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무엇이 굴러떨어진 건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겠다. 내 머리카락에 엮어 숨겼던 마력석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 같다.
‘하필 지금!’
구슬 굴러가는 소리는 벽에 툭 부딪히고 나서야 완전히 멈추었다.
노엘은 내 뒤로 무엇이 떨어졌는지 보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나는 마침 그의 목에 걸쳐진 내 팔로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눌러 막을 수 있었다.
“리사, 잠시 팔에 힘 좀 풀어 줄래? 뭔가 떨어진 것 같아서….”
“내 원피스에 달려 있던 장식이 하나 떨어져 나간 것 같아. 원래도 자주 떨어졌었거든!”
“…그래?”
“그럼!”
필사적으로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눈앞이 벌써 새하얘지는 듯했다. 어찌 되었건 일어나긴 해야 할 텐데 그러면 결국 노엘이 땅에 떨어진 마력석을 발견하고 말겠지.
그렇다면 떨어진 것이 제발 귀환의 마력석이 아니길 기도하는 수밖에.
“그럼 내가 주워서 다시 달아 줄게. 해 본 적 있어.”
“어?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또 떨어질 텐데….”
계속해서 고개를 들려는 노엘의 목을 조르듯 눌러 버렸다. 그는 모를 것이다. 내 손바닥에 뜨거운 땀이 고이고 있다는 사실을.
팔에 힘을 꽉 주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또 떨어지면 또 달아 주면 되지.”
노엘이 이렇게 고집을 부린다는 건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의 눈동자가 점점 서늘하게 식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 어차피 저 마력석은 이미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다음에 벌어질 상황을 격파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알았어. 그럼 주워 와.”
노엘은 냉큼 내 팔을 벗어나 몸을 일으켜 마력석을 주워 왔다.
‘제발… 신이시여…. 귀환 마력석만은 아니기를…! 절대 안 된다고요.’
이윽고 다시 내 옆으로 누운 노엘이 보여 준 마력석은…….
“이거… 마력석이지?”
“어… 그러네. 마력석이 왜 굴러떨어졌을까?”
살았다. 이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귀환의 마력석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쪼그라든 심장이 다시 숨을 쉬었다. 이제 마무리 수습만 잘하면 되겠다 싶었다.
“마력석은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잖아.”
“나도 그런 줄 알았어. 그런 줄 알았는데… 이게 어떻게 옷에 걸려 있던 걸까? 나도 모르게 달려 있었나 봐.”
시치미 떼며 정말 몰랐다는 순수한 눈을 지어 보였다. 눈치 빠른 그는 영 석연치 않아 하는 분위기였지만, 내가 계속 아니라고 하니 별수 없을 것이다.
“정말 몰랐어?”
“그렇다니까.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넌 그렇게 모든 걸 속여 놓고서? 누가 더 큰 걸 속였는지 한번 비교해 볼까?”
“…….”
“왜 아무 말이 없어?”
“그럼… 한번 해 봐.”
노엘이 갑자기 내 손에 주워 온 마력석을 쥐여 주었다.
“뭐, 뭘?”
“마력 주입해 봐. 무슨 마력석인지 궁금해서 그래. 너도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긴 했다. 어차피 귀환 마력석도 아니고 하니 서로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어 마력을 곧바로 끝까지 주입해 보았다.
<순식간의 여행 : 사용자가 보고 싶어 했던 풍경으로 이동합니다. 단, 3분 뒤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내 앞에 뜬 마력석의 문구는 노엘에게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우린 동시에 ‘이게 뭐지?’ 하는 황당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시야가 잠깐 멀었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을 때, 주변은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바뀌지 않은 건 여전히 침대 위에 있는 나와 노엘뿐이었다.
밝은 보랏빛 오로라가 장막처럼 드리운 까만 밤하늘에 별이 촘촘히 박힌 풍경이 펼쳐졌다. 침대 아래는 온통 캄캄해서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뭐가 되었든 좋았다.
“진짜네. 저런 밤하늘을 줄곧 보고 싶었던 것 같아.”
누워서 바라본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동안 칙칙하고 갑갑한 별장에만 갇혀 있던 탓일까. 해방감 또한 더욱 커다랗게 다가왔다.
별들에서 향기라도 나는 건지 밤공기 역시 완벽했다.
노엘은 하늘을 조금 바라보다 상체를 엎드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또렷한 이목구비 뒤로 별이 셋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런 거야!”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노엘의 귀 뒤로 묶인 양손을 들어 올려 가리켰지만, 그는 그저 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딘가 쓸쓸해진 눈빛이 별보다 더 예쁘게 반짝였다.
“리사, 저런 거 좋아하는구나. 그럼 다음에 또 볼 수 있게 해 줄게.”
“응…?”
우리에게 다음이 있긴 있는 걸까.
“진작 물어봤어야 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네.”
“……됐어. 우리가 지금 할 이야긴 그런 게 아니야. 아니, 얘기할 필요도 없어. 어차피 넌 너대로 미래를 헤쳐 나갈 테니까.”
“…….”
아름답게 펼쳐졌던 밤하늘이 흩날리며 흩어지더니 우린 다시 시드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시드가 빈 깡통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바느질하는 그 뒤통수를 보자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정말 순식간에 여행이라도 갔다 온 것 같다.
“3분이 무슨 3초 같네.”
어딘가에 푹 담가졌다 나온 것 같은 노엘이 몽롱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더니 죽겠다는 얼굴이 되어선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키스하면 안 돼…?”
“이미 대답을 알고 있을 텐데? 절대 안 돼!”
그는 못내 아쉬운지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허리를 잡은 손을 떼지 못했다. 안달 난 모습을 보니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하고 싶어…. 하고 싶어 죽겠어…. 그것 말고도 너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진도 안 나간다고 철벽 칠 땐 언제고?”
생각보다 난 뒤끝 있는 여자인가 보다. 잊은 줄 알았는데 이럴 때 귀신같이 떠올라선 써먹고 있다니.
힘들어하던 노엘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상체를 일으키더니 내 손목의 밧줄을 차분하게 풀어 주었다.
자유로워진 손에 안심한 나는 그제야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노엘의 얼굴을 살피니 여전히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주제에 토라진 입꼬리를 하며 말했다.
“철벽이라니…? 너한테 그런 짓을 한 기억은 없어. 아무튼 진도 안 나간다고 한 건 변함없어. 하지만…….”
“하지만…?”
“내 나름대로 우리 진도에 대해 깊이 고민을 좀 해 봤어.”
뭐야…. 그런 이야기를 왜 그렇게 진중한 얼굴로 심각하게 또박또박 말해 주는 건데…….
심지어 방금 막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라앉은 참이었다. 그래도 궁금하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어디 들어나 봐야겠다.
“무얼… 어떻게 고민했길래?”
“네가 나와 결혼해 주기 전엔 절대 진도 안 나갈 거야. 이건 확실해.”
“아……, 그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은근하게 노려보았다. 저 말을 하는 의도가 대체 무엇일까. 날 안심시키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자극하려는 걸까.
이 이상의 진도가 궁금하면 남아서 결혼하는 걸 택하라고 얘기하고 싶은 건가? 신비주의 작전?
에이, 설마.
내 오묘한 표정을 마주친 그는 눈썹을 움찔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 눈빛은 뭐지.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아니, 뭐……. 누가 뭐라나.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줄곧 나를 따라왔던 간질간질한 발소리였는데, 다른 발소리도 섞여 있는 걸 보니 하나가 아닌 것 같았다. 두 종류의 발소리가 문밖에 멈추어 서선 조용히 숨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노엘도 나처럼 기척을 알아차리고는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가 볼게.”
성큼성큼 문 앞에 다가간 노엘은 잠시 귀를 대고 경청하더니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끄아아악!”
밖에서 들려온 비명의 주인공은 에디였다.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랐는지 뒤로 자빠지는 소리가 찰지게 들려왔다.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도 함께였는데.
“깔려 죽을 뻔했잖아!”
주방장 옥토레드퍼스의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반가움에 당장 달려가 둘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노엘은 인상을 구기며 주꾸미 같은 주방장을 들어 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주방장은 나를 힘껏 쏘아보며 원망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이런 꼴까지 하고서 열심히 쫓아갔건만…. 계속해서 날 피해 다니더군.”
그러고 보니 주방장은 웬 막대기를 쥐고서 바퀴 4개 달린 나무 위에 올라타 있었다. 꼭 얼음 썰매를 탄 모습과 비슷했다.
세상에. 그 소리가 그럼!
지금껏 주방장이 날 쫓아오고 있던 거였구나.
어쩐지 매번 아무것도 안 보인 데다가 소리도 발걸음 같지 않게 사부작거린다 했다. 이제야 그 정체를 알게 되니 그때 무서워서 혼자 쇼했던 게 생각나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미안…. 미안해요…. 난 무서운 뭔가가 따라오는지 알았지.”
주방장이 썰매를 끌며 열심히 날 쫓아왔을 걸 상상하니 바짝 엎드려 사죄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후…. 썰매를 끄니 속도는 확실히 빨랐지만 힘들어서 크게 목소릴 낼 수도 없었어. 아마 못 듣긴 했을 거야. 내 이래서 약속 같은 건 안 하려 했어!”
주방장은 썰매 세트를 내던지며 노엘의 손바닥에 편히 드러누웠다.
계속 궁둥이의 먼지를 털던 에디도 그제야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작아서 같이 있는 줄도 몰랐어.”
주방장이 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다던 에디는 내 옆으로 도도도 달려와 딱 붙어 섰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노엘은 나와 에디 사이를 은근슬쩍 파고들며 갈라놓았다.
“에디, 이곳엔 오지 않기로 나와 약속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