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나는 못 이기는 척 부끄러운 뺨을 한껏 붉게 물들이다 싱싱한 딸기를, 생크림이 묻은 달큼한 입술을, 쫄깃하게 문질러 오는 혀를 맛있게 받아먹었다.
“나도 먹여 줘. 지금 네가 씹고 있는 딸기. 그거면 돼.”
노엘은 혀만 거두고 입술은 여전히 딱 붙인 채로 내 오물거리는 입술을 제 입 속에 가두어 넣고 집요하게 빨아댔다.
입 안에서 다져진 딸기를 혀로 낚아채 간 노엘은 맛있다며 씹히지도 않을 딸기를 오물거렸다.
가만히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샌가 또 그에게 말려들고 말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봐도 나랑 데이트할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매드와 깁스가 주시하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인데. 내가 화를 내도 그때뿐이지 결국 소용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드를 마주할 생각에 나는 마음이 급한데 노엘은 왜 이렇게 여유 부리는 걸까.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가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다시 떠올라 급격히 마음이 식어 버렸다. 왠지 모를 조급함에 나는 다시 웃음기를 거두고 노엘을 지그시 밀어냈다.
한 번 화를 내서 안 된다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해야겠지. 이 돌고 도는 쳇바퀴를 어서 끊어내야만 한다.
“케이크는 이제 질렸어.”
“정말이야?”
노엘은 기다렸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예상외의 긍정적인 반응에 나는 적잖게 당황한 참이었다.
“그만 먹을래. 더는 못 먹겠어.”
“네가 실컷 먹고 질리기만을 기다렸어.”
“노엘, 난 지금 온통 친구들 생각뿐이야.”
“…케이크는 이제 질렸다고 하니 그만 먹고 쉬는 게 좋겠네.”
내가 심각하게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 노엘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체념했다. 차분한 눈길로 나를 응시하는 것이 아주 이성적으로 돌변한 모습이었다.
“쉬지 않고 지금 바로 나가고 싶어. 네 욕심은 좀 넣어 두면 안 될까?”
“리사, 밤이 깊었어. 그리고 시드는 멀리 있지 않아. 딱 한숨만 자면 같이 갈 텐데 그것도 못 참겠어?”
흔들림조차 없는 그의 철벽같은 눈빛이 무척 낯설었다.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네가 자꾸 유혹하니까 그렇지. 지금 그럴 상황도 아닌데! 이전에 내가 화냈던 걸 벌써 잊은 거야?”
“……안 해.”
“뭐?”
“안 한다고.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이제 됐지?”
“참 나! 넌 뭐가 그렇게 매번 쉬워?”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인상을 험하게 구겼다. 갑자기 차가워진 녀석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다른 사람 같았다.
노엘은 내 반응을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허탈하게 웃었다.
“쉬울 리가. 네가 그렇게 쉬웠다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나. 되었으니까 잠이나 자자. 더는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아깐 그렇게 달콤하게 행동해 놓고선… 내 입술을 다 먹어 버릴 것처럼 껄떡거려 놓고선. 지금은 아쉬울 거 하나 없다는 듯 고고하게 혼자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이번엔 철벽남 행세로 나와 밀고 당기기라도 하려는 걸까. 집착하던 남자가 갑자기 비싸게 구니까 묘하게 더 끌리네.
하는 수 없이 침대 속으로 들어온 나는 상체를 세워 털썩 앉았다. 매듭이 확실하게 지어지지 않은,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 잠을 잘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말 이번만이야. 오늘 이후부턴 절대로 너와 이렇게 쉬는 일은 없을 거야. 이걸로 마지막이라고! 알았어?”
노엘은 사뭇 쓸쓸한 모양새로 내게서 등을 돌리며 옆으로 돌아눕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그렇게 해.”
힘없이 하는 대답이 영 꺼림칙하고 미덥지 않았지만, 뭐라고 더 했다간 울기라도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럼 잘 자.”
나는 어떻게든 자 볼까 하고 누웠다가 눈을 부릅떴다. 몸 곳곳에 숨겨 둔 마력석이 마음에 걸린 것이었다.
자는 동안에 혹시라도 노엘이 수색하진 않을지. 하는 몹쓸 생각이 떠오르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비겁한 놈일 리가 없는데.
내 뇌는 언제나 가장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곤 한다. 그렇기에 그 상황이 닥칠 확률은 적기 마련이지만.
“리사, 네가 나한테 맡긴 마력석. 난 절대 그거 돌려줄 생각 없어.”
어둠 속에서 그가 다시 말을 붙였고, 나는 바짝 긴장해 옆으로 돌아누워 그의 등을 노려봤다.
“…….”
“그러니 넌 못 돌아가게 될 거야.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떡할래?”
또 날 시험하려는 걸까.
“…….”
“내가 널 강제적으로 감금하려 한다면 어떡할래.”
서늘하게 들려온 목소리에서 굳센 의지를 느꼈다. 노엘이 정말 그렇게 하기라도 할 것 같아 나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러니 잠시 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예 나를 바라보며 돌아누워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 버릴까. 미쳐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눈 딱 감고.”
머리에 있던 그의 손이 뺨을 쓸며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 허리를 매만졌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골반이라 숨겨 놓은 마력석이 있어 곤란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났다. ‘그러면 안 되는데.’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다행히도 그의 손이 골반으로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다시 허리를 쓸며 위로 올라왔는데 가슴 바로 아래에서 노골적으로 멈추었다. 그러고는 무언가 갈등하는 낌새가 느껴졌다.
역시 이런 짓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한참을 거기서 머물다 손을 거두었다.
동시에 나도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가슴에 있던 마력석은 이미 써서 없어졌지만, 내가 자는 동안 몰래 몸을 수색할 것이란 의심은 거두어 간 셈이었다.
“일단 내일부턴 네 말대로 방해하지 않는 척해 볼게. 이러다 진짜 네가 나한테 질리기라도 할까 봐 무서우니까.”
쪽.
“잘 자.”
혼자 들릴락 말락 중얼거리던 노엘은 내게 입을 가볍게 맞추고는 다시 반대쪽으로 빠르게 몸을 웅크리며 돌아누웠다. 나는 괜히 눈을 떴다가 들키기라도 할까 봐 그가 돌아눕는 소리에도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화를 낼수록 노엘도 무언가 조금씩 변하는 느낌이 든다. 초조한 걸까? 여러모로 갈등하는 모습이 엿보이니 앞날에 검은 안개라도 뿌옇게 낀 것 같다.
내가 싸워야 하는 상대가 시드인지 노엘인지 내 자신인지 이제는 헷갈릴 정도다.
***
오랫동안 자는 척을 했더니 정말 잠이 와 버린 건지. 잠깐 깊게 잠들었다 깨어났다.
시간을 보니 아직도 새벽인 듯한데 잠은 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따듯한 물에서 몸을 좀 녹이고 싶단 생각이 들어 바로 옆 조그만 욕실로 조심스레 향했다.
물을 받는 동안 정신이 멍해져선 물이 차오르는 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저 시간이 빠르게 흐르길 바랐다.
욕조에 들어간 나는 숨겨 두었던 마력석들을 손바닥에 놓고 또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 머리카락으로 하나씩 엮어서 머릿속에 감추기 시작했다.
이제 옷 속에 감추어 두는 것도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노엘을 의심한다는 사실이 제일 싫었다. 차라리 아예 그가 찾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없애는 게 나았다.
그래서 최대한 노엘이 만지지 않았던 머리 안쪽으로 마력석을 엮어 감추었다. 풍성하게 물결치는 머리카락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마력석도 귀환의 마력석을 포함해 이제 네 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쓸 수 있는 마력석은 총 세 개인 셈이었다.
마지막 마력석을 머리카락으로 엮어 넣으려던 중, 무슨 힘이 담겼을까 미리 알아보기 위해 다시 머리를 풀어내어 손에 쥐고 50퍼센트만 마력을 주입해 보았다.
<폭로 : 상대가 당신에게 언젠가 해야 할 말을 미리 무작위로 한 가지 폭로합니다.>
“오…? 무작위로 한 가지 폭로라니.”
굉장히 희한한 마력석이 나왔다. 당장 떠오른 건 당연히 노엘이었다. 지금 내게 그보다 미스터리인 건 없었으니까.
마침 너무 더워져서 빨리 욕실을 나가고 싶었으니, 이 마력석은 씻고 나가 바로 사용해 봐야겠다. 그래서 굳이 머리카락에 엮어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욕조를 박차고 나온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 앞에 차분히 앉았다.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어 자꾸만 물을 마시고 싶어졌지만 괜히 움직이다가 노엘이 깰까 봐 자제했다.
손안에 있는 새하얀 마력석에 조금씩 마력을 주입하다 잠시 멈추었다. 어쩐지 새까만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노엘의 머릿속을 엿보았다가 어떤 감정을 갖게 될지, 어떻게 돌변해 버릴지 몰라 급속히 심장이 옥죄여 오는 듯했다.
오로지 그를 믿는 수밖엔 없는 걸까. 그가 품고 있는 비밀이 부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의 것이라고.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째서일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손마저 떨려 오는 것 같아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내 호기심은 그칠 줄을 모르고,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야 말았다. 눈앞에 마력석의 문구가 잔잔한 황금빛을 내며 펼쳐졌다.
나는 노엘이 언젠가 내게 해야 할 말을 지금 당장 알려 줄 것을 마음속으로 청하며 마력을 꽉 채워 흘려보냈다.
<내가 모두를 속였어. 녀석들을 납치해 가둔 건 바로 나야. 그렇게 하면 네가 붉은 보석을 다 찾고도 돌아가지 않을 거라 예상했거든.>
마력석이 말해 준 건 저게 전부였지만, 저 문장만 보고도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알아들었으면서도 계속해서 눈을 깜박이며 몇 번을 확인했다.
‘내가…, 내가 지금 무얼 본 거지.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처음부터… 나를 속였다고?’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며 뜨겁게 끓어올랐다. 눈 안쪽마저 떨리는 느낌에 아찔해져선 가슴이 불안정하게 널뛰었다.
그대로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심장을 푹 찔러 오는 날카롭고 단단한 무언가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호흡이 점차 흐트러지며 들이켜는 숨에 비해 내쉬는 숨이 단축되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에 깔려 온몸이 뭉개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친구들을 잡아간 게 시드가 아니고 노엘이었다고? 충격과 공포로 얼룩진 눈앞이 캄캄하게 닫혀 오는 듯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보려 애쓸 때였다. 누워 있는 노엘을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텅 빈 침대만 남아 있었다.
두리번거릴 틈도 없었다.
뒤에서 기척 없이 바짝 다가온 입술이 내 귀에 대고 싸늘하게 속삭였다.
“들켜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