로 가장 먼저 뛰쳐나왔다. 언제 따라온 건지, 나보다 미리 와 있었던 건지 알아볼 새도 없이 갑자기 다들 에디처럼 불쑥 튀어나와 내 앞에 주르륵 섰다.
“에디? 너희들…. 어, 어떻게…!”
“내가 다 데려왔어. 노엘 녀석은 그렇다 쳐도… 다들 인사하고 싶을 것 같아서.”
토드가 가장 마지막으로 걸어 나오며 머쓱한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보내고 싶지 않지만…, 그게 누나가 원하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봐주는 거야. 꼭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의젓한 척을 하던 에디는 코를 훌쩍이며 바닥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내 얼굴을 보았다가를 불안정하게 반복했다. 나는 어서 다가가 그를 꽉 안았다.
그러니 내 뒤로 울컥한 얼굴을 한 토드가 와서 덮어 안았다. 그렇게 또 옆으로, 뒤로, 사방으로 모두가 들어와 함께 껴안으며 거대한 무리를 형성했다.
“나 진짜. 내가 진짜 누나 안 보내려 했는데. 아니……. 근데 진짜 안 가면 안 돼?”
횡설수설하는 리마는 이미 눈물 콧물을 줄줄 뽑고 있었다. 이제는 녀석의 부산히 움직이던 더듬이를 볼 수 없겠구나, 생각하니 어째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리마한테 정이 들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언니….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정말 즐거웠는데…. 하고픈 말이 많이 있었는데 더는 생각이 안 나요. 이제 제 머리는 누가 쓰다듬어 주죠?”
타란티나의 상냥한 혼란스러움에 나 역시 하고 싶었던 말이 한가득 있었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애가 탔다.
“아쉽다. 리사,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
데릭의 솔직한 한마디에서도 진심이 묻어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가서도 건강하게 잘 지내. 절대 널 잊지 못할 거야.”
내 등을 따듯하게 덮고 있던 토드가 막힌 목구멍을 간신히 열었다.
그냥 이렇게 모두의 안에서 평생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분에 넘치는 행복감에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눈물이 한번 터지면 속절없이 무너질 것 같아 손을 힘껏 말아 쥐고 입술을 꽉 짓씹었다.
“노엘이 오겠어. 이제 어서 리사를 보내 주자.”
통로 쪽을 살피느라 애쓰던 베키는 떨어지기 싫어하는 모두를 간신히 떼어내며 물렸다.
“다들 고마웠어. 덕분에 정말 행복했어. 너희들을 평생 기억하며 살게.”
덤덤하게 꾸역꾸역 마지막 인사를 건넨 나는 머리 뒤로 손을 넣어 곧장 귀환의 마력석에 마력을 주입했다.
<자신이 속했던 곳 중 이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립니다. 단, 빙의된 영혼만 사용이 가능. 통로 내부에 신체 일부만 닿아도 끌려 들어가니 신중히 사용 바람.>
문구가 눈앞에 떴고 곧 생성될 문을 기다렸다.
응……?
그런데 그 어디에도 문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문이… 대체 어디에?”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다들 같이 찾아 주려 두리번거렸다. 분명 마력석은 발동된 것이 틀림없는데….
그러던 중 깁스가 갑자기 격렬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흐어어어어! 흐어어어어어!”
그가 고개를 확 쳐든 걸 보고 모두가 동시에 천장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공중에 생성된 문이 붕- 떠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런 데에 생긴 건지 모르겠다. 의도가 불분명한 이상한 마력석이다.
“어쩌지? 저길 어떻게 올라가…….”
웅장한 광장인 만큼 층고도 아주 높았다. 깁스의 붕대를 다 풀어도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였다. 베키도 저 끝까지 머리카락을 늘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얼굴이었다.
“흐어어어어….”
“누나! 걱정하지 마. 우리가 있잖아.”
에디가 펄쩍 뛰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는 곧장 자기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짧게 회의하더니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 밑을 몸체가 큰 타란티나가 안정적으로 받치자, 그 위로 늑대 괴물로 변한 데릭이 기어 올라갔다.
데릭 위로는 알프레드가 올라갔고, 그 위로 곧장 리마가 올라가 몸을 길게 뻗자 드디어 허공에 떠 있는 문에 도달했다.
어마어마한 사다리를 만들어낸 녀석들은 씨익 웃으며 어서 올라오라고 하나같이 턱짓했다.
차마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갈 자신이 없어 주춤하고 있으니, 베키가 머리카락으로 나를 감싸 데릭이 있는 곳까지 올려다 주었다.
“떨어질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가. 혹시라도 떨어지면 내가 아래에서 널 받을 테니까.”
“……응!”
암벽을 등반하듯 오르기 시작하자, 녀석들은 내가 올라가기 수월하도록 열심히 도와주었다.
가끔 미끄러지면 어디선가 데릭의 꼬리가 나타나 잡아 주거나 알프레드의 팔이 다시 밀어 올렸다. 베키의 흰 머리카락과 깁스의 붕대도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엉금엉금 올라가니 드디어 정상에 다다랐다. 마지막으로 리마의 몸체에 올라서자 아래가 아찔하게도 멀어 보여 다리가 후들거렸다.
서서 가기는 더는 무리였던지라 엎드려 기어가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열린 문짝이 증발하듯 사라지고 바닷속처럼 신비로운 내부가 드러났다.
다만 격하게 휘몰아치는 물살을 보니 어쩐지 발을 들이기가 무서워진 참이었다.
“리사!”
일어서서 한 발짝 안으로 내디디려는 순간, 애타게 부르짖는 노엘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뒤돌아보면 안 되는데. 또 마음 약해질 텐데. 그런데도 한 번만 더 그를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