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조금 가다 보니 거친 암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휴, 뭐 이렇게 무거운 거야.”
낑낑대며 간신히 열고 들어온 문은 닫히자마자 철컥- 하며 잠기는 소리를 냈다. 밖에서 자동으로 잠기는 문인가 본데 괜히 등골이 서늘해져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문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 앞을 보니 암벽들 사이로 물이 잔잔히 흐르는 습한 풍경이 펼쳐졌다.
안타깝게도 리프터 탑승구는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시드의 방에 들어갔을 때와 같은 문으로 나올 걸 그랬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돌아가면 분명 노엘과 부딪칠 테니 계속 전진하기로 했다.
좁은 길로 들어서니 작은 새장이 천장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다. 다양한 모양의 새장들이 신비로운 광경을 자아냈지만, 정작 새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낮은 높이의 새장에 다가가 안을 살펴보니, 심장처럼 생긴 검보랏빛 덩어리가 수축했다 팽창하기를 반복하며 조그맣게 나 있는 구멍으로 숨을 힘겹게 뱉어냈다.
“이게 다 뭐지…?”
수백은 되어 보이는 새장 속에 이것과 비슷한 것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갈수록 점점 어두워지기도 했고 기분 나쁜 소름마저 돋는 바람에 빨리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작은 공간에서 동그란 우물을 마주했다. 진짜 우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양이 자주 보던 것과 상당히 비슷했다.
“아…….”
갑자기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저 안에서 무언가 나올 것 같은 위화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위험한 직감이다.
최대한 벽에 딱 붙어서 우물을 피해 지나가려 했다. 굳이 저 우물 안이 궁금하다고 살펴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흐릿한 눈을 하고서 우물을 지나쳤는데 뒤에서 이상한 기척이 들려왔다.
……?
고개가 저절로 뒤로 돌아갔다. 분명 우물 속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너무 작아 제대로 듣기도 힘들었지만 무언가 스치는 소리임은 분명했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얼어붙어 있는데 우물 안에서 검은 머리통이 언덕처럼 불쑥 치솟았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고 몸을 떨며 검은 머리가 서서히 올라오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아… 아…….”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극도의 공포감에 눈도 감지 못했다.
천천히 올라오던 검은 머리가 잠시 멈추었다. 아주 잠깐 멈추었다가 이내 얼굴이 뛰어오르듯 드러났다.
“리사!”
“악!”
순간 깜짝 놀란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우물에서 올라온 건 다름 아닌 노엘이었다. 놀라서 경악한 나를 보고는 저도 같이 놀라며 빠르게 우물 밖으로 나오는 그였다.
“괜찮아?”
“왜 거기서 올라오는 거야!”
쟤가 대체 왜 저기서 나오는 거냐고요. 하…… 내 심장……. 진짜 내 심장…….
“이런, 놀래 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우물에 일부러 숨어 있던 게 아니고?”
“아. 이건 우물이 아니야. 다른 통로로 이어지는 길이라서….”
하, 진짜…….
떨어질 뻔한 심장을 살살 달래며 일어났다. 하지만 다시 긴장해야 했다. 노엘과 결국 부딪치고 말았으니까.
저 녀석이 완성된 마력석으로 내게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절대 거리를 좁혀선 안 된다.
그래서 최대한 일어나자마자 거리를 벌려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눈치 빠른 노엘은 눈을 날카롭게 키우며 눈썹을 찌푸렸다.
“리사…?”
“그… 지금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지 마.”
“왜? 왜 그러는데.”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거기서 한 걸음도 다가오지 마.”
이 별장의 지배자이자 최종 보스는 노엘이었다.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겠지.
정말이지 저 녀석이 제일 무섭다. 그러면서도 보면 또 닿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어 돌아 버릴 지경이다.
노엘은 내 말대로 일단 멈추어 서서 귀여운 아기 새 같은 눈으로 날 응시했다.
“에디랑 방에 있지. 왜 나온 거야?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빨리 애들을 보고 싶어서…. 혼자 10층으로 먼저 올라가려고 했어.”
“그랬구나. 나는 빨리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실망한 기색을 짙게 뿜어냈다. 그러면서 다시 발을 내디뎌 내 쪽으로 천천히 좁혀 왔다. 그러면 나는 그가 내딛는 발걸음만큼 뒤로 계속해서 물러났다.
“너는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가…!”
“난 네가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은데….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그렇던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저 감미로운 목소리가 전혀 로맨틱하게 들리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일단 멈추라니까! 오지 말라고 했어.”
“리사, 넌 모를 거야. 네가 그렇게 내게서 도망치려고 발버둥 칠 때면… 난 미친 듯이 널 뒤쫓고 싶어져. 잡은 다음엔 내 입술을 마구 퍼붓고 싶어.”
노엘이 저렇게 노골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낸 일이 거의 없었는데. 역시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절대 잡혀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너 진짜…! 적당히 좀 해.”
“왜. 이런 내가 질려?”
피보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자 노엘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퇴폐적으로 변했다. 동그랗게 휘던 눈매가 미끄러지듯 찢어지고 틀어 올린 입꼬리가 푹 들어갔다.
“그래! 질려. 아주 그냥 질린다고.”
질릴 틈이 없었다. 저 매혹적인 미모는 나이가 들수록 다른 매력으로 새롭게 다듬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난 저 녀석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진 참이다.
노엘은 내가 질린다고 해도 실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더욱 짙고 어둡고 요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그럴 리 없어. 단물만 쪽 빨아 먹고 버리더라도 넌 아직 내 단물 한 방울도 못 빨아 먹었는걸.”
뭐, 뭐야…? 뭐라고?!
충격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노엘의 단물조차 빨아 먹지 못했다니.
그럼 지금껏 허투루 사귄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넘치도록 달달했는데. 말도 안 된다. 이 이상으로 달콤할 수도 있단 말이야?
“됐고! 멈춰 서란 말이야! 왜 자꾸 다가오는 거야?”
계속 뒷걸음질 치다 보니 어딘가로 막 들어온 것 같은데, 아직도 천장엔 새장들이 수없이 걸려 있었다.
“여긴 영혼들의 지옥 감옥이야.”
“지옥 감옥? 그럼… 시드도 여기 어딘가에 있는 건가.”
“정답이야. 내가 놈들을 모두 이 안에 가두었지.”
노엘은 뿌듯한 듯 뒷짐을 지고는 허리를 굽혔다 펴더니 갑자기 기지개를 켰다.
“그랬구나…. 그런데 뭐 해?”
“리사, 내가 이 거리에서 너한테 전속력으로 달려가면 몇 걸음 만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
“하지 마. 거기 그냥 딱 서 있어.”
“하지 말라니. 그냥 너한테 달려가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 기겁하는 걸까. 이제 모든 걸 다 알았으니 나 몰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그, 그게 무슨!”
“나 몰래 달아나려는 거지.”
그와 나 사이에 폭풍이 곧 몰아칠 것 같은 침묵이 잠시 맴돌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럼 내게 신뢰를 줘. 선택해. 나랑 돌아갈래, 이대로 한번 도망쳐 볼래.”
“…….”
큰일이다. 이러나저러나 잡힐 것 같지만, 어차피 잡힐 거라면 도망이라도 쳐 봐야 하나.
고민하는데 노엘은 이미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리사, 이번에 널 잡으면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줘.”
“뭐, 뭐야? 그런 게 어딨어!”
이제 더는 뒷걸음질 치는 것만으로 상황을 모면할 수 없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리프터의 탑승구를 찾아야만 했다. 노엘이 전력으로 쫓아오고 있을 게 뻔했다. 이대로라면 한순간에 잡힌다.
뒤를 살짝 돌아보자마자 흠칫해선 눈물이 다 날 것 같아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다 마침 전방의 나무 문 다섯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가운데로 들어와 문을 재빠르게 잠그자마자 노엘이 문 앞에 딱 멈추어 서는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손바닥으로 내가 들어온 문을 가볍게 타격한 그는 숨을 옅게 헐떡이며 웃었다.
“리사…. 진짜 빠르네. 좀 더 노력해 볼 테니 잡히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마.”
누가 실망한다고…. 미쳤나 봐, 진짜. 전에 뜨겁게 키스 나누던 남자 친구 맞냐고.
나는 입을 문 가까이에 대고 크게 말했다.
“아니, 노력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두라고!”
뭐라고 말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금세 기척도 없이 조용해졌다. 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계속해서 날 추격하겠지?
내가 모르는 비밀 통로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일단 들어온 곳을 둘러보니 여기도 리프터의 탑승구는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폐쇄적인 공간이었는데, 녹슨 철제 벽으로 이루어진 창고 같은 곳이었다.
잡동사니가 많은 이 창고엔 안타깝게도 다른 출구가 없었다. 보아하니 나가려면 왔던 문으로 되돌아 나가거나 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왔던 문으로 나가긴 꺼림칙하니 사다리를 올랐다. 사다리는 천장까지 뻗어 있었고 천장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었다.
통로 안을 들여다보니 기어 다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들어가기가 꺼려져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쿵쿵쿵쿵. 쿵쿵쿵쿵.
통로 안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네발로 기어 오는 것 같은 소리에 심장이 리듬에 맞춰 뛰었다.
“거기 누구…?”
금세 가까워진 정체가 꺾이는 길을 통과하더니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리사!”
“악, 진짜!”
보자마자 경악한 나는 곧장 사다리를 미끄럼틀 타고 내려가듯이 내려왔다.
또 노엘이었다. 그가 무서운 속도로 기어 오고 있었다. 날 찾아내서 즐겁다는 표정을 하고서.
뒤를 슬쩍 돌아보니 노엘 역시 사다리를 뛰어내리다시피 하며 내려오는 중이었다.
“리사! 사다리를 그렇게 미끄러져 내려가면 위험해.”
“뛰어내린 네가 할 소리냐고!”
나는 다시 들어왔던 문으로 나와 그 옆에 있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 잠금장치를 잠갔다.
이 별장의 구조에 빠삭한 그를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헉헉… 헉…….
잠시 문에 기대어 넘어갈 것 같은 숨을 가다듬는데 옆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노엘이 나왔다. 그러고는 귀신같이 내가 들어온 방의 문을 쿵쿵 두드리는 그였다.
“거기 들어간 거 다 알아.”
나는 하도 어이없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되물었다.
“뭐야. 어떻게 안 건데!”
“…진짜였네.”
“…….”
“한번 찍어 본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