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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125화 (125/145)

125화.

“저걸 뚫고 들어온다고?!”

억지로라도 다시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주위를 둘러볼 틈 따윈 없었지만, 벽이고 바닥이고 온통 회색의 반질반질한 대리석들로 채워져 있었다.

체스판같이 생긴 길은 다행히 들어갈 구석이 많았다. 내가 길을 꺾어 들어갈 때마다 뼈를 빠드득 꺾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는데, 그때마다 리프터가 멈추는 덕분에 거리를 더 벌릴 수 있었다.

‘리프터는 기억력이 안 좋다고 했지. 토드를 10층으로 올려 주고 나서 날 까먹었었는데.’

그렇다면 나 대신 무언가를 손에 쥐여 주면 더는 날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근데 그럴 만한 게 여기 있을까?

최대한 꺾여지는 길로 달리던 중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니 조금은 여유가 생겨 숨을 고르며 다녔는데, 앞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밝혀졌다.

내가 이쪽으로 오자마자 켜진 걸 보니, 날 인식해서 불이 저절로 밝혀진 모양이다.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그림자가 훤히 드러났고, 그 누군가는 바로 노엘이었다. 노엘은 뒤를 돌아 나를 발견하고는 팔을 뻗고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리사, 이리 와.”

“또 날 쫓을 셈이야? 내 화만 더 키울 뿐이야.”

“화를 내도 내 곁에서 내기로 한 거 잊었어?”

“하!”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건지. 그를 무시하고 신속하게 뒤를 돌아 다른 길로 들어섰다.

리프터에 이어 노엘까지 나를 뒤쫓고 있었다. 마음이 바빠진 나는 노엘의 느긋한 발걸음 소리와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벽에서 강아지가 들락날락할 만한 크기의 구멍을 발견해 안을 들여다보니 텅 빈 공간이 있었다. 이 정도라면 리프터의 손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었다.

노엘도 차마 내가 여기 숨을 거란 생각은 못 하겠지. 잠시 따돌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당장 기어들어 갔다.

숨도 잠시 돌려야겠고 새로 정비도 좀 해야겠다.

들어오니 적당히 아늑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헐떡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정이 되길 기다리며 밖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리프터의 손이 근처에 왔고, 내가 들어온 개구멍에서 멈추었다. 역시 못 들어올 테니 포기하겠지? 생각하던 찰나였다.

빠드득 빠드드드득 뿌걱 뿌걱.

꺾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났는데 지금까지의 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조금 있으니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이윽고 안으로 무언가 들어왔는데, 새끼손가락 하나가 쑥 들어와선 안쪽을 좌우로 살피는 것이었다.

손가락도 꺾이는 줄은 몰랐지.

“아아악! 저리 가! 나가!”

나를 발견하고 휘감으려는 새끼손가락을 발로 마구 걷어차 버렸다. 격렬하게 저항하자 두들겨 맞던 손가락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밖으로 튕겨 나갔다.

“리사? 그 안에 있는 거야?”

노엘이 근처에서 배회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손가락이 정신 못 차리는 김에 급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마자 노엘이 걸어오는 반대 방향으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그렇게 얼마나 거리를 벌렸을까, 꽤 깊숙이 들어왔다고 느껴질 즘이었다.

또각또각 하이힐의 구둣발 소리가 내 쪽으로 가까워졌다. 마침 꺾이는 길목을 도는데 딱 마주치고 말았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알만 빠질 듯이 튀어 나갔다.

……!

여기저기가 찢어진 드레스를 입은 귀족으로 보였는데, 검은 머리가 길게 뻗은 여자 귀신이었다. 푸른빛의 피부와 검은 입술, 동공이 없는 흰자가 나를 보며 부자연스럽게 크게 웃어 보였다.

“아… 아….”

숨넘어갈 듯이 신음을 흘리던 나는 잠시 정신을 빼앗긴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만이 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여자의 뒤에서 다른 귀족 여자들이 떼로 몰려들었고, 그 숫자는 어림잡아 10이 넘어 보였다.

처음 마주친 여자가 양손을 살며시 들어 올렸는데, 각각 포크와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그러자 뒤로 몰려든 다른 녀석들도 포크와 나이프를 일제히 들어 올렸다.

날 식사 대상으로 인식한 듯하다.

“자, 잠깐!”

그것들은 예상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마비되었던 내 몸은 생존 본능을 발휘하여 다시 도망쳤다.

뒤에서 구두 또각거리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저것들에 붙잡히면 온몸이 썰릴 것이란 생각에 더욱 필사적이 되었다.

도대체 몇 명한테 쫓기고 있는 건지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이다. 내가 어쩌다 이런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까. 푸념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는 게 놀라운 따름이었다.

그때, 방금 막 발을 디딘 곳 근처에서 뿌옇고 붉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 이게 뭐야?”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이 복도에서만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마셔도 되는 연기일까? 독성 가스 같은 거면 어떡하지? 겁이 난 나는 최대한 숨을 참고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기에 얼른 나가는 문을 찾아야 했다.

“리사,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 내 곁에서 편히 안겨 있어.”

근처 어딘가에서 노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구둣발 소리와 리프터의 손 꺾이는 소리도 가까워졌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거침없이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막다른 길임을 확인하고 바로 옆으로 비틀어 들어갔다. 그곳 역시 막혀 있었지만 다행히도 반대편에 마침 문 하나가 있었다.

그 문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또각또각 굽을 굴리며 속력을 낸 귀족 여자들이 내 앞을 벽처럼 촘촘하게 막아섰다.

여전히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언제라도 찍어 내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머리카락에 엮어 넣은 마력석 하나에 손을 대고 한 번에 마력을 주입했다. 천천히 흘려보낼 때가 아니었다. 뭐든 제발 도움 되는 게 나왔으면 좋겠다.

<분신 생성 : 분신을 두고 원래의 몸은 빠르게 위험 상황을 벗어납니다.>

뭔지도 모르고 곧장 발동한 마력석이 보라색 빛을 뿜어냈고, 나는 순간적으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감각에 깜짝 놀라 내 손과 몸을 내려다보았다.

주위의 모든 게 멈추었고, 갑자기 내 몸이 환영처럼 투명해졌다. 빠르게 상황을 벗어난다는 마력석의 문구를 떠올리고는 믿어 보기로 했다.

유령같이 변한 몸을 움직여 꽉 막힌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내가 정말 그들을 통과하며 스쳐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내 몸은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었다.

어쩐지 소름이 돋아선 들어가려던 문고리를 손에 막 쥔 참이었다. 다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며 멈추었던 시간이 돌아왔다. 내 몸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착한 리프터가 내 분신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어 꺾었지만, 바로 걸리는 귀족 여자 하나를 잡아챘을 뿐이었다.

이내 그것을 데리고 순순히 물러나는 걸 보고 안심했다. 덕분에 리프터가 더는 나를 쫓지 않겠지.

남아 있는 귀족 여자들은 내 분신을 둘러싸고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흥겨워 보이는 뒷모습들이었다.

“리사, 너무 무리하지 말고 다치지 않게 조심히 다녀.”

여전히 느른하게 걸어오는 노엘을 피해 서둘러 문을 열었다.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어둡고 낡은 나무 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진 조촐한 방이라 생각했는데,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는 기함하고 말았다.

책상 위에 놓인 병들에는 다양한 안구가 들어 있었고, 너덜너덜하고 매끄러운 가죽 같은 것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가죽이라기보단 아마도 인공 피부 같은데.

‘아…….’

더는 놀랄 틈도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다양한 크기의 붉은 입술들이 책장 한편을 가득 메우며 전시된 걸 본 참이었다.

저벅저벅.

그때, 내가 들어온 문이 아닌 건너편에 있는 다른 문에서 누군가 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유감스럽게도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끼익.

침대 밑으로 깊숙이 들어온 나는 곧장 열린 문으로 들어온 까만 구두코를 보고, 숨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구두를 보아하니 성인 남성인 것 같은데, 딱 종아리 아래까지만 보여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뭔지 모르는 작업에 돌입했다. 열심히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길게 이어지니 나로선 그나마 조금씩 진정되는 중이었다.

이대로 들키지 않고 잘 버텼다가 남자가 나가면 저 문으로 탈출해야겠다. 긴장을 풀면서도 남자의 위치를 놓치지 않으려 눈으로는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무얼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방 안에서 잔잔하게 울리는 소리를 듣다 보니 무언가를 꿰매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실이 길게 스치는 스산한 소리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바느질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정상적인 천을 엮는 건 아닐 것이다.

후으으…….

심호흡하되 남자가 가끔 내는 책상 치는 소리에 맞춰서 내야 했다. 그래야 기척도, 소리도 숨길 수 있겠지.

끼익!

한참을 작업하던 남자가 갑자기 의자를 뒤로 끌며 일어났다. 기지개를 위로 크게 켜고는 내 숨마저 삼켜 버릴 듯한 하품을 했다.

그는 책상 위 초를 훅- 불어 껐다. 그러자 방 안은 아주 어둑해졌다. 눈이 적응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작업을 마쳐서 나가려는 줄 알고 큰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런 내 희망을 처참히 짓밟았다.

남자는 까만 겉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고는 내가 숨은 침대로 올라와 누웠다. 이대로 잠을 자려는 모양이었다.

‘이런……!’

이렇게 된 이상 남자가 깊이 잠들었을 때를 노려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무장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침대 위에서 아까보다 거칠어진 호흡 소리가 고막을 스치고 들어왔다. 코 한번 크게 골았다.

슬슬 팔꿈치에 힘을 실은 나는 하체를 끌어당기며 느리게 기기 시작했다.

깊이 잠든 저 고약한 숨소리에 맞춰 천천히……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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