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한번 터진 눈물보는 멈출 줄을 몰랐고, 그렇게 한참 정신을 놓고 서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어떻게 상황이 정리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자리에 멀쩡히 앉아 있었다.
청혼과 약혼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난 뒤, 흐드러진 흑장미 사이로 마련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뒤풀이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아무런 입맛도 들지 않아 그저 멍하니 음식을 응시할 뿐이었다.
“누나, 그렇게 펑펑 울 정도로 행복했던 거야? 결혼식 땐 또 얼마나 크게 울려고 그래. 나 긴장되잖아.”
맞은편에 기립해 있던 리마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타란티나는 리마의 옆에 딱 붙어 더듬이 다리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눈치 없게 놀릴 때가 아니에요. 언니는 많이 놀란 상태라고요!”
“맞아. 진짜 눈치 없네! 역시 네 녀석은 리사 누나를 누나라 부를 자격이 없어.”
리마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에디가 어른스러운 척 다리를 꼬고 리마를 비웃었다. 그에 가만히 있을 리마가 아니었다. 리마는 눈알이 빠질 듯이 흥분해 가운데 다리를 뻗어 에디에게 삿대질했다.
“뭐야?! 그러고 보니 너! 너,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인데. 아까부터 누나 누나 하는 거야?”
“너야말로 우리 누나한테 누나라고 그만 좀 불러. 거슬리게, 진짜.”
“우리 누나?! 지금 우리 누나라 했냐? 누나가 왜 너희 누나야!”
리마가 30개의 다리를 어찌할 줄 모르고 부르르 떨었고, 에디는 그런 리마가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며 코웃음 쳤다. 티격태격하지만 참 잘 논다.
“너희 둘 다 시끄러워. 얌전히 굴지 않으면 쫓아낼 거야.”
흰 머리카락이 반쯤 치솟은 베키가 낮은 목소리로 그들을 제지하니 상황은 금세 정리되었다. 베키는 내 옆에 앉아 아까부터 멍을 때리며 시체처럼 앉아 있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베키….”
“이제야 정신이 좀 들어?”
“너희들…….”
내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노엘은 옷을 갈아입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난…… 너희가 잡혀간 줄 알고….”
떨리는 입술 때문인지 목이 콱 막혀서인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정겨운 얼굴들을 마주하니 가슴속이 따듯하게 데워졌다.
녀석들 틈에 섞여 있는 따사롭고 평화로운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다.
“들었다. 리사, 우린 줄곧 네가 빨리 구해 주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무뚝뚝한 줄 알았던 데릭이 내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밝게 하나둘씩 웃는 다른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부시도록 밝고 아름다운 웃음이 오갔다.
“우릴 구하기 위해 돌아가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면서! 나 정말 감동했잖아. 모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알프레드의 대견하다는 듯한 눈빛과 마주치니 어쩐지 부끄러움이 몰려들었다. 모두 알프레드의 발언에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얼굴이 더욱 홧홧해지는 느낌이었다.
“흐어어어어.”
“그런 의미로 이따 주사나 맞으러 오라고. 밤에 있을 결혼식에서 또 펑펑 울려면 체력이 필요할 테니 말이야.”
사과 타르트를 깨작깨작 갉아 먹던 매드와 깁스를 보자 붉어지던 얼굴이 다시 차갑게 식으며 새파래졌다. 언제 왔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 속에 앉아 있었다.
또 묶어 놓고 주사 놓으려고……? 절대 저 녀석에게 주사를 놓아 달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
단팥묵과 토리묵도 있었다. 머리에 장미꽃들을 꽂고 있었는데 표정이 극과 극인 두 녀석이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아주 귀여워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먹을 것이 어디선가 자꾸 나타난다 했더니, 저쪽 어딘가에 나 있는 작은 입구로 음식을 든 주방장의 다리가 쉴 새 없이 들락날락했다.
“우리도 처음에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몰라. 잔뜩 겁먹어서 갇혀 있었는데 갑자기 노엘이 들어와서 풀어 주지 뭐야?”
리마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다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누나가 우릴 구하러 올 때까지 청혼 준비와 예식 준비 등등을 마무리 지어 놓으라는 거였어.”
매드와 깁스, 에디를 제외한 모두는 당황스러웠던 그날 일을 떠올렸는지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미치는 줄 알았지. 청소부터 시작해서… 이 장미들은 우리가 그동안 다 피워내고 장식한 거야.”
알프레드는 미간을 짚으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로 저었다. 그동안 녀석들도 노동으로 고생한 모양인데, 얼마나 힘들었을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표정이었다.
“다들 고생했어…. 정말 감동했어. 이렇게…… 아름다운 걸 언제 또 보겠어.”
아직도 아까의 벅찬 감정이 가슴속 깊숙이 박혀 있었다. 모두에게 감당하지 못할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어쩐지 또 눈물이 날 것같이 코끝이 찡해졌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 얘들아.”
녀석들도 잠시 떨리는 눈알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알프레드는 코밑을 킁킁거리며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누나, 우릴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 오지 않았다면 우린 이곳에서 평생 장미나 키우고 있었을 거야. 누나가 올 때까지 이곳을 가득 채우라고 했거든.”
리마가 코를 훌쩍거리며 눈꼬리를 내리자 타란티나도 거들었다. 자기도 말을 하고 싶은데 하도 인원이 많아 눈치 보고 있던 것 같았다.
“설마 그 상황에서 우릴 구하러 와 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저라면 당장 도망쳤을 거예요.”
빈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데릭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그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도 리사는 우릴 버리지 않고 구하러 와 줬다.”
다들 한마디씩 다정하게 말을 이으니 훈훈한 분위기가 오래 지속되었다. 이 행복한 시간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노엘을 용서해 줘. 우리 모두를 속이긴 했지만, 우린 노엘이 만들어 놓은 안전한 곳에서 혼란에 빠지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알프레드가 진중하고 묵직하게 말을 하자 분위기도 그렇게 흘러갔다.
노엘이 한 일에 대해 다들 그렇게 놀랐으면서도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했던 거겠지.
“그건 그래. 어이없긴 해도 우릴 위해서 혼자 3개월 동안… 괴로웠을 거야.”
베키는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노엘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역시 제일 큰 목적은 리사 누나를 잡아 두는 거였겠지! 누나가 돌아가지 못하도록 시간을 벌어 준 게 바로 이 몸이다. 이 말씀이야!”
진중한 분위기를 단방에 뚫고 들어온 에디가 무릎을 산만하게 들썩이며 신나서 말했다. 그러니 리마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무슨 소리! 누나를 괴롭힌 방해꾼이겠지! 감히 우리 누날 괴롭히다니.”
“뭐야? 지금 뭐라고 했어!”
리마가 더듬이를 꼿꼿하게 세우며 뭐라 하기도 전에 주위로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베키가 다시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둘을 노려보니 다시 순식간에 침착해졌다. 에디는 잠시 입을 삐죽이다 내게 하려던 말을 이었다.
“누나! 이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거지?”
“어…?”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노엘이 그랬어. 이제 누나는 돌아가지 못한다고.”
“그, 그래…?”
모두 그렇다고 하며 안심하는 걸 보니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나는 에디의 물음에 끝까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애매하게 얼버무려 상황을 무마하긴 했지만, 베키는 무언가를 감지한 예리한 눈길로 날 바라보았다.
“잠깐 나랑 어디 좀 가자.”
베키가 일어섰고, 나도 그녀를 따라나섰다. 식장 옆에 붙어 있는 아늑하고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긴 베키는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다 입을 열었다.
“리사, 정말이야?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어?”
“베키…….”
베키에겐 솔직해도 된다. 그 사실이 다행스럽고 든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마주 보았을 뿐인데 그녀는 내 의중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래. 노엘한테 휘말려서 약혼까지 했다고는 하지만, 네가 그렇게 떠밀리듯 결혼할 녀석은 아니니까.”
“…….”
“오늘 밤이 바로 결혼식이잖아. 벌써 오후인걸.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해.”
“응…. 그러려고 했어. 가기 전에 너와 애들을… 이렇게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거야. 다들 잘 지낸 것 같아 이제 마음이 놓였어.”
“마력석은 잘 가지고 있는 거지?”
“응. 잘 숨겨 두었지.”
베키는 갑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풉…! 설마 그 노엘을 이렇게 따돌릴 줄이야. 정말 대단해.”
“후……. 쉽진 않았어. 매 순간 긴장했던 걸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해.”
“그래, 정말 네가 대견하고 장해. 노엘을 상대로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
“아니, 운이 좋았지. 과대평가야.”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하지만 돌아가는 마력석을 사용하지 않은 이상,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곧 있을 이별을 예감한 베키가 나를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나도 베키의 허리를 휘감으며 그녀만의 차디찬 체온을 기억하고자 힘껏 안았다.
“리사…. 많이 보고 싶을 거야. 가서도 즐겁고 건강하게 잘 지내야 해. 지금처럼만 하면 무엇이든 못 할 게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베키, 너야말로 행복해야 해. 나도 아주 많이… 보고 싶을 거야. 평생 잊지 않아.”
나와 다른 극단적인 체온을 느끼며 베키와의 추억을 다시 한번 곱씹고 있을 때였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누군가가 발을 들였다.
끼익.
토드였다. 그러고 보니 약혼식 이후로는 계속 보이지 않아 눈으로 줄곧 좇고 있던 터였다.
토드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껴안은 베키와 나를 제 품에 한 번에 안아 넣었다.
“문밖에서 너희 말을 엿들었어. 그래, 차라리 잘됐어. 노엘 녀석한테 널 보내느니 네가 살던 곳으로 보내는 게 낫겠어.”
그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나는 안심하고 말았다.
“토드…. 잘 지내야 해. 노엘과도 그렇고….”
“응…. 너도 반드시 행복해야 해. 가끔 내 생각도 해 주고.”
“자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곧 노엘이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