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아니, 잠깐! 잠깐만, 이게 지금 무슨!”
나는 낯이 급격히 뜨거워져선 눈을 더욱 크게 치켜뜨고 물방울 안에 당장이라도 들어갈 것처럼 주시했다.
“노엘의 은밀한 사생활을 이렇게 보여 주면!”
나야 좋지만.
“어? 마력석아! 이래도 되는 거냐고!”
이런 위험한 물건 같으니라고. 자칫하면 의도치 않게 범죄를 저지르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마력석은 노엘의 넓은 등판만 비췄다.
어쩌다 몰래 훔쳐보게 되어 미안했지만, 하필 나와 만난 뒤 바로 그 일을 치러서 안타깝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 성난 것을 은밀하게 달래던 노엘은 매달린 실이 뚝 끊겨 나가듯 급작스럽게 멈추었다.
-큭!-
짧고 강렬한 신음과 함께 경직이 풀린 그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그러고는 베개에 박은 머리를 옆으로 돌려 옅은 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혼잣말이 아니었다. 지금 보니 노엘이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목소리로 들려주는 모양이었다.
-‘…키스만 해도 혼자 이렇게나 흥분해선……. 뭐 하는 건지. 하.’-
물방울의 초점이 무념무상으로 돌입한 노엘의 멍한 얼굴을 가까이서 비추었다. 그것도 잠시, 자신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점차 변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조차 내겐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닿고 싶어서 점점 참기가 힘든데.’-
저렇게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니.
상기되어 달아오른 그의 뺨이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뜨거워 보였다. 어딘가 촉촉해진 느낌까지 더해져선 혼자 몽환적인 분위기를 물씬 뿜어냈다.
덕분에 이런 희귀한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으니, 그가 곧장 길을 찾으러 가지 않은 건 용서해 줘야겠다.
-‘어떡할까……. 좀 더 닿아도 될까. 좀 더 노골적으로 방해해도 될까? 네가 돌아가지 못하도록 마구 방해하고 싶어.’-
“미치겠네.”
잘 나가다가 꼭 저런다니까. 귀신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소름이 돋아나 팔을 긁고 싶었지만 묶여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노엘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속마음을 끝으로, 쓰임을 다한 물방울은 푝 터지며 사라졌다. 이 이후로는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날 뒤따라온 건 노엘이 아니었다. 그 발걸음은 노엘과 헤어진 직후 금방 따라붙었으니 말이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나를 쫓고 있다니.
뒤따라온 녀석이 노엘이 아니라는 의문은 해결되었지만, 새로운 의문이 생겨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역시 제일 걸리는 건 노엘이었는데 저 마지막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노엘의 본능적이고도 낯선 뒷모습이 자꾸만 생각나선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눈은 음침하게 가늘어지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그만 생각하자, 좀.”
다른 쪽 골반에도 마력석이 하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건 지금 사용할 수 없었다. 바로 귀환의 마력석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속박된 채로 사용할 수 있는 마력석은 없어진 셈이었다. 다른 부위들에 몇 개가 있었는데 그건 정말 손이 자유로워야 닿을 수 있는 위치였다.
어떻게 해야 풀려날 수 있을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려던 찰나 문이 열렸다.
끼익.
“일어났네. 잘 잤어?”
매드와 깁스가 들어왔다. 변함없이 굽은 자세로 들어온 매드는 저 허리만 펴면 키가 엄청나게 클 것 같았다. 깁스는 허락된 관절의 범위 내에서 삐그덕거리며 매드의 뒤를 졸졸 따랐다.
“주사에 수면제라도 탔나 봐? 아주 푹 자서 개운할 지경이라고.”
대체 날 갖고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몰라 다시 긴장되었다.
“수면제라니…. 그런 건 넣지 않았어. 그런데도 그리 잘 잔 걸 보니 피로가 많이 쌓인 모양이야.”
입술을 활짝 벌리며 웃는 그의 치아가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자세히 보니 광기가 깃들어 있어서 그렇지, 얼굴은 꽤 호감형이었다.
“날 제발 풀어 줘. 매드 선생… 그거 뭐야? 또 뭐 하려고!”
매드는 침대 옆에 앉자마자 또 주사기를 들었는데, 주사기의 크기가 이전 것과 다르게 훨씬 컸다. 나는 그 소름 돋는 자태에 기함해선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피로를 풀었으니 혈액을 좀 채취하려는 것뿐이야.”
“내 혈액은 왜….”
“왜겠어? 혈액 검사를 하려는 거지.”
붉은 보석의 이야기 중 환영인 꼬마 녀석들이 혈액 검사를 받아 가며 실험에 임했던 장면이 번뜩 기억났다. 역시 이 녀석은 나를 실험에 쓰려는 게 분명해 보였다.
어느새 팔에 쑥 들어온 두꺼운 주삿바늘이 내 피를 사정없이 빨아들였다.
“악…!”
혈액을 적당량 채취한 매드는 긴 막대를 하나 들더니 내 얼굴로 들이밀며 말했다.
“입 벌려 봐.”
……?
다짜고짜 입 벌리라는 말에 나는 잔뜩 겁먹어선 입을 오히려 꾹 닫아 버렸다. 절대 안 열어 주리라 마음먹고는 어금니까지 앙다물었다.
“입 벌리라고. 아- 해 봐.”
“흐어어어어.”
옆에 조수로 서 있던 깁스가 답답했는지 양팔을 좌우로 삐걱거리며 벌려 보였다. 입을 벌리라고 제 나름대로 친절하게 알려 주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말씀 안 들을래? 자꾸 이러면 엉덩이 주사 맞힐 거야.”
나는 엉덩이 주사란 말에 넘어갈 듯한 숨을 크게 들이켜며 입을 벌렸다.
“아!”
불안으로 떨리는 제 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매드는 피에로 같은 입 모양으로 흡족하게 웃으며 얇은 막대를 내 입으로 넣어 혀를 지그시 눌렀다. 생각해 보니 병원에서 이런 식으로 검사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입 안을 살펴본 그는 내 치아 상태까지 꼼꼼히 검사하더니 별다른 것 없이 입을 다물게 했다.
“음… 치아 상태도 양호하고…….”
작은 수첩에 내 상태를 기록한 매드는 주머니에서 주사기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또 주사를 놓으려고? 아직 링거도 꼽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이 주사는 엉덩이에 놓아야 해.”
“저기요. 매드 선생….”
나는 격렬하게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나사 빠진 사람처럼 주사기를 양손에 쥐고는 흥분해선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엉덩이… 엉덩이에 주사… 흐….”
……?
변태냐고!
이런 미치광이 변태 의사한테 주사를 맞고 싶을 리가 없었다. 주사 자체도 싫은데 나한테 이런 시련은 너무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생각도 잠시. 내가 엉덩이에 주사를 맞으려면 뒤로 돌아야 했는데, 그러려면 속박된 몸을 풀어 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주사를 놓기 전에 도망치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매드와 깁스 둘 다 빠릿빠릿해 보이지도 않았으니 갑작스럽게 도망을 친다면 따돌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깁스의 붕대가 변수긴 했지만, 저 붕대가 풀려야 하는 시간이 있으니 역시 빠르게 달아나면 날 붙잡을 수 없을 것이란 계획이 반짝 떠올랐다.
그러던 중, 누군가 실험실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나와 매드, 그리고 깁스는 동시에 소리가 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보자마자 반가움과 놀라움, 안도감과 불안감이 모두 느껴졌다. 오래간만에 보는 찬란한 은발의 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리사…?”
“토드!”
토드가 어떻게 나타난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 있어선 안 되었다.
“얼른 도망쳐!”
내가 소리치자마자 매드와 깁스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저거 잡아!”
“흐어어어어어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주춤하던 토드는 금세 알아차리고는 뒤돌아 도망쳤다. 매드와 깁스는 예상보다도 무서운 속도로 그를 뒤쫓았다.
혼자 남겨져 열린 문틈으로 노엘을 불러 보려 했는데 상황은 금방 종료되었다.
토드가 그들에게 잡혀 끌려왔다. 온몸에 깁스의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토드조차 저렇게 금방 잡혀 온 걸 보니 내가 시행하려 했던 계획은 아마 물거품으로 돌려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뭐가 이렇게 빠른 건지. 내가 그들의 재빠름을 보지 못했나? 아니면 내가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건가.
“토드….”
“리사….”
깁스는 토드에게 감긴 자기 붕대를 풀며 그를 다른 곳에 옮겨다 묶어 놓았다. 천장에 연결돼 있던 밧줄에 토드의 양손을 묶어 놓고는 그를 꿇어앉혔다.
내가 대각선으로 고개를 들면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그 눈빛 뭐야. 왜 이렇게 애절해. 둘이 무슨 사이야? 특별한 관계?”
토드의 눈빛을 본 매드가 제 가슴을 움켜쥐며 산만하게 중얼거렸다. 토드는 그의 말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 듯 입술을 짓씹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흘겨보기만 했다.
“아무튼 반가워. 닥터 매드라고 불러 줄래?”
매드는 악수할 수 없는 토드의 묶인 손을 제 손가락 두 개로 집게처럼 잡고 두어 번 흔들어 댔다.
“닥터 매드라니. 나한텐 매드 선생님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으면서….”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는데, 생각이 입 밖으로 나간 줄은 몰랐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돼 버렸네. 깁스, 얼른 가자고.”
여전히 산만한 가운데 시계를 확인한 매드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깁스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
내 엉덩이 주사는 다행히 나중으로 미뤄진 것 같은데.
“토드! 어떻게 된 거야?”
토드도 나처럼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정말 다행히도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어쩐지 더 남자다워 보이기도 했고, 조금 수척해진 것 같기도 했다.
“너야말로…. 일단 나는 깨어나 보니 감옥 같은 곳에 갇혀 있었어.”
“역시 그랬구나. 다른 애들은 안 보였어?”
“응. 모두 분산된 건진 자세히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 갇혀 있었어. 그러다 겨우 감옥에서 탈출해서 떠돌아다녔지. 그렇게 여길 지나다 기척이 들어 문을 열어 본 거였어.”
“그런 거였구나. 다행이다. 감옥에서 탈출하다니… 대단해.”
“운이 좋았을 뿐이야. 감옥의 창살 중 몇 개가 부식되어 있는 걸 발견했거든. 부숴 버리려고 어깨를 얼마나 들이받았는지 몰라.”
그 말을 듣고 보니 토드의 어깨에 거뭇거뭇한 얼룩이 있는 것이 보였다.
“다들… 무사한 거겠지?”
“그럴 거야….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런 데에 붙잡혀 있어. 노엘 녀석이 네게 돌아가라고 하던 걸 그때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모두가 잡혀가기 직전, 그날 노엘과 내 대화를 토드도 들은 모양이었다.
“그 뒤로… 붉은 보석을 전부 찾았고, 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지만 바로 그렇게 가 버릴 수는 없었어.”
양팔이 들린 채로 묶여선 무릎 꿇고 있는 게 불편해 보였는데도 토드는 흐트러짐 없이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네가 이미 돌아간 줄 알았어.”
“너흴 그렇게 두고 나만 돌아갈 순 없었는걸.”
“우릴 구하려 남은 거라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는 놀라움과 동시에 조금 화난 것처럼 보였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 난 뭐 그러면 안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