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나는 즉시 노엘의 들어 올린 양팔을 붙잡아 내렸다. 노엘은 눈을 크게 치켜뜨고선 의중을 떠보는 듯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
나 역시 그가 갑자기 일어난 것에 대한 궁금증으로 덩달아 일어났는데, 그가 비장한 눈빛으로 침대 근처로 가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발그레해진 뺨을 숙이며 조금 긴장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 침대에 누울까? 아무래도 바닥에서 그러긴 좀 불편하지? 여기서 전부 벗겨 줘.”
나는 심하게 흔들리는 안광을 붙잡고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당황해서 놓치고 있던 해결법이 떠올랐다.
“자, 잠깐만!”
“응…?”
“만진다고 했지, 벗으란 소린 아니었다고.”
“아… 그럼, 옷 위로…?”
“그만 말해!”
“아… 말도 하지 말아야 해? 알았어. 입 다물게.”
노엘은 풀어진 가슴팍의 끈을 다시 주섬주섬 묶으며 해가 없는 웃음으로 멋쩍음을 무마시키려 했다. 이내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선 나더러 안 오냐는 듯 고개를 빼꼼 들어 눈을 맞추었다.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하얀 이불을 녀석의 몸에 푹 덮어 주었다.
“리사…?”
별안간 이게 무슨 의미냐며 절망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는 녀석이었다.
“그만 자자. 나 피곤해. 넌 여기서 자. 난 저쪽 침대서 잘게.”
노엘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나는 옆에 있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지금 나 가지고 논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을 꼭 감고 자는 척했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냈더니 배가 아파 터질 지경이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걸 들킬까 봐 코 밑까지 이불을 더 끌어 올렸다. 조만간 그의 허망한 한숨이 방을 가득 메우더니 침대가 삐그덕거리도록 풀썩 눕는 소리가 들려왔다.
“완벽하게 날 농락했어. 내가 어디 가서 이렇게 쉽게 당할 놈이 아닌데.”
노엘의 투덜투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실소가 터져 나올 듯해 이불 속에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리사, 진짜 자는 거야? 벌써 잠들었어?”
그의 물음에도 꿋꿋이 자는 척했다. 아주 푹 잠든 듯이 숨소리마저 고르게 냈다. 그러니 노엘도 이내 포기했는지 굴을 파고 들어가는 듯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농락할 거면 좀 더 확실하게 날 가지고 놀아도 되는데…. 나는 네 손안에 꼭 잡혀 있는 느낌도 좋거든.”
잠잠한 어둠 속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들어와선 내 심장을 꽉 조여 사로잡았다.
“얼마나 황홀한지 모를 거야. 지금도 엄청나게 흥분해서 잠은 못 잘 거 같아. 그래도 넌 잘 잤으면 좋겠어. 잘 자.”
내가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내뱉는다는 기분에 등골이 오싹하면서도, 그의 질척거리는 고백에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야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생각해 보니 적과 동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로 떨어져서 자긴 하지만, 이렇게 한 방에 있는 이상 위험했다.
아까처럼 마력석을 들킬 위기는 그와 함께하는 이상 계속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마음이었다. 더는 커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에 대한 마음이 아직도 커지는 중이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커질수록 훗날 감당해야 하는 이별의 아픔도 커지겠지.
노엘과 기꺼이 서로를 속이는 게임을 해 보겠다고 결심했던 나였는데. 얼마나 되었다고 이렇게 흔들리는지 모르겠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데, 이렇게 서로 비밀을 감추고 숨겨야만 하는 건지. 애초에 나는 이런 걸 못 참는 성격인데 말이다.
끼익.
답도 없는 생각으로 잠을 못 이루던 찰나, 노엘이 갑자기 일어나 은밀하게 방을 나갔다.
‘이 시간에 어디 가는 거지?’
어쩐지 그의 뒤를 몰래 밟아야 할 것 같은 직감에 살금살금 뒤따라가 보기로 했다.
***
“매드, 나와 봐.”
노엘이 간 곳은 다름 아닌 내가 잡혀 있던 연구실이었다. 그 안에서 노엘의 부름을 받은 매드가 문을 열고 나오자, 그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문틈까지 몰래 접근한 나는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매드와 깁스, 노엘 이렇게 셋이 있었다. 토드가 없는 걸 보니 무사히 녀석들한테서 도망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매드와 깁스도 노엘과 아는 사이였어…?’
가슴속에서 천천히 뜨거운 안개가 번져 퍼져 나갔다.
“리사한테 주사를 놓았다고 들었어. 잠시 시간을 벌어 달란 말이 어떻게 주사를 놓아 달란 말로 들린 거지? 응?”
노엘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살벌하게 말했다. 그에 반해 매드는 여전히 광적인 얼굴로 즐겁다는 듯 낄낄거렸다.
“하도 영양가 없어 보여서 내가 개발한 영양 주사 좀 놔 줬어.”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를 대접하라고 내가 직접 언질까지 했을 텐데.”
“후. 도저히 그 단내 나는 덩어리를 대접할 수가 없었어. 내가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땐 무조건 주사를 놔야 하는 버릇이 있어서 말이지.”
“흐어어어.”
깁스가 옆에서 매드를 변호하듯 추임새를 넣었는데 졸린지 영혼은 없어 보였다. 노엘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사가 정말 무서웠을 거야. 그것도 모르고 리사를 네게 맡기다니.”
계속 엿듣고 있던 나는 아까부터 쿵쿵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럴 거였으면 진작 나한테 얘기하지…. 매드랑 깁스와 아는 사이라고 말해 줬으면 됐잖아!’
물론 그가 그럴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어떻게든 내 발목을 잡아서 돌아가는 때를 늦추는 걸 테니까.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럼 대체 친구들은 언제 해방해 주려고 그러는 거지? 지금 나 때문에 친구들을 구하는 게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가슴에서 시작된 뜨거움이 점점 머리 꼭대기로 치솟는 듯했다. 언제든 그가 날 속일 것이라 긴장하고는 있었지만, 이젠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뒤로 이것저것 검사해 봤는데 아주 건강했어. 그러니 마음 놓으라고! 엉덩이 주사는 못 놔서 아쉽지만 말이야.”
“흐어어어.”
노엘은 다짜고짜 매드의 멱살을 잡고 벽에 붙였다.
“절대 안 돼.”
“난 의사라고. 그 소명을 다할 뿐이야. 지금 무슨 해괴망측한 생각을 하는 거지?”
“아직 나도 못 본 걸 네놈이 먼저 보게 할 순 없어.”
“흐어어어….”
“그리고 놓더라도 네가 놓게 두진 않을 거야.”
“하여간 성질은….”
손을 부들부들 떨던 노엘은 매드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철퍼덕 내동댕이쳐진 매드는 그대로 드러누워서 음흉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역시 광인이 틀림없었다.
“후우. 널 믿은 내가 잘못이지.”
“노엘, 이왕 온 김에 너도 주사 맞고 가. 성질이 더러운 걸 보니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 보이는데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됐거든. 너나 잔뜩 맞아.”
“우릴 이곳에 영원히 가뒀으면 책임져야 할 거 아니야. 주사 맞고 가!”
에디와 매드, 깁스는 노엘이 마력석 반지를 쓸 당시에 다 살아 있었을 것이다. 노엘 때문에 이 별장에 갇히게 되었는데도 적대감이 없는 걸 보니 신기했다.
그렇다면 매드와 깁스는 노엘에게 전혀 악감정이 없는 걸까? 억울해서 없던 원한도 생길 것 같은데.
“그러게, 누가 시드 밑에서 일하래? 곱게 살려 놨더니 이젠 책임까지 지라네.”
“그런 끔찍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줄 난들 알았겠나. 아마 네가 아니었으면 영영 몰랐겠지.”
들어 보니 매드는 의사로 들어와 그 업무에만 충실했던 것 같다. 무슨 실험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대부분의 실험은 다른 동에서 행해졌으니 마음먹고 감춘다면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난 너한테 그날의 일로 사과할 생각 없어. 네 무지를 탓해.”
그때였다.
“흐어어!”
“악!”
눈이 딱 마주쳐 버린 깁스와 나는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마자 팔을 감은 붕대가 돌돌 풀려나 나를 속박할 것 같은 태세로 돌격해 왔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제 그가 무섭진 않아 비장하게 한마디 했다.
“너 또 붕대 던지면 확 찢어 버린다?!”
노엘도 놀라선 붕대를 다시 감으라는 듯 급히 턱짓을 했다. 깁스의 던져진 붕대가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리사, 어떻게 여길…….”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노엘은 큰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바짝 긴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이렇게 된 김에 다시 그와 갈라설 결심을 했다. 이쯤에서 한 번은 화를 내 줘야 할 것 같았다.
“노엘, 이렇게 날 또 속이다니. 너한테 정말 실망이야. 이제 더는… 너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아.”
“리사…? 잠시만. 리사!”
나는 그 말 한마디 던져 놓고는 얼른 연구실을 나와 빠르게 걸었다. 그 와중에 여전히 누워 있던 매드의 눈을 한 번 째려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노엘은 금세 나를 따라왔고, 나는 뒤에서 안으려는 그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며 벗어났다.
“널 더 이상 어떻게 믿으라고! 거짓말투성이잖아.”
힘껏 낸 나의 신경질에 그는 놀라다가도 급속히 차분해져선 나지막이 말했다.
“너도 나한테 숨기는 것쯤은 있을 거 아니야.”
그러면서 노엘은 내가 이전에 주었던 마력석 주머니를 꺼내 들어 보였다.
“이거, 마력석이 아주 많이 들어 있던 자국이 나 있어. 그 많은 걸 짧은 시간 내에 다 썼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랬다. 주머니 겉면에 올록볼록 튀어나온 자국이 조금만 자세히 살펴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나 있었다.
역시 나는 이렇게 속고 속이는 게임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마지막 귀환 마력석만큼은 절대로 숨겨야 했다.
능숙하지 못하다 해서 쉽게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능숙한 척이라도 시도해 봐야지.
“그래서 내가 준 마력석이 지금 거짓이라는 말을 하려는 거야?”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