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화들짝 놀란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노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나가는 문고리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노엘은 그런 나를 그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는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네가 애들을 잡아갔다니.”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마력석이 틀렸다고,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랐다. 그러면 나도 그렇게 믿을 것이다.
더없는 충격과 혼란함에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휘몰아쳤고 말아 쥔 손바닥이 뜨거운 땀으로 얼룩졌다.
“……필요한 과정이었어. 괴물의 몸이 된 녀석들에게도… 네게도. 우리 둘에게도.”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그렇게…… 나를 속일 수 있어!”
그에게 한두 번 속은 게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속뜻이 무엇이든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그들을 구하고 싶어 하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악몽까지 꿔 가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했던 나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답답해져선 가시가 박힌 것 같은 통증이 전해졌다.
“속여서 미안해….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언젠간 말하려고 했어.”
“정말 사과는 쉽게도 하는구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애들을 구하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인데도 그에게 화가 나지 않는 것이 너무도 슬펐다. 분노해야 마땅하다는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속이 쓰라릴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넌 이미 우릴 구했어. 따듯하게 다가와 줬지. 녀석들이 그렇게 하나로 뭉쳐서 괴물들에 맞서려 했던 건… 모두 네 덕분이었어.”
“그런 말로 내 화를 누그러뜨릴 생각 하지 마.”
“그리고 내 예상대로 넌 녀석들을 구하겠다며 돌아가는 일을 미루었지. 아무리 예상은 했다지만 그런 네가 조금은 미웠어. 내 곁은 떠나려 했으면서… 애들이 잡혀가니 떠나려던 것을 미루었지.”
“…….”
“나라고 모든 일이 의도대로 흘러간 건 아니었어. 정말 위험한 상황도 있었고….”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넌 모를 거야. 지금 내가 얼마나… 황당한지 알기나 해?”
“우린 어차피 서로를 속이고 있었잖아.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도 날 속이는 일이 있을 테니 나한테만 너무 뭐라고 하진 말아 줘.”
왜 또 속였냐며 따지고 있을 일이 아님을 다시 기억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속이고 있을 뿐,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저 감정에 휘둘리기만 해선 안 된다.
나한테 돌아가라고 했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
“대체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네가 수상한 짓을 하며 별장을 돌아다닐 때부터.”
침착해야 한다. 흥분하지 말자.
어차피 떠나려 하는 몸이다. 노엘에게 마음껏 화를 낼 자격이 있을까.
“애들은… 애들을 어떻게 했어?”
가끔 노엘은 농담 반 진담 반 어조로 리마를 없애 주겠다는 소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저렇게 녀석들에게까지 질투하며 나를 원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녀석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천천히 고개를 수그린 노엘은 싸늘한 낯빛이 되어선 삭막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니 온몸이 심장이 돼 버린 것같이 들썩이는 듯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싹해진 나는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더욱 꽉 주었다.
“털끝 하나 건드렸다간… 널 영원히 용서치 않을 거야.”
“리사, 나는 네가 녀석들을 구해낼 때까지 무사히 살려 둘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꼭 구해 줘. 하지만 네가 구해내지 않겠다면 녀석들은 모두 죽어.”
“너 정말…!”
“네가 돌아갈 준비를 착실히 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널 붙잡아 둘 준비를 해 온 것뿐이야. 과연 누가 이길까. 궁금하지 않아?”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피폐해 보이는 눈빛과 기괴한 조화를 이루는 미소가 그동안 봐 왔던 그와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시간을 이렇게까지 끌 필요는 없었잖아.”
“넌 마력석을 만드는 방법을 모르겠지만… 난 마력석을 만들 수 있거든.”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마력석들도 과거 리사가 어릴 때 만들었다고 했었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내게 마력석을 만드는 방법까지 알려 주진 못했지만.
“그래서?”
“최상위의 능력을 갖춘 마력석일수록… 제작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거든. 게다가 반드시 원하는 능력으로 만들어지리란 보장도 없어서 여러 번 시도하려면 그만큼 긴 세월을 흘려보내야만 해.”
“그래서 무슨 마력석을 만들려는 건데.”
“널 내 곁에 붙잡아 놓을 마력석을 만들고 있어. 우리가 영원히 헤어질 수 없도록.”
순간 등골이 시리도록 오싹해져선 몸이 발작하듯 떨렸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순식간에 다시 그가 두려워졌다.
냉랭하게 얼어붙어선 입술을 깨물던 내게 노엘은 이어서 중얼거렸다.
“아직 다 된 건 아니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완성될 것 같아. 그때 우린 정말 영원히 하나가 될 거야.”
노엘이 갑자기 몇 걸음 훅 다가와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선 당장이라도 날 휘어잡을 것만 같아 급격히 긴장했다.
“그런데 아까 그 마력석은 뭐였어? 내 비밀을 폭로한 마력석. 보아하니… 역시 마력석이 더 있나 본데.”
머릿속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소름이 짜르르하게 번졌다. 이대로 있다간 가지고 있던 마력석마저 노엘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없어!”
“감쪽같이 날 속였어.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숨겨 놓은 모양이지.”
그의 타오르는 붉은 눈길이 내 온몸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핥아 내리는 듯했다.
어째서 그 시선에서조차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것도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너랑은…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
화를 낸 나는 당장 문고리를 잡아당기고선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손안에 다시 한번 붙잡혔다간 정말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통로를 죽을 듯이 빠른 속도로 내달린 뒤, 또 다른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였다.
오른쪽에 밖으로 향하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는데, 이번엔 하나가 아니라 열 개 정도가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 있었다.
노엘은 여전히 바로 날 쫓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심되면서도 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불안했다.
이대로 친구들을 구하러 가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
노엘이 그들을 정말로 해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나를 붙잡아 시간을 끌기 위한 덫이겠지.
하지만 그가 내 예상을 처절하게 부수고 그들을 해하려 한다면? 내가 돌아간 뒤에 그들에게 화풀이라도 하려 든다면…?
이런 의심이 가당키나 한 건가. 나는 노엘을 어디까지 믿고 있는 걸까. 이제 난 무얼 해야 하는 걸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밖으로 뚫린 출입구들에서 찬 바람이 휘이잉거리며 돌풍처럼 몰아쳤다. 간만에 밖의 공기를 마시니 머릿속이 점차 냉해지는 것이 혼란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 귀환 마력석은 지금 내 손안에 있고, 노엘이 이상한 마력석을 만들어낸다 해도 그 전에 탈출하면 되는 거잖아.’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단순하게 가기로 했다.
일단 노엘에게 잡혀 있을지 모르는 친구들을 풀어 주고, 위급 시엔 녀석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근데 그럼 시드는 어떻게 된 거지…?’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또 하나의 물음이 떠올라 버렸지만, 밖에서 리프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더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걸음을 급히 멈추고 출입구 근처에 딱 붙어 섰다. 리프터가 고개를 수그리며 출입구 안을 들여다보는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전에 봤던 그 커다란 눈알 하나가 이 출입구를 꽉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 숨어 있으니 다시 얼굴을 들었는지 까맣게 드리웠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리프터를 따돌리려면 앞으로 9개의 출입구를 더 지나야 하는데, 기둥 하나를 각각 사이에 두고 있어 숨을 수는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당장 리프터를 이용해 10층으로 올라갈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거짓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이곳을 좀 더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출입구를 건너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엔 먼저 건너가지 않고 고개를 슬쩍 내밀어 밖을 살폈다.
10층까지 뻗어 있는 거대한 생명체가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얼굴에 커다란 눈알이 하나 박혀 있었고 이마엔 뾰족한 뿔도 하나 달려 있었다.
리프터는 동서남북으로 제자리걸음을 하며 출입구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타이밍만 맞추면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리프터가 내 쪽에서 등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출입구 하나를 지나쳤다.
“휴우…….”
고조된 긴장감에 가슴을 간신히 쓸어내리고선 머리를 슬며시 내밀어 녀석의 동태를 파악했다.
또다시 녀석이 뒤를 돌아보고 있는 타이밍에 발을 뻗어 멀리 뛰기를 하듯이 출입구를 뛰어넘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돌려 리프터의 상태를 지속해서 관찰했는데, 리프터의 보라색 등에 신호등처럼 붙은 커다란 눈알 세 개가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활짝 열렸다.
그 눈들이 일제히 나를 발견했고 리프터는 뒤를 휙 돌아보았다.
“아……!”
나랑 눈이 잠깐 마주치긴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바로 기둥 뒤에 숨었기 때문에 녀석이 찾는 걸 포기하고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내 오산이었다.
내 옆으로 다가온 눈알이 안을 휘젓다가 멀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녀석의 손이 들어오고 말았다. 나는 거대한 손끝이 침입하자마자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뭐, 이런!”
이를 악물고 남아 있는 출입구들을 빠르게 지나치는데 뒤에서 손목이 꺾이는 뿌드득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울려댔다.
그사이, 마침내 다다른 끝 문을 열고 들어와선 무사히 걸어 잠그기까지 했다.
이제 괜찮겠지. 하며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쓸고는 여기가 어딘가 두리번거리는데 곧장 뒤에서 굉장한 위화감이 몰려들었다.
뻑!
터지는 소리에 뒤를 홱 돌아보니 리프터의 손이 힘차게 문을 부수고 쳐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