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너 진짜….”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이 된 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건 그렇고 토드, 혹시 오다가 근처에서 노엘 못 봤어?”
내 다급한 물음에 정신이 든 토드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 녀석이 근처에 있었어? 녀석도 탈출한 거야?”
“노엘은 애초에 잡히지 않았어. 잔해 속에 숨어 있었대. 그러다 어쩌다 만나서 같이 왔는데 반대쪽을 살펴보기로 했었거든.”
“흠. 난 줄곧 직진만 해 와서 그 녀석이랑 마주치지 못했을지도….”
“그랬구나.”
큰일이었다. 나는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면 바로 마력석을 써서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토드는 꼼짝없이 죽고 말 것이다.
그럼 안 되는데.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토드와 함께 벗어나야만 했다.
“나 리사를 만났었어.”
“뭐?! 어, 어떻게?”
과거의 리사를 만났단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무척 평온해 보여 어쩐지 안심되었다.
“녀석이 남겨 놓은 마력석을 통해서…. 제대로 작별 인사도 했어. 난 그제야 녀석을 완전히 놓아줄 수 있었어.”
붉은 보석처럼 환영의 형태로 그에게 나타났던 걸까? 토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날 리가 없다곤 생각했지만, 막상 잘 인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다행이야….”
“너를 다시 만나면 꼭 사과하고 싶었어. 미안했어. 그땐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다시 만난 그는 확실히 좀 더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사이 많이 성숙해져 단단해진 느낌이 물씬 들었다.
밝고 쾌활했던 어릴 때의 모습으론 여전히 돌아가지 않았지만, 아마 진중해진 지금의 모습이 진짜 그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래도 성기사처럼 성스러운 미모는 여전했다.
“사과는 뭘…. 우리 둘 다 그땐 각자의 사정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잖아. 나도 널 속여서 미안했어.”
“……넌 그때도 그랬지만, 왠지 미워할 수 없게 만들어.”
토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슬며시 번진 입가의 미소가 꺼림칙한 이 연구실을 은혜롭게 비추었다.
적어도 토드가 나를 미워하진 않겠구나. 이제 내가 이 몸에 있는 걸 허락한 거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또 뻐근해져선 그때의 위기가 떠올라 코끝이 시큰거렸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눈물이 삐져나올지 모르는 분위기를 무마하려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젠 쇠망치는 들지 않는 거지?”
“…이젠 쇠망치든 철퇴든 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거야. 그 어떤 것도 널 해하지 못하게 할 거야.”
“어…? 그, 그리 말해 주니 나도 안심되네….”
안심은 되면서도 묘한 위화감이 같이 든다. 내가 너무 과민 반응 하는 건가.
잊고 있었는데 노엘 친구라 그런지 역시 방심을 놓을 수 없는 녀석이다.
혹시 아까 나를 뒤따른 이가 토드는 아니겠지? 흠……. 일단 토드의 발걸음 소리라고 보기에도 아주 가벼웠으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우릴 구하고 나면 돌아갈 생각이야?”
“아, 응…. 그래야지.”
“그건 너무 아쉬운데…. 그럼 노엘과도 얘기가 그렇게 된 거야? 친구로 남기로 한 건가.”
슬슬 자세가 힘겨워지는지 마치 붙잡힌 밧줄에 매달려 있듯 늘어지는 그였다.
“나도 그러자고 해 봤는데….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도 사귀는 관계는 유지하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직 연인 사이인 건 변함없어.”
“아…… 그래.”
어쩐지 묘한 표정을 짓는 그였다. 그러니까 괜히 껄끄러워진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하지…? 돌아간다면서 할 건 다 하고 있어.”
“이상하긴…. 그래도 노엘 녀석이 싫어진다면 차 버리고 언제든 나한테 와.”
나는 까무러치게 놀라 고개를 홱 들어 올리다 목이 꺾일 뻔했다.
“그, 그게 무슨! 노엘이 싫어질 리도 없지만 너한테 가면 뭐 어떡하려고.”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된다고 하잖아. 혼자가 된 내가 새로운 사랑을 찾는 건 당연해.”
“설마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야?”
갑자기 또 이게 웬 장르 분리 현상인지 모르겠다. 토드가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네겐 아직 그렇게까지 깊은 감정은 없어. 근데… 좀 그런 건 있어. 끌림이라 해야 하나.”
“…….”
이렇게 같이 붙잡혀 있는 것도 큰일인데 토드마저 나한테 끌린다니.
“이전 거미 굴에서 내가 껴 버렸을 때, 네가 날 버리고 갈 줄 알았어. 그땐 내가 널 위협했으니 날 버리고 갔다 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거야. 근데 넌 내 상상 이상으로 마음 씀씀이가 깊다는 걸 알게 되었어. 아직도 날 구해 주던 그때가 생생히 기억나.”
“……그렇지만 난 돌아갈 몸이야. 그러니까… 가볍게 끌리는 단계라면 얼른 의식해서라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가볍게 끌리는 단계라…. 혹시 내가 가벼워 보여…?”
“그런 말이 아니라…!”
“나… 지금 너한테 진지한 것 같지 않아?”
어느새 묵직하고도 강렬한 눈빛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위로 쭉 뻗어 묶여 있느라 핏줄이 도드라진 팔. 그 팔 한쪽에 기댄 촉촉한 은발의 머리카락과 가지런히 꿇고 있는 각이 아름다운 무릎선이 눈에 들어오니, 그의 모습이 갑자기 색다르게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내 망상이 섞여 들어가 불순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발가락을 쭉 뻗으며 애써 눈알을 굴려 혼미해지는 정신을 되돌려 놓았다.
“그, 그렇게 묶인 상태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또 와 버렸어. 난 이제 과거처럼 내 감정을 억누르지 않을 거야. 표현하고 싶은 건 무조건 바로바로 해 버릴 거라고.”
이들의 과거를 전부 알게 된 나로선 충분히 이해되는 발언이었다. 그래서 더는 그의 조곤조곤한 말에 마냥 얌전한 토를 달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핵심은 내가 돌아갈 거라는 거지!”
“돌아가기 전엔 여기 있을 거잖아? 그때까지만이라도 괜찮아.”
역시 만만치 않군.
생각이 금세 바뀌었다. 일단 노엘처럼 토드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질긴 그를 설득하다가 내 머리털이 다 빠져 나가게 생겼다.
그래, 상대에게 끌리는 것도 빠져 버리는 것도 다 자기들 마음이니까.
“후유. 내가 뭐라고… 하지만 난 노엘이 싫어지진 않을 것 같은데?”
“노엘을 100퍼센트 믿어?”
“응…?”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냥…. 그 녀석이 널 쉽게 보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래.”
“아…. 그건 나도 잘 알아. 지금도 항상 긴장하고 있는걸? 난 친구들을 구하는 것도 그렇지만 노엘과도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뭐? 그런데도 녀석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날아들었지만, 나조차도 이런 내가 의아할 뿐이었다.
“나는 노엘한테 이미 마음을 다 주었는걸. 그러니 네 마음은… 평생 받아 줄 수 없을지도 몰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주어진 기회가 사라지기 전, 그에게 내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토드가 두 번째 생에서도 애정 때문에 상처받는 건 원치 않았으니까.
내 말의 진심이 그에게 잘 전해졌을까?
“너한테 마음 달라고 한 적 없어. 그냥 네가 돌아갈 때까지 곁에 함께 있겠다고 전한 것뿐이야.”
“…….”
나는 할 만큼 다 했다는 생각이다. 그럼 된 거겠지.
뚜두둑!
그때였다. 무언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토드가 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윽!”
“토드?!”
토드를 묶어 놓았던 밧줄이 천장에 붙어 있던 접합부와 함께 떨어졌다. 지금 보니 밧줄을 지탱하던 천장의 고리가 아주 녹슬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모양이었다.
이런 행운이라니!
나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토드를 바라보았고, 토드 역시 무슨 상황인지 빠르게 깨달았다. 그는 당장 제 손에 묶인 밧줄을 풀어내려 침대 근처에 있던 메스를 잡아 쥐었다.
쓱쓱 메스에 밧줄이 갈려 나갔고, 마침내 끊어졌다. 토드는 신속히 나를 침대 결박에서 풀어 주었고, 간만에 몸을 일으킨 나는 토드를 따라 문으로 뛰었다.
“어서!”
문을 활짝 열어젖힌 토드는 나부터 내보내고는 뒤따라 나왔는데, 우리가 곧장 맞닥뜨린 건 바로 전방에서 태평하게 걸어오던 매드와 깁스였다.
“리사! 이리로!”
“흐어어어어어.”
우릴 발견한 깁스는 제 몸에 감긴 붕대를 스멀스멀 풀어 헤치기 시작했고, 나는 토드와 함께 반대편으로 죽어라 달렸다.
마침 여러 갈래의 길이 나왔는데, 토드는 나를 반대쪽으로 부드럽게 떠밀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면 거기서 꼭 만나자. 알았지? 어서 가!”
“알았어. 너도 조심해. 토드!”
토드는 매드와 깁스를 홀로 유인하며 멀찍이 멀어졌다.
반대편에 숨어 있던 나는 그들이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는 빠르게 달려 붙잡혀 있던 연구실을 지나쳤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꽤 깊숙이 들어왔을 때쯤에서야 조금 안심하고 속도를 늦췄다.
“헉헉…. 누워 있기만 하다가 갑자기 뛰었더니 죽을 것 같아.”
그래도 그동안 푹 쉬어서 그런지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무슨 주사를 맞힌 건진 아직도 모르겠지만 다행히 지금까진 몸에 별다른 이상 반응이 없었다.
그나저나 토드가 녀석들을 잘 따돌려야 할 텐데. 또 잡히면 어쩌나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끝도 없는 연구실들을 지나치던 중이었다.
뒤에서 또 소곤대는 것 같은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와 냉큼 돌아보았다. 분명 전에도 들었던 의문의 발소리였다.
“거기 누구야?”
괜히 졸아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외쳐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차라리 따돌리겠다고 작정하고는 앞으로 마구 달려갔다. 그 발걸음이 날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