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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132화 (132/145)

132화.

“다 끝났어.”

옷을 다 갈아입고 노엘을 불렀는데, 노엘은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중얼거렸다.

“고마워. 네가 영영 돌아갈 수 없단 걸 알고 나니 안심했어. 이제 우린 곧 하나가 될 거야.”

그 말에 갑자기 주위가 스산해지며, 두피가 바짝 쪼그라드는 듯했다.

하나가 될 거란 말은 완성된 마력석과 관련된 이야기일까?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난 돌아갈 테니 지레 겁먹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노엘이 안심했다니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그를 방심시킬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친구들은 언제 풀어 줄 거야? 이제 만나게 해 줘.”

“응. 거기 다른 문이 하나 더 있을 거야. 그리로 가면 돼.”

“너는 같이 안 가? 왜 들어오지도 않고?”

“거기서 곧 다시 만나.”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노엘은 금세 사라지며 제 기척을 지웠다.

이제야 정말 친구들을 볼 수 있다. 그 생각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을 떠올리니 어쩐지 조금 침울해졌다.

마네킹이 노엘이 말한 문을 열자 아주 작은 공간이 나왔다. 들어와 보니 곧장 전신 거울이 나를 비추었다.

타원형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어쩐지 낯설어 손으로 차가운 거울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예뻐….”

내가 날 보고 예쁘다고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원래도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전과는 무언가 달랐다.

노엘이 하도 예쁘다고 하니 정말 그렇게 세뇌라도 되었나 보다.

그러고 멍하니 서 있다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마네킹이 그 문으로 가면 된다는 듯 양손으로 떠받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나는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의 매무새를 바로잡은 뒤 문을 열어젖혔다.

“와악!”

문을 열자마자 신선한 바람이 세차게 쳐들어왔다. 그와 함께 눈에 꽉 차게 들어온 것은 리프터의 동그란 눈알이었다.

계속 안을 들여다보며 주시하고 있던 걸까? 노엘이 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그토록 찾던 리프터 탑승구가 바로 이런 곳에도 있었다니.

“주, 준비됐어! 잘 부탁해.”

내 말을 들은 리프터는 이내 눈을 떼고 거대한 손을 뻗어 왔다. 잔뜩 긴장한 나는 얌전히 녀석의 손에 쥐어져선 밖으로 올려졌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높이 올라가는 바람에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10층에 날 내려다 놓은 리프터는 다시 얌전히 손을 떼며 돌아갔다. 새삼 저 녀석의 손을 따돌리려 고군분투했던 때가 떠올라 억울하고도 희한한 기분에 둘러싸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웅장한 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검은색 바탕에 금색의 장미 문양이 멋들어지게 새겨진 문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더욱 거대해서 괜히 위축되는 느낌에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덜컥!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묵직한 문이 양쪽에서 천천히 당겨지더니 활짝 벌어졌다.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입구에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일단 안으로 발을 내디디니 뒤에서 또 자동으로 문이 닫혔다. 그러자 일시에 빛이 사라지고 검은 허공에 홀로 떠다니는 듯 아득한 기분에 휩싸였다.

“뭐, 뭐지….”

당황한 나는 앞에 있었던 커튼을 떠올리며 손을 더듬어 찾아 쥐었다. 커튼의 입구는 생각보다 금세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커튼을 비집고 들어가니 이젠 익숙해진 검붉은 장미의 향이 다시 한번 몸을 휘감았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흐릿하게나마 형체 같은 것들이 보였다. 검은 카펫이 깔린 이상한 길이 있었다. 계단 세 개를 올라 조금 높은 단으로 가자 길고 긴 길이 이어졌다.

단 옆엔 내 머리 위까지 오는 높이의 만개한 검붉은 장미들이 푸른 잎과 함께 풍성하게 꽂혀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섞인 마력석의 붉은빛이 보석처럼 은은하게 발했다.

마치 신비로운 장미의 숲을 걷는 듯했다. 홀린 듯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길의 끝에 동그란 단이 또 계단 세 개와 함께 이어졌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노엘이 보였다.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마력석 불빛 조각들이 반딧불처럼 잘게 쪼개져 허공을 떠다녔다.

노엘이 언제부터 저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검은 제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아 낯설었다.

매끈하게 올린 앞머리와 이어진 이마가 유난히 빛을 받아선 더욱 눈이 부셨다.

거기에 검붉은 장미 꽃다발은 왜 들고 있는 건지.

잔뜩 힘을 준 모습에서 느껴지는 기합과 진중한 그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이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확 와닿았다.

“노엘… 이것들은 다 뭐야?”

그런 노엘의 앞에 마침내 도착했고, 여전히 그의 눈부신 미모에 정신 못 차리고 얼굴과 복장을 번갈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새까만 천장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놀라서 고개를 쳐드니 천장이 양옆으로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그러자 커다란 달이 보였고, 그 달빛이 나와 노엘이 선 곳에 하얗게 쏟아져 내렸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졌다. 무수히 많은 별 사이로 당겨진 별 화살들이 곡선을 그리며 빗발쳤다.

별 축제라도 온 듯한 분위기에 금방 들떠서 목이 아플 때까지도 고개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노엘이 이런 풍경을 또 보여 주겠다고 했던 말이 어째선지 갑자기 떠올랐다.

“리사.”

잔잔한 공기를 뚫고 들어온 노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제야 그를 돌아보니, 진지한 눈빛으로 꽃을 내밀고 있었다.

얼떨떨했지만 일단 꽃을 받아서 들었는데, 그다음에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을 보고 유성을 직격으로 맞은 듯했다.

“나와 결혼해 줘.”

“…….”

커플링이 담겨 있는 작은 상자였다.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온 세상이 붕 떠 버린 것처럼 나도 점점 떠 버리다 어딘가로 사라진 것만 같았다.

노엘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내 왼손을 가져가 장미 모양의 반지를 끼웠다. 이어진 손등의 키스까지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아주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정신을 조금 차려 보니 어째서인지 나는 노엘에게 반지를 끼우고 있었다.

노엘이 자기도 끼워 달라며 내게 쥐여 준 것이었지만, 누군가 잠시 날 조종이라도 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해. 너만을 영원히 사랑할게.”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 내게, 정말 그럴 것이라는 얼굴로 고집스레 말하는 그였다. 나는 혼란스러우면서도, 굽히지 않는 그의 사랑스러운 고집에 당장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보다도 훨씬 더 너를 사랑해. 그러니 나와 결혼해. 오늘 밤.”

순간 하늘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오늘 밤이라니.

잠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거야? 결혼? 오늘 밤?

대혼란에 점차 현실 감각이 짙어지며 가출했던 정신이 모두 돌아올 때쯤이었다.

“이것으로 노엘과 리사의 청혼 절차이자 약혼식을 모두 마칩니다. 오늘 밤에 있을 결혼식까지 다들 잊지 말고 참석하도록!”

리마의 또박또박한 음성이 어디선가 크게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걸어온 길의 양옆으로 놓인 수북한 생화 사이로, 그토록 보고 싶었던 녀석들의 얼굴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전혀 감금된 적 없다는 듯 모두 잘 지낸 얼굴이었다.

걸어올 땐 안 보였었는데, 저기 숨어서 지켜봤을 걸 생각하니 급격하게 낯이 뜨거워졌다.

그보다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크게 놀라 들고 있던 꽃다발마저 미세하게 떨렸다.

“후. 이걸 준비하느라 얼마나 노동 착취당했는지 몰라! 그래도 누나! 누나가 꼭 기뻐해 줬으면 좋겠어.”

리마가 이마의 땀을 닦는 척을 하며 생색냈다. 누가 보면 저 혼자 다 한 줄 알겠다. 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맞아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몰라요. 그래도 내내 즐거웠어요. 언니가 기뻐할 걸 생각하니까.”

리마 옆에 나란히 서 있는 타란티나와 베키의 따듯한 눈동자에서 그리운 온정이 느껴졌다.

“크흡. 눈물은 이따 결혼식 때 흘릴게. 흐우윽. 이 말도 결혼식 때 또 하겠지만,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알프레드는 이미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신 팔을 들어 닦아내기 바빴다.

알프레드의 들썩이는 어깨 위에 올라앉아 있던 에디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알프레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아, 진짜! 울긴 왜 우는 건데! 누가 보면 둘이 죽으러 가는 줄 알겠어. 결혼하면 둘이 지옥에라도 들어가는 거냐고.”

데릭은 에디의 물음에 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꼬맹이. 넌 모른다. 결혼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정말 지옥으로 들어가는 수도 있다.”

진지하게 말하는 데릭의 볼을 쭈욱 잡아당기며 입을 다물게 한 건 베키였다.

“지금 그게 이런 자리에서 애한테 할 소리냐고. 으이그! 못살아.”

여전히 사백안을 치켜뜬 매드는 멍하니 우릴 보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흐어어어.”

옆에서 가만히 있던 깁스는 내가 저를 쳐다보자 허공에 붕대를 풀어 손가락 대신 정갈하게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생각보다 감성적인 녀석이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노엘, 리사를 꼭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

이제 좀 진정되었는지 울음을 멈춘 알프레드가 다시 떠들썩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 뒤에 조용히 있던 토드도 눈에 들어왔다. 복잡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서로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나는 여전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고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도 못했다.

나와 노엘을 향한 모두의 눈빛이 저 하늘의 별보다도 황홀한 빛을 품으며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깊숙이 와닿는 그들의 마음을 엿보다 노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허물어지듯 단번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뒤섞여 굵게 맺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영영 닿을 수 없는 별밤의 눈부신 하늘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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