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에디에게서 열쇠 목걸이를 받아 든 노엘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고했어. 에디.”
“수고는 무슨. 중간에 날 도와준 거 다 알아.”
“……알고 있었구나.”
“근데 굳이 나한테 부탁한 이유가 뭐야? 직접 빼앗는 게 더 빠르고 쉬웠을 텐데….”
“…알아. 비겁한 짓이라는 거. 하지만 리사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에디는 갑자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아, 뭐야! 그럼 나는 누나한테 미움받아도 괜찮다, 이거야?!”
리사에게 미움받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에디는 양손으로 볼을 감싸며 심각한 얼굴이 되어 경악했다.
“리사는 널 미워하지 않을 거야. 어린아이한테는 관대하거든. 리마한테도 아주 관대했어.”
“……그럼 다행이지만…. 근데 언젠가 누나한테 발각되면 어쩌려고?”
“절대 안 되지.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돼.”
끔찍한 상상이라도 했는지 노엘은 손가락을 제 입가에 가져다 대며 초조해했다. 그런 모습을 처음 접한 에디는 신기하다는 듯 그를 빤히 응시했다.
“어른들은 참 이상해. 서로 좋아한다면서 왜 모든 일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 거야?”
피식 웃은 노엘은 에디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헝클어뜨렸다.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되겠지.”
“칫….”
“에디, 혹시 리사가 열쇠 목걸이를 돌려 달라 하진 않았어?”
에디의 키에 맞추려 쪼그려 앉은 노엘은 한쪽 팔에 턱을 괴었다.
“아! 맞아. 그러고 보니, 누난 열쇠 목걸이를 돌려 달라 하지도 않았어.”
리사는 분명 반드시 돌려받을 거라고 했었다. 그게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이상하네. 목걸이를 포기할 리가 없는데…….”
“누나도 이제 돌아가기 싫어진 게 아닐까? 돌아가길 포기했나 봐!”
그러길 줄곧 바라 왔지만, 노엘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께름칙한 직감이 날아들었다.
“수상해. 리사가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어.”
“그걸 어떻게 알아?”
“아무래도 리사가 돌아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은 것 같아.”
속이 답답해진 에디는 엄한 바닥에 발길질하며 산만하게 쿵쿵 뛰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니까!”
“리사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나한테 제일 먼저 얘기했을 거니까.”
“왜?”
“내가 가장 원하는 말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
에디는 새삼 처연해 보이는 노엘의 낯선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지그시 응시했다.
세상 두려울 게 없는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고작 리사에게 미움을 조금이라도 받을까 봐 겁먹는 불쌍한 얼굴이라니.
영 믿기지 않는 광경이면서도 응원하고 싶어진 에디는 노엘의 어깨에 작은 손을 올리며 비장한 눈빛을 품었다.
“형, 힘내. 반드시 누나를 잡아.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 해.”
노엘은 제 어깨에 손을 올린 에디가 건방지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가도 금세 광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끄덕였다.
“물론이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 곁에 가둬 둘 거야.”
“형, 근데 그런 말은 누나가 직접 들으면 무서워할 거 같아. 말버릇은 어떻게든 노력 좀 해 봐.”
“……네가 할 소린 아니지만 나도 노력은 하고 있어. 최대한 무섭지 않게…… 하고 있다고. 아마도.”
“더 잘 좀 해 봐. 어쩐지… 어른의 거짓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왠지 불쾌하면서도 유쾌한 기분에 사로잡힌 노엘은 어른인 척하는 에디를 오묘한 감정으로 노려보았다.
노엘은 이윽고 뭔지 모를 불쾌함을 털어 버리려 에디의 머리를 다시 한번 거하게 헝클어뜨리고 일어났다.
“그럼 리사가 어떤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는지 알아내러 가 볼까.”
***
긴 계단들을 하염없이 오르니 드디어 3층에 도달했다. 계단이 다음 층으로 이어지면 좋으련만 뚝 끊긴 탓에 또 3층을 헤매게 생겼다.
올라오니 보이는 건 웬 감옥 같은 철창들이었다. 노엘을 따라가 숨었던 곳의 철창보다도 촘촘하게 짜여 틈이 더 좁았다.
양옆으로 감옥들이 나열된 구조였고 가운데 통로는 그리 넓지 않았다. 겨우 세 사람이 지나갈 정도?
‘여긴 아주 어둡네….’
마력석 불빛들이 조금이라도 비추고 있던 아래층과 비교해 사방이 캄캄했다. 자연적인 빛과 가시거리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들어가기 전, 마력석 주머니에서 마력석 몇 개를 꺼내 보았다. 빛을 내는 마력석이 이 중에 있을 수도 있었다.
두 개를 꺼냈는데, 하나는 붉은색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두색이었다.
“흠… 붉은색을 보니 뭔가….”
뭔가 붉은 보석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지 정감이 갔다.
그래서 붉은색 마력석에 먼저 마력을 조금 주입해 보았다. 천천히 그 감각을 되살려 마력을 불어넣으니 반쯤 채워진 마력석이 문구를 띄웠다.
<시공간의 기억>
아주 간단한 설명이었다. 설명이라기보다도 이건 그냥 이름만 대충 알려 준 수준이었다.
‘시공간의 기억이라….’
붉은 보석과 비슷한 기능을 가졌으리라 추측되었다. 재물에 관한 내용도 없는 걸 보니 별 대가를 요구하진 않는 모양이다.
빛을 내는 마력석은 아니었지만, 줄곧 궁금했던 것이 떠올라 사용해 보기로 했다.
‘분명 그때 다른 누군가가 또 있었단 말이지.’
에디와 숨바꼭질할 때 날 방해했던 이가 있었다. 에디가 날 찾고 난 뒤 사라진 걸 보니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계속 찜찜했던 터였다.
곧 붉은 마력석의 마력이 100%에 도달해 다시 한번 문구가 띄워졌다.
<원하는 시간과 공간을 말씀해 주시면 그때 그곳의 기억을 보여 드립니다. 공간은 지금 있는 건물 내부로만 한정됩니다.>
“음… 2층 개인 서재에서 에디와 내가 숨바꼭질하던 때를 보여 줘.”
이렇게 말하면 되나? 일단 생각난 대로 말해 놓고 머쓱해져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갑자기 손안에서 붉은빛이 밝게 번뜩였다. 손바닥을 활짝 펼치니 붉은 마력석에서 뿜어진 빛이 눈앞으로 동그랗게 떠올랐다. 빛은 곧 커다란 거울처럼 나를 비췄다.
정말 CCTV라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과거의 나를 찾던 에디가 책장으로 올라가는 것도 확인했다. 다시 봐도 정말 무섭다.
그다음에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나왔고, 드디어 그 정체를 알게 된 나는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노엘……?’
노엘은 몇 걸음 움직이더니 에디가 나를 찾고 난 뒤론 곧장 여유롭게 그 자리를 떠났다.
……노엘이었다니.
붉은 마력석을 든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쓰임을 다한 마력석은 내게 충격을 안겨 준 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잠시 석상처럼 굳어 있던 나는 심호흡을 하며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노엘이 에디를 도와준 것 같은 그림인데….’
두근거리는 심장을 차분히 안고 구석에 주저앉아 차근차근 생각해 보았다.
‘에디가 열쇠 목걸이에 눈독 들인 건 우연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노엘이 에디에게 부탁하고 도왔다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는데.
“아이고. 머리야…….”
이마를 짚으니 목이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 몇 번째 뒤통수를 맞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도 맞을 뒤통수가 이렇게나 남아 있을 줄이야.
“노엘 너 진짜…!”
가만히 있으니 이전의 행복했던 기억이 아찔한 버전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일부러 날 데려가선 목걸이가 안 보인다며 어떻게 돌아갈 거냐고 걱정하는 척 물었던 그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경계를 풀어선 같이 잠도 잘만 잤다.
그러다 마력석을 들켰다면 어쩔 뻔했나. 그나마 귀환 마력석의 존재를 숨겼던 게 신의 한 수였다. 그때의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완전 큰일 날 뻔했잖아.”
긴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쥐어뜯을 듯 잡아당기던 나는 다시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근데 그럴 거면 그냥 직접 빼앗아 가도 되었을 텐데….’
나를 상대로라면 얼마든지 힘으로 이길 수 있지 않나. 꼼짝없이 내가 당하고 말 텐데. 굳이 에디를 시키다니….
곰곰이 생각했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나와 사이가 틀어지는 걸 원치 않았겠지. 그랬다가 내가 얼마나 화를 낼지 나도 모르는 일이니.’
입을 삐죽이며 내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그 녀석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깨닫게 되고 말 뿐이었다.
“콩깍지가 아주 단단히 씌었나 봐.”
분명 조금 전까지도 충격을 받았는데…. 그가 왜 이렇게 엉큼하고 귀엽게 느껴지는 걸까. 이래도 되는 건가.
그렇게 내가 돌아가는 게 싫었구나. 그런 공을 들여서라도 내 발목을 잡고 싶었구나.
결코 내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본인을 감추고 나를 속였다. 매번 이렇게 정성스럽게도.
‘이게… 지금 느껴지는 이게 정말 사랑이 맞는 거야?’
방금 내 뒤통수를 친 상대를 사랑스럽다고 여기고 있었다. 가슴이 뜨겁게 두근거리는데 그가 괘씸해서 그런 건지 그의 본심이 귀여워서 그런 건지 의심돼서 혼란스럽다.
“그래, 노엘…. 네가 그렇게 쉽게 날 포기할 리가 없는데.”
이렇게 화끈하게 당한 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오로지 내 잘못된 판단 탓이다.
집착남이 괜히 집착남이겠냐고. 어느새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나도 정상은 아닌가 봐. 어쩐지 네가 시작한 우리 게임의 결말이 흥미진진해졌어.’
그러니 이제부턴 노엘을 만나도 절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절대 귀환 마력석을 들켜선 안 된다. 돌아갈 다른 방법을 찾았다는 것을 그가 알아선 안 된다.
그 방법마저 빼앗긴다면 나는 게임에서 완벽히 진다.
<3시간 동안 빛을 발합니다.>
손안에 있던 다른 마력석에 마력을 주입했다. 마침 필요했던 빛의 마력석이었다.
마력석에 마력을 꽉 채워 주입한 나는 뿜어지는 빛과 함께 힘차게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