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결국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줄곧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키스하러 왔어.’
자꾸만 그 말이 떠올라 대화에 집중하다가도 다른 곳으로 빠지곤 했다.
그래서 대체 키스는 언제 할 셈이지? 왜 키스는 안 하고 저주를 퍼붓고 있는 건데.
게다가 그 저주에서조차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 설레는 저주를 말하며 검붉은 장미를 건네면 더 키스하고 싶어지잖아.
“리사…. 이제 내 눈치는 보지 않기로 한 거야?”
꽤 놀랐는지 노엘은 눈을 크게 치켜떴는데 은근히 기뻐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내 목적을 분명히 전달했어. 애들을 구하고 나면 돌아갈 거라고. 그런데도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잖아.”
나를 못 돌아가게 하려고 방해 중이잖아. 지금은 내 귀환 마력석을 노리고 있겠지. 아무리 돌아간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
“그러니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래.”
“……그래, 잘 생각했어. 나도 네가 그러길 원했거든.”
낮은 목소리로 작게 대답한 노엘은 뺨을 붉게 물들이며 좋다는 듯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엘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왠지 그런 모습을 보면 내가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에 걸렸다.
설마 내가 눈치 보지 않게 하려고 노엘이 그린 큰 그림은 아닐지. 별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건 너무 나간 것이라 스스로 다독였다.
노엘을 상대로 계속 심리 싸움을 하는 건 버거울 것이다. 친구들을 구하러 가기도 바쁜데 에디 같은 조력자를 불러와 나를 더 지연시키고 있는 셈이라니.
그래서 나는 빠른 목적 달성을 위해 그를 한 번 더 속여야 했다.
“노엘, 이거 네가 좀 맡아 줄래? 친구들을 구하고 나면 돌려줘.”
마력석 주머니를 그에게 내밀었다. 주머니 안에는 정체 모를 마력석만 하나 남겨 두고, 귀환 마력석과 다른 마력석들은 따로 빼두어 내가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 마력 구슬들은 과거 리사가 자신만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노엘이 마력석이 무슨 기능을 하는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이걸 나중에 돌려줄 거라고 믿는 거야?”
노엘은 마력석 주머니를 받아서 들면서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응, 믿어. 전에 갖고 있던 열쇠 목걸이를 잃고 나니까… 아무래도 너한테 맡기는 게 안전할 것 같더라고. 그건 절대 잃어버려선 안 돼. 알았지?”
노엘이 돌려줄 리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돌려받을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진짜인 듯 모든 힘을 다해 연기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맡아 둘게. 하지만 나라고 안 잃어버린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닌데… 정말 괜찮겠어?”
“네가 잃어버릴 정도면 나는 한참 전에 잃어버렸을 테니까. 역시 네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나중에 후회하면 안 된다?”
“응. 알았어.”
이걸로 노엘의 불안은 없앨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부턴 에디 같은 존재는 만나지 않아도 되는 거겠지?
친구들을 구하러 빠르게 10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그럼 나도 4층부턴 너와 동행할게.”
“동행… 한다고?”
“이제부턴 나도 녀석들을 구하는 데 속력을 좀 내보려고. 계속 혼자 숨어 다니는 것도 이젠 한계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기쁨의 비명을 내질렀다. 뭔가 쉽게 따돌린 듯해 찝찝했지만, 노엘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게 분명했다.
매번 힘주고 있던 눈매조차 편히 풀어져선 조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동안 내가 당장이라도 떠나 버릴까 봐 긴장하고 있었을 녀석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약해지려 한다.
“함께라니 나도 조금은 덜 무서울 것 같아. 드디어 같이 구하러 갈 수 있다니 너무 좋아!”
이제야 노엘과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움직일 수 있다. 여전히 서로를 속인 상태이긴 하지만.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10층에 녀석들이 갇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나도 에디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냥 모르는 척했다.
“그렇구나! 그럼 어서 10층으로 가자.”
빨리 목표를 이룰 생각에 흥분해선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문손잡이를 쥐고 곧장 나가려 했다.
그랬는데 노엘이 뒤에서 점잖은 음성으로 나를 멈추게 했다.
“그런데 리사, 뭐 잊은 거 없어?”
“응? 잊은 거라니….”
노엘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이내 도발적인 눈빛으로 변해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읊조렸다.
“키스.”
“키스…….”
아, 그새 잊고 있던 걸 막 기억한 참이었다.
“먼저 그렇게 불을 질러 놓고선… 수습은 하지 않는 거야?”
“…….”
가슴이 또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내 머리 위에 있던 빛의 마력석이 효력이 다 되어 가는지 꺼질락 말락 깜박이며 옅게 반짝였다.
“리사. 지금 나랑… 키스하고 싶어?”
저 깊은 곳까지 간지럽게 하는 그의 안달 난 목소리가 낯설었다.
“아니…. 언제는 물어보지도 않고 하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질문하는 건데.”
그의 묻는 음성이 낯설고, 어색해서인지. 불빛이 꺼질까 봐 깜박이는 것이 두려워진 건지.
나를 불안케 하는 모든 것에 어깨가 움츠러들고 있었다. 아마 심장이 비비 꼬이다 못해 쪼그라든 게 틀림없었다.
“대답해 줘. 키스하고 싶어?”
살짝 고개를 드는 그의 붉은 눈빛이 오늘따라 더욱 신비롭게 형형했다.
‘키스’란 단어가 들려올 때마다 심장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냥 내가 먼저 다가가서 해 버릴까. 저 요망한 입을 어떻게 막아 버릴까. 싶었던 순간, 노엘의 얼굴에서 어떤 의도를 읽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긍정의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내 대답을 애타게 기다릴 리 없지 않은가. 이미 내 대답은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자꾸 이런 식으로 다가오면 곤란한데…. 귀엽고 가여워서 보듬어 주고 싶어지잖아.
몇 번을 속아 넘어갔는데도 밉지 않은 녀석은 처음이다.
“노엘. 하고 싶어. 지금 나한테 키스해.”
떨리는 입술과 살짝 간드러진 목소리, 부끄러운 눈빛과 수줍게 달아오른 뺨. 이 모든 것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진심이 전해졌을까.
순간 울컥했는지 눈꼬리를 길게 뻗친 그가 이윽고 황홀한 미소를 띠게 되었을 땐, 앉아 있던 의자도 뒤로 세차게 쓰러졌다.
깜박거리는 마력석의 빛과 함께, 제 목을 꽉 쥐고 있던 셔츠의 끈을 풀어 헤치며 살금살금 다가오는 그에게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빛이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어둠 속에서 그가 두 발자국 거리를 좁혀 왔다.
나는 그보다도 먼저 들이닥치는 뜨거운 공기에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
그렇게 해야 그가 맹렬한 기세로 들어와도 뒤로 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밀려드는 몸짓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다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격하게 달려든 부드러운 입술이 겹치며 그의 손이 허리와 목덜미로 순식간에 감겨들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깜박거리던 빛이 장대비를 맞은 촛불처럼 훅 꺼졌다.
***
‘혹시 키스로 영혼을 빨아들인다거나 그런 무서운 능력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매번 색다른 입맞춤에 점점 타락해 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멍하니 노엘이 옷매무새를 고치는 걸 바라보았다. 입고 있는 옷이 단추가 아닌 끈으로 고정하는 셔츠여서 그런지 조금만 끈을 풀어내도 앞섶이 휑하게 벌어졌다.
목이 갑갑해서 풀어 헤쳤던 것 같은데 더 큰 혜택을 누린 건 아무래도 나인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이대로라면 스킨십도 점점 발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또 이상한 쪽으로 빠지려 하잖아.’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냉큼 문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노엘도 한결 정갈해진 얼굴로 바짝 뒤따라 붙었다.
끼익.
문을 여니 올라가는 계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며 화학 약품 냄새 같은 것이 코로 확 흘러들어 와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길 오르면 4층이다. 이거지?”
“응. 이제부턴 4층이야.”
계단을 넘으니 수많은 유리 벽이 광활하게도 펼쳐져 있었다. 4층도 감옥들이 아래층처럼 규모가 큰 모양이다.
“와… 이게 다 뭐야?”
한층 더 짙어진 화학 물질 냄새에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자세히 보니 유리 벽들은 각각 하나의 방들로 이루어져 실험실이나 연구실로 쓰였던 것 같다.
“여긴 연구원들이 있던 곳이야. 저쪽 동의 연구원들과는 다른 연구를 했던 것 같아.”
“다른 연구?”
“응.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빛을 내는 마력석이 효력을 다해 걱정했는데, 다행히 4층엔 은은한 빛이 있었다. 파란색의 빛이었는데 전반적으론 어두웠지만, 물체를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노엘과 함께하게 되었으니 이젠 마력석도 꺼내 쓸 수 없게 되었다. 내게 더는 마력석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대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바둑판 같은 구조였다. 바둑판 위에 바둑돌 대신 연구실이 하나하나 서 있는 듯했다.
“그럼 잠시 갈라져서 길을 찾아볼까?”
노엘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친구들을 구하러 가는 데에 의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나도 그와 떨어지긴 싫었지만 빨리 10층으로 올라가야 했으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여긴 소리가 잘 울려. 그러니 무슨 일 생기면 반드시 소리 지르도록 해. 그럼 내가 바로 갈 테니까.”
그 말만 들어도 아주 든든했다.
“응! 너도 위급하게 되면 날 불러. 내가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나도 질세라 그에게 든든한 말을 골라서 했다. 그러니 그가 상큼하게 피식 웃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린 나뉘어서 올라가는 길을 찾게 되었다.
오른쪽으로 들어간 나는 일단은 무조건 직진했다. 직진하다가 막힐 때만 옆으로 빠지곤 했는데 이번에도 딱 막힌 참이었다.
그래서 옆으로 빠지려고 들어갔는데 무언가가 앞을 빠르게 쓱 지나갔다.
‘어… 방금 뭐지?’
노엘이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사람의 인영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순간 위화감이 들어 발을 앞으로 내딛기가 꺼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