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일단 지금은 곁에 노엘이 없으니 마력석을 사용해도 되었다.
그래서 몸에 지니던 마력석에 냉큼 마력을 반만 주입해 보았다. 이럴 때 초승달 검처럼 공격형 마력석이 나와 준다면 참 고마울 텐데….
<당신은 상대가 한 비밀스러운 일을 알고 있다.>
“이름이 뭐가 이렇게 길지? 일단 지금은 쓸모없겠는데.”
세부 사항이 궁금하긴 했지만 당장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다시 넣어 두었다.
다른 마력석을 또 꺼내 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뒤쪽에서 아주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는데 사실 발소리인지 확실한 것도 아니었다. 가벼운 무언가가 질질 끌면서 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괜히 뒤에서 소리가 들리니 위화감이 들어 떠밀리듯 앞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다행히 전방엔 아무것도 없었다.
한층 더 서늘해진 기운 때문인지 한번 내디딘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막다른 길이 나와 다시 옆으로 빠지려던 순간이었다. 지나가려던 연구실의 문이 눈앞에서 덜컥 열렸다.
……!
심장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굳어 버렸지만 금방 아무도 없단 걸 깨닫고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문이 왜 저절로 열리는 거지?
알고 보니 앞으로 다가가기만 해도 자동으로 열리는 문이었다. 움직임을 감지하는 장치라도 달린 걸까.
파란빛이 이렇게 불길한 색감이었나, 싶을 정도로 급격히 침울해져선 빨리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노엘이 있는 쪽으로 뛰어가고 싶은데. 그럼 시간만 더 지연되겠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다시 용기를 내어 힘차게 나아갔다. 가다 보니 연구실들의 벽이 온통 금속 재질로 뒤덮여 있었다.
얼룩지고 녹슨 벽들을 바라보니 어쩐지 좀 더 스산한 기운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그려진 해골 그림이 위험성을 경고했다.
어차피 저 안을 살펴볼 필요는 없으니 다행이었다. 주눅이 들어 잔뜩 얼굴을 찡그린 나는 괜히 추워져서 양팔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푸쉭- 끼이이익.
그때였다. 조금 더 떨어진 전방의 연구실 문이 또 자동으로 열리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저 문 주위엔 아무도 없는데.
그렇다면 안쪽에 누가 있기라도 한 걸까? 일단 걸음을 멈추고 누가 나오나 집중했다.
…….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 정도 거리에서 움직임을 감지하는 문이라도 되는 걸까?
잠시 멈추어 있으니 또다시 뒤쪽에서 애매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저 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오는 듯했다.
슬금슬금 몰래 접근하는 것 같은 스산한 소리.
앞이 무섭냐 뒤가 무섭냐 물어본다면 둘 다 무서운데, 일단 앞에는 뭐가 없는 것 같으니 직진해 보기로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언가가 나를 몰아넣는 기분이 들었다. 날 어디론가 유인하는 것 같아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선택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더욱 불쾌한 상황이었다. 저 뒤에서 오는 것이나 좀 어떻게 떼어낼 순 없으려나?
어느새 저절로 열린 문의 연구실까지 와 있었다. 다른 길이 없어 이 연구실 앞을 지나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지나가는 김에 안을 쓱 들여다보았는데, 바퀴 달린 간이침대가 저 끝에 놓여 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톱들이 벽에 걸려 있었고 침대 옆엔 주사기와 그 외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료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웬 진료실에 무수히 많은 톱이 걸려 있는 괴상한 풍경이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고 이상하다.
침대에 속박해 두는 검은 끈이 달린 걸 보고는 등골이 오싹해 얼른 눈을 돌려 지나가려 했다.
그렇게 하려 했는데 앞에서 검은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걸어오는 것이 마치 사람 발소리 같은데 노엘의 평소 걸음걸이보단 빨랐다. 빠르고 아주 산만한 느낌. 그 박자조차 일정하지 않은 것이 종잡을 수 없는 발걸음이었다.
뒤로 곧장 돌아가려 하니 뒤에서도 기묘한 소리가 거리를 좁혀 왔다.
‘하… 안 되겠다.’
나는 그대로 문이 열린 연구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짝이 정말 육중해서 온 힘을 실어야 겨우 닫혔는데, 닫고 나니 잠금장치도 거대했다.
그 거대한 문빗장을 간신히 옆으로 옮겼다. 이제 밖에서도 확실하게 문을 열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어떡하냐는 것인데. 일단 저 종잡을 수 없는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음… 뭐지?’
그런데 밖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연구실의 벽과 문이 무척 두꺼운 걸로 보아… 방음이 완벽한 모양이었다.
그 말은 내가 이 안에선 비명을 질러도 노엘이 듣지 못할 것이란 뜻이었다. 대체 무엇이 날 이렇게 몰아넣고 있는 건지 몰라 기가 찼다.
나는 일단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나머지 마력석을 몸 곳곳에 하나씩 분산시켜서 숨겨 두었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는데.
그러던 중, 저 안쪽에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 옆쪽에 있었는데 밖에서 봤을 땐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관이 왜 이런 데에 있는 건데……. 괜히 무섭게.’
무시무시한 톱들이 걸려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끔찍했다. 그런데 저렇게 관까지 떡하니 서 있으면 안에 무언가가 있을 것 같잖아.
관에 쇠사슬이 둘려 있긴 했지만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아 저 관이 단단히 묶여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가까이 다가가다 수북이 쌓여 있는 웬 뼈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톱으로 자른 듯한 형태의 뼛조각과 가루였다.
“흐극….”
간신히 눈을 돌려 관의 쇠사슬을 점검하는데 역시나 대충 둘려 있었다. 허술해도 이렇게 허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건 그냥 마음만 먹으면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관을 열고 나오게 생겼다.
그런 무서운 상상을 하는 순간이었다.
퉁!
관 안에서 무언가가 뭉툭한 소리를 내며 뚜껑을 쳤다.
퉁! 철그렁.
한 번 더 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대충 둘러 있던 쇠사슬이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어…?! 악….”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멀찍이 물러났다. 쇠사슬을 고쳐 묶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관 문이 활짝 열리자 그 안에 있는 물체가 정체를 드러냈다.
전신에 하얀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관절 부분에만 붕대가 없어 움직이려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어 보였다.
얼굴에도 붕대를 두르고 있었는데, 머리 꼭대기까지 칭칭 둘러맸지만 눈 한쪽과 코, 입 쪽엔 감겨 있지 않았으며, 파란색 머리카락이 잡초처럼 붕대 사이사이로 삐져나왔다.
성별이 남자로 보이는 그것이 유일한 한쪽 눈을 뜨니 노란 눈빛이 맹하게 번뜩였다.
지능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또 노엘의 지인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내 예상이 맞을 수도 있단 생각에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붕대를 감은 남자는 곧 삐그덕거리며 관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흐어어어…….”
그가 처음 한 말이 저랬다. 마치 공기와 산소가 반씩 섞여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말을… 할 수 있나요?”
왠지 정중해져선 손을 모으고 그를 대했다.
“흐어어…….”
그의 눈이 정확히 날 응시하고 있었는데 눈을 거의 깜박이지 않아 내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릴 것 같았다.
삐그덕 삐그덕.
저 정도면 관절에 기름칠이라도 해 주어야 할 듯싶었다. 각진 자세를 유지하며 조금씩 움직여 보더니 이내 좀 적응되었는지 나한테 접근하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세요! 거기서 얘기해.”
아무래도 정체가 불분명한 상대를 가까이 두어선 안 되었기에 똑 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
“흐어어어……?”
이쯤 되니 지능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노엘과는 관련이 없을뿐더러 적일 가능성도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당장 근처 벽에 걸려 있던 기다란 톱을 양손에 쥐어 들었다.
“가까이 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붕대 녀석은 알아들은 건지 만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멈추었다.
“흐어…….”
그래서 나도 잠시 호흡을 고르려는데 녀석이 다시 움직여 왔다. 삐그덕 삐그덕 괴기스러운 자세로 몸을 마구 꼬고 비틀었다.
“으악!”
점점 빨라지는 움직임으로 달려들자 나는 녀석을 피해 문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그냥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그 선택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흐어어어어어…!”
팔을 앞으로 쭉 뻗고서 날 덮치려 했던 녀석은 나를 휙 돌아보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분명 다시 내 쪽으로 달려들 거라 생각해선 톱을 검처럼 고쳐 잡았는데 녀석은 갑자기 문으로 냅다 달려갔다.
“설마!”
녀석이 잠금장치를 손쉽게 풀더니 단숨에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야이! 안 돼!”
이미 난 문과 멀찍이 떨어져 있어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열린 문에서 안타깝게도 누군가가 들어왔다. 아까의 그 종잡을 수 없는 불규칙한 발소리였다.
그 발걸음은 들어오자마자 나를 발견하고선 문을 거칠게 닫고 잠가 버렸다.
짙은 회색의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져 있는 게 보였다. 안경을 낀 그는 흰색의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연구원 환영들이 입고 있던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그는 연구원인 걸까? 묘하게 동작 하나하나가 쓸데없이 요염해 보여 거슬렸다.
어찌할 줄 몰라서 입도 뻥긋 못 하고 있는데 그의 안경이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날카롭게 번쩍였다. 안경 위로 번개라도 내려치는 줄 알았다.
“안녕, 일단 거기 있는 침대에 좀 누워 볼까?”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누워 보라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려는 걸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미친 자의 광기가 느껴져 굳은 몸이 정신을 못 차렸다.
눈동자를 조금만 아래로 내려도 금방 사백안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저런 부류의 사람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하늘색의 위생 장갑을 손에 당겨 끼며 중얼거렸다. 신나서 날뛸 것 같은 눈빛이 나를 샅샅이 훑으며 주시했다.
“어서 눕지 않고 뭐 해? 어디 한번 보자고. 선생님이 세심하게 봐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