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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113화 (113/145)

113화.

자신을 선생이라 칭하는 남자는 목소리조차 미치광이처럼 들려왔다.

어려 보이는 외모일 수도 있지만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연구원이었다.

“날 여기서 내보내 줘.”

“순순히 누울래? 아니면 내 조수의 도움을 받을래?”

얌전히 서 있는 저 붕대 감은 미라가 조수인 모양이었다.

지능이 있으면 노엘의 편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었는데, 연구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시드 쪽의 세력이 분명해졌다.

이런 데서 하필 연구원을 맞닥뜨리다니. 최대 위기였다. 지금 내게 하려는 일조차 안 봐도 뻔했다. 실험 대상으로 인식한 거겠지.

“난 노엘이 있는 곳을 알아.”

이 위급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잠깐 노엘을 팔기로 했다. 어차피 저들은 노엘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다행인지 짙은 회색 머리의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깊은 관심을 보이는 눈치였다.

“그래? 어디 있는데.”

“내가 알려 주면… 날 여기서 내보내 줄 거야?”

일단은 여길 나가야만 했다. 그래야 어디든 도망을 치지.

“노엘이 있는 곳을 알려 주는 대신 자신을 내보내 달라는 거구나? 크흥!”

눈과 입꼬리를 무섭게 쳐들며 활짝 웃는 모습이 아주 섬뜩했다.

“그, 그래! 날 내보내 주면 당장 말해 줄게. 하지만 내게 해를 가한다면 영원히 알지 못할걸?”

제발 그에게 내 허술한 면이 보이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눈도 부릅뜨고 기도 센 척했지만 부풀어 오른 허파에서 목소리가 덜덜 떨려 나오는 건 통제가 불가했다.

“깁스, 저 아가씨를 침대에 눕혀야겠어.”

붕대를 감은 파란 머리의 남자와 이름이 뭔가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설마 깁스가 그 깁스는 아니겠지, 하며 짧게 스쳐 간 생각에 마음을 놓던 것도 잠시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노엘을 찾고 싶지 않은가 보지?!”

깁스가 삐걱거리며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눈에 몹시 거슬렸다. 나는 쥐고 있던 톱을 깁스 쪽으로 내밀었다.

“흐어어어.”

“미안하지만 딱히 그 녀석을 찾는 데엔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그러면 왜 자꾸 날 눕히려는 건데!”

“나는 의사일 뿐이야.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것뿐 별다른 사심은 없어.”

“그러니까 날 눕히고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녀석은 안타깝게도 노엘보다 나한테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이런, 이런….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그저 네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렇다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거든? 난 아주 건강하다고! 그러니 얼른 저 깁슨지 거즌지 좀 그만 들러붙으라고 해.”

“흐어어어어어?”

자꾸만 가까이 오려고 접근하는 녀석 때문에 나도 시선이 분산돼서 정신이 없었다.

거기다 의사란 녀석까지 나한테 발을 슬금슬금 들이밀기 시작했는데, 꾸부정한 자세로 목을 길게 뻗은 모습에서 위화감마저 느껴졌다.

“이 돌팔이 같은 놈아! 내보내 달라고!”

“…돌팔이라니. 내가? 돌팔이라니! 내가 돌팔이라니이이이.”

의사가 갑자기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작했다. 나는 그의 화를 돋운 건가 싶어 절규하는 소리에 바짝 긴장했다.

어떻게 하면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까. 돌파할 방법이 있는 건가?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발작하던 의사는 생각보다 금세 멀쩡하게 돌아왔다. 그는 손가락 하나로 안경을 고쳐 올려 쓰고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였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난 돌팔이가 아니야. 매드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겠나?”

갑자기 진중해진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었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지만 선생님이라 부르고 싶진 않았다.

“매드, 난 건강해. 그러니 지금 당장 나를 보내 줘.”

“앵무새같이 하고 싶은 말만 반복하는 것이 저항력이 상당하군. 깁스? 장난 그만치고, 어서 붙잡아.”

깁스가 나한테 무슨 장난을 쳤다는 건지 의아해하던 찰나 난데없이 붕대가 내게 날아들었다.

“아?!”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붕대가 내가 들고 있던 톱을 감아 무참히 빼앗아 갔다. 깁스의 짓이었다.

그는 제 몸에 둘린 붕대를 자유자재로 풀었다 감았다 할 수 있었다. 힘도 엄청나서 내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 이게 뭐야!”

이윽고 다시 날아든 붕대가 내 팔과 다리를 돌돌 감더니 꽉 붙잡아 고정했다. 끌려가지 않으려 주저앉아 견뎠지만, 어차피 자유롭지 못한 몸인 건 마찬가지였다.

매드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붙잡힌 나를 들어 기어코 침대에 눕혔다.

나는 눕자마자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침대에 꼼짝없이 속박된 뒤였다. 손목과 발목이 침대에 달린 끈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사, 살려 줘! 이봐. 매드 선생! 아니, 매드 선생님! 이런 미친놈아!”

잔뜩 겁먹어선 횡설수설했지만, 그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방금 막 잡아들인 먹잇감을 순순히 풀어 주는 미치광이가 어디 있겠나.

잘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살기 위한 본능이 변수에 기대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럼 의사가 사람을 살리지. 죽이기라도 할까 봐?”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내 팔 한쪽에 알코올 솜을 문지르고 있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감촉에 등골이 오싹해져선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뭐야. 뭐 하려는 건데!”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최대한 쳐들었다. 너머에 주사기가 보여 설마 아닐 거라며 선득이는 가슴을 달랬지만, 매드의 손은 주사기를 들더니 탁탁 쳐 안의 공기를 빼냈다.

“겁먹지 마. 힘 빼라고. 흐…. 흐흐.”

“안 돼!”

소름 돋게 하는 하얀 치아가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가지런히 튀어나왔다.

내 팔로 들어오는 긴 주삿바늘을 보자마자 무어라 소리 지를 틈도 없이 거센 졸음이 몰려들며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

***

눈을 뜨니 나 홀로 아까 그 연구실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여전히 속박된 채로.

뭔가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개운한 기분이었지만 보이는 풍경은 개운할 리가 전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안 깨어나는 게 나았겠다 싶은 정도다.

얼마나 잔 걸까…. 노엘이 지금쯤이라면 내가 없어진 걸 알게 되지 않으려나?

고개를 돌려 보니 링거를 한창 맞는 중이었다. 노란색 액체가 반 정도 차 있었는데 내게 링거를 맞춘 지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대체 무슨 주사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나마 액체의 색깔이 파란색이라든가 검은색이 아니어서 그런지 위화감은 덜했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문을 바라보니 안쪽에선 잠겨 있지 않았다. 겨우 고개를 꺾어 깁스가 나왔던 관도 확인해 봤는데 관 문도 열린 채 비어 있었다.

“노엘! 나 여기 있어! 노엘!”

우렁차게 소리를 질러 봤다. 방음이 잘되어 있다는 건 확인한 이후였지만 조금이라도 들리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몇 번을 지르고 난 뒤에도 노엘은 오지 않았다.

조금 지친 나는 차분히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손을 어떻게든 풀어 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여 봤지만 역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마력석을 사용해 볼까?

골반 쪽에 숨겨 두었던 마력석들을 떠올렸다. 마력석에 마력을 주입하려면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일단 손에 닿아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 최대한 골반을 손이 있는 쪽으로 비틀어 당기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손이 멀리 떨어져 있진 않아 간신히 닿을 수 있었다.

골반 쪽에 숨겨 놓았던 마력석에 마력을 주입하자 곧 문구가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은 상대가 한 비밀스러운 일을 알고 있다.>

생각해 보니 가장 최근에 주입해 봤던 마력석이었다. 그땐 필요 없다고 사용하지 않았었지.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해.”

투덜거리자마자 놀랍게도 부연 설명이 눈앞에 주룩 늘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최근에 만났던 상대가 당신과 헤어진 후 바로 한 비밀스러운 일을 보여 드립니다. 원하는 상대 지목 가능. 단,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라면 나오지 않을 수 있음.>

막상 설명을 보고 생각해 보니 문득 궁금한 일이 생겼다.

내 뒤를 쫓던 다른 발걸음의 정체를 알 수 없던 터였다. 지난번엔 노엘이었는데 이번엔 소리가 달랐다고는 하나, 혹시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이었다.

이렇게 또 노엘을 의심하고 만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어쩌면 노엘의 함정에 빠진 결과 아닐까.

하지만 매드와 깁스는 분명 연구원 쪽 세력으로 보였는데. 정말 아주 만약에라도 변수나 예외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나를 길게 붙잡아 둘수록 좋아할 사람은 노엘이었으니 그를 짚고 넘어갈 필요는 충분히 있었다.

노엘이 만약 내 뒤를 밟고 있다면, 이 마력석으로 그가 날 뒤쫓은 게 맞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알아야겠어. 노엘이 나와 헤어진 뒤 곧장 무얼 했는지 보여 줘.”

나는 마력석에 남은 50퍼센트의 마력을 꽉 채워 보냈다. 그러자 눈앞에 내 머리보다 큰 물방울이 떠올랐다.

그 물방울 안에서 영상 같은 것이 재생되었는데 보자마자 얼굴이 급격히 붉어지고 말았다.

4층으로 이어지는 방에서 나와 노엘이 키스하던 때가 나온 것이었다. 그 당시엔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영상으로는 꽤 밝게 보여 그 실루엣이 어쩐지 몹시 자극적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낯설어 보이지? 내가 이랬다고? 그건 그렇고 노엘… 이때 완전 박력 있었네.”

중얼거리며 혼자 빠져들어선 몰래 훔쳐보는 관람객처럼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엘을 의심하다가도 나를 대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 바로 방심하게 되고 만다.

결국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잡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간신히 부여잡은 이성으로 노엘의 날렵한 턱선을 감상하며 눈을 부릅떴다.

키스를 마치고 방을 나와서 노엘과 헤어지는 지점까지 이어졌는데, 이제 이 이후부터가 진짜 중요한 부분이었다.

“뭐지? 같이 길을 찾기로 해 놓고선!”

내가 멀어지는 모습을 뒤에서 뚫어져라 바라보던 노엘은 길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대신 곧장 방으로 다시 빠르게 되돌아갔다. 뭔가 놓고 온 거라도 있나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여기서부턴 그의 앞모습은 볼 수 없었는데 살짝 뒤에서 바라보는 듯한 각도였다.

급박하게 들어선 노엘이 갑자기 침대 옆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베개를 끌어당겨 얼굴을 묻었다. 이어서 제 바지 앞섶을 급하게 푸는가 싶더니 움츠린 몸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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