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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122화 (122/145)

122화.

그럼 그렇지. 이젠 내가 화를 내도 능구렁이처럼 빠져 있다가 다시 슬그머니 머리를 드러낼 뿐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진전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걸까.

“안 된다니까! 고지가 코앞인데 지금 여기서 또 지체할 수는 없어. 게다가 쉰 지도 얼마 안 됐다고.”

듣고 있는 건지 마는 건지. 노엘이 사각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상자의 끈을 풀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홀 케이크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나는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한 향기에 입술을 오므리며 고인 침을 삼켰다.

“또 그런 걸로 유혹하는 거야?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리 좋아한다고는 했지만 내가 무슨 케이크만 먹는 줄 알아.”

나는 애써 케이크에서 시선을 떼고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팔짱을 끼었다. 노엘은 문 앞을 가로막으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리사, 전엔 열심히도 붉은 보석 퀘스트를 깼잖아. 이번엔 내 퀘스트를 좀 받아 주지 않겠어?”

“네 퀘스트?”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디 들어나 보자며 케이크가 놓인 테이블 앞에 털썩 착석했다.

“응. 여기서 나와 케이크를 먹고 내일 나가는 거야.”

“퀘스트면 보상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

케이크를 먹고 같이 쉬자니. 말만 들어도 달달하고 평화로운 것이 내겐 이미 이득이었다. 문제는 내가 가진 현재의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단 것이고.

“무사히 클리어하고 나면 이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어.”

“뭐야…! 결국 강제로 날 막을 셈인 거야?”

“응, 나 이제 너한테 고집부릴 거야. 네가 떠나기 전에 이렇게 한 번이라도 더 같이 있을 시간을 만들 거라고.”

노엘이 조금 강압적인 태도로 나왔다. 이젠 퀘스트를 사칭해서 내 발목을 잡아 두려는 모양이지만, 아예 보내 줄 수 없다며 감금하는 것보다 낫긴 했다.

정말 그런 날이 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갑자기 심장이 묵직해져선 손가락 끝마디가 떨렸다.

“그래. 알겠는데…. 이러다가 늦어서 베키랑 리마랑… 애들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난 널 용서하지 못할 거야. 그건 알아 둬.”

“걱정하지 마. 그 녀석들이 안전한지 매드와 깁스가 몰래 주시하고 있으니까.”

“저, 정말이야?!”

“그렇대도.”

그 말에 순간 눈이 번쩍 크게 트였다. 매드와 깁스가 스파이 짓이라도 하는 중인 걸까? 그래서 의사인데도 연구복을 입고 있던 건가.

일단 저리 확신에 찬 노엘의 표정을 보니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다행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고 있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그랬다고 해도 어차피 돌아가겠다는 네 맘은 변하지 않을 거잖아.”

당연하지. 그래도 알려 줬더라면 좀 더 그를 믿을 수 있었을 텐데.

“됐어. 케이크나 어서 먹자.”

아까부터 달달한 생크림의 향이 솔솔 코로 흘러 들어오는 바람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노엘은 포크와 접시를 가져다주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그냥 음식이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안 먹고도 몇 주는 버틸 수 있도록 해 줄 거야. 그러니 조금이라도 꼭 먹어야 해. 시드를 만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그에 대한 대비라고 생각해 줘.”

“그런 의도였다면 뭐.”

“그런데 리사, 돌아가면 정말 행복한 거 맞아? 기억도 없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확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기억을 되찾아야지. 가족에 대한 기억이랑….”

“가족에 왜 그렇게 연연하는지 난 이해가 안 돼. 우리 부모님은 평소에도 냉철하더니 마지막까지 내 입에 독을 털어 넣었거든. 겨우 토해내고 살아남긴 했지만….”

무표정으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포로로 끌려가면 더한 고통을 겪어야 하니까 그러셨다고 들었어.”

“나를 진정으로 생각했다면 다 던져두고 필사적으로 도망쳤어야지. 결국 그 자리를 마지막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어떻게 그렇게 편한 방법으로 쉽게 생을 끊어낸 건지 아직도 모르겠고, 이젠 알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그저… 네가 더는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잔잔한 분노에 슬픔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져, 어느새 케이크에선 시선을 떼고 그의 어둠이 깔린 눈동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노엘은 천천히 걸어와 내 옆에 의자를 옮겨 앉았다. 이러니 가까워져선 그의 감정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았다.

“리사, 그냥 날 선택하면 안 돼? 불행할 수도 있는… 알 수 없는 기억 따윈 영영 되찾지 말고.”

“노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아. 너와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언제까지 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잖아.”

말을 내뱉고도 언젠가 노엘한테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났다. 사랑이 변한다는 사실이, 마음이 변한다는 사실이 이토록 두려운 적이 있었을까.

그저 가족을 핑계로 겁을 먹고 도망가려 하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감정에 내 모든 미래를 걸 수는 없었다. 이 마음만은 틀림없이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니 흔들릴 이유는 없다.

이곳은 내게 있어 꿈도 희망도 없는 공간에 불과했다.

노엘은 잠잠히 날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휙 돌리고는 적당히 식은 홍차를 컵에 따랐다.

“그래. 네게 나는… 모험할 가치까지는 없는 존재인가 보네.”

“…….”

마치 나에 대한 네 사랑은 겨우 거기까지였구나. 하는 듯한 말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들려왔다. 그 말을 듣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저릿한지.

나는 왠지 미안해하는 얼굴이 되어선 그를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들어 올렸다. 이어서 눈에 들어온 건 그의 온화한 눈빛이었다.

“괜찮아. 네 마음의 크기는 중요치 않아. 조금이라도 얻었단 사실만으로 나는 그동안 살아 숨 쉬는 게 행복했어. 지금도 그래.”

지금, 이 순간을 감당할 그릇이 내겐 부족해도 한참은 부족했다. 눈꺼풀과 입술이 부르르 떨려 오는데 주체가 되지 않아 곤란했다.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꾹 다물고 있자, 노엘이 먼저 요청해 왔다.

“리사, 조금이라도 내가 좋다면 좋아한다고 말해 줘. 지금 당장 듣고 싶어. 나 이 정도는… 욕심부려도 괜찮은 거지?”

내가 노엘을 좋아하는 정도는 그저 조금이 아니었다.

노엘에 대한 내 마음은 아주 컸다. 녀석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클 것이다. 하지만 영영 모르게 되겠지. 그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좋아해.”

삭막하게 굳어져 버린 그의 검은 심장에 조금이라도 안정제가 되었을까. 진통제가 되었을까.

이윽고 황홀히 웃는 그의 얼굴에 환한 빛이 잠시나마 비춘 듯했다. 사랑스러운 분홍빛 입술이 열리자 그의 목소리가 다정하고도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나도 사랑해. 리사, 네가 믿지 않아도 난 영원히 너만 사랑할 거야. 살아서도, 죽어서도 너만 사랑해.”

번뜩이며 반짝이는 싸늘한 핏빛 눈동자가 정말 그럴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고도 넘쳐흘렀다.

“영원히 널 쫓을 거야.”

노엘의 무서운 고백을 듣고 잠시 아찔해졌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헤어 나왔다.

앞부분까진 괜찮았는데 이 녀석은 말을 많이 할수록 위험했다. 롤러코스터를 태우는 것처럼 들었다 놨다 하는데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잘생긴 녀석은 옆에서 케이크를 자르려 시도했다. 의자도 딱 붙여선 내 옆에 작정하고 골반을 밀착한 채 찰싹 붙어 있었다.

“그냥 퍼 먹는 게 나을까?”

“그러자.”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케이크를 자르던 나이프를 내려놓는 그였다.

나는 곧장 포크를 집어 들고 케이크를 퍼 먹으려 했다. 그런데 노엘이 내 손안의 포크를 능수능란하게 빼앗아 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흘긋 쳐다보니 그가 무척 흥분한 얼굴을 하고 있어 당황스러움이 몰려들었다.

“뭐… 뭔데.”

또 왜 그러는 거야.

“직접 먹여 주고 싶은데….”

거참.

“그, 그럼 먹여 주면 되지. 괜히 긴장되게 분위기 잡고 그래.”

나는 툴툴대면서 불안정한 눈망울을 애써 가라앉혔다. 별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설레는 건지. 저 나긋나긋하고 감미로운 음성이 문제인 걸까.

“귀엽게 긴장하기는.”

벌써 귀가 달아오른 나는 어디 한번 잘 먹여 보라는 듯 눈을 치켜뜨고 그가 할 동작을 기다렸다.

하지만 노엘은 내 생각과는 반대로 포크를 차분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제 혀를 날름 내밀어 케이크의 생크림을 훑었다. 그의 혀 위로 올라간 하얗고 뽀얀 생크림을 보고 있자, 노엘은 내 턱을 양손으로 감싸 입을 벌리도록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입술을 벌렸고, 그대로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와 입 안 곳곳에 하얀 생크림을 묻히고 다녔다.

입 안에 가득한 생크림의 달콤한 맛은 오래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주인공은 바로 자기라는 듯 부드럽고 뜨거운 살갗이 차가운 생크림을 금세 매몰차게 녹여 버렸다.

생크림의 존재가 처참하게 지워졌을 때, 그는 제 입가에 허연 생크림이 묻은 것도 모른 채 나를 붙잡고 잔뜩 기대하는 눈을 반짝였다.

“맛있어?”

“……마, 맛없을 리가 없지. 딸기 케이크인데. 아무튼 이제는 내가 알아서 먹을게.”

머릿속이 온통 하얀 생크림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이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되어선 다시 포크를 집으려 했다.

그러자 노엘이 또 포크를 집지 못하도록 손을 대 만류했다.

“내가 다 먹여 줄게. 넌 그냥 받아먹기만 해. 그리고… 먹는 김에 나도 좀 같이 맛봐 봐. 케이크만 맛있게 먹지 말고.”

“뭐?”

“뭐, 계속 비교하며 맛보면 알게 되겠지. 내가 훨씬 더 맛있다는 걸.”

하다 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까지 질투하는 거였나.

당황해할 틈 따윈 주지 않겠다는 듯 이번엔 생크림과 함께 딸기를 베어 문 그가 고개를 매끄럽게 기울이며 다가왔다. 잔뜩 자만에 차오른, 저 교만한 표정의 얼굴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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