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노엘과 헤어질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의 강도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연애란 본래 이런 걸까 새삼 충격이었다.
끼익.
닫힌 문을 열며 계속 나아가자 바로 앞에 에디가 서 있었다. 에디와 딱 마주치니 다시 공포물의 주인공으로 돌아왔음을 직시했다.
‘후……. 제발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이왕이면 로맨스만.’
키스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도 못한 참이었다. 따듯해진 마음과 함께 노엘이 흘려보낸 열기가 입 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가도 에디의 손에 쥐인 과도를 보고는 가슴이 철렁 떨어지려는 것을 겨우 정신머리로 붙잡았다.
“에디, 안녕.”
마른침을 삼키며 힘겹게 인사를 건넸다.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그럼 녀석이 더 바짝 다가올 것 같아 자제했다.
“안녕, 누나. 어젠 그렇게 헤어져서 정말 아쉬웠어.”
“그, 그러게.”
이제 이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에 따라 내 운명이 달라질 듯한데, 이대로 냅다 도망쳐도 다리가 긴 내가 무사히 따돌릴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저 앞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디 있었어? 설마 노엘을 찾은 거야?”
“응? 그럴 리가.”
“그래…?”
내 머릿속을 뜯어보는 것 같은 눈동자가 집요하게 번뜩였다. 웃음기 없는 에디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살벌해 보였다.
하지만 이 아이도 어른들의 잘못에 휘말린 피해자일 뿐, 에디에 대해 알고 나니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에디, 난 어서 친구들을 구하러 가야 해.”
에디는 그렇지 않아도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굉장히 설레는 일이 생겼다는 듯 사뿐히 제자리에서 뛰었다.
“그럼 누나! 나랑 달리기 시합 하지 않을래?”
“달리기 시합…?”
갑자기? 지금?
이건 또 무슨 소린지. 근데 내가 더 유리할 텐데?
“응. 누나가 이기면 친구들이 잡혀간 곳을 알려 줄게. 그걸 원하는 거지?”
그렇다면 달리기 시합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그런데 네가 이기면 난 무얼 들어주어야 할까?”
“내가 이기면… 누나는 여기서 매일 나랑 놀아 줘야 해. 절대 아무 데도 못 가.”
갑자기 의욕이 팍 식어 버렸다.
“만약 내가 하기 싫다면?”
에디는 제 손에 쥔 과도로 눈알을 쓱 내렸다. 나는 그 행동만으로도 무슨 뜻인지 재빠르게 이해했다. 그래서 얼른 말을 이어 붙였다.
“은 농담이고. 하자! 달리기 시합.”
다시 고개를 번쩍 든 에디는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또 피부가 떨어져 나갔지만.
“응! 좋아. 너무 좋아!”
그저 나랑 놀고 싶었던 걸까? 저렇게 즐거운 표정을 짓다니. 그 모습에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한창 놀아 달라고 떼쓸 시기긴 하려나.
“그럼 시작 지점이랑 골인 지점이 어딘지 알려 줘.”
“시작은 여기.”
시작은 바로 내가 막 넘어서려던 문이었다. 나와 에디는 문 앞에 나란히 섰다. 에디가 손을 뻗어 멀리 보이는 또 다른 문을 가리켰다.
“앞으로 저런 문이 다섯 개는 더 있어. 그 문들을 모두 통과하고 나면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올 거야. 그 계단 한 개를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해!”
집중해서 들은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개를 두 번 천천히 끄덕였다.
“자 그럼…… 시작!”
“으익!”
준비도 안 됐는데 갑자기 출발하는 바람에 좀 느리게 발을 떼고 말았다. 하지만 예상보다도 에디의 달리기는 훨씬 더 느렸다.
여유롭게 에디를 따라잡은 나는 어쩐지 앞으로 나가기가 미안해졌다.
지금 내가 누굴 걱정하거나 불쌍히 여길 때는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조그만 애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어쩌지….’
가뿐히 함께 문 하나를 지나쳤다. 대부분이 에디의 놀이터였는지 방마다 에디의 손때 묻은 그림 벽지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그림 속의 아이는 한결같이 신나게 웃고 있었고 주위엔 가족인지 친구인지 다른 누군가가 그려져 있었다. 원시 부족이 원하는 바를 기원하는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에디도 자신의 바람을 그렸던 게 아닐까.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으면.
지나치는 그림들이 이제는 슬프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방심했다가 지면 안 돼. 애들을 구해내야 하니까!’
나는 잔뜩 물러진 마음을 잠시 떼어 두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에디를 앞질러 먼저 문을 팍팍 열고 나아갔다.
뒤에서 에디가 칼을 들고 날 쫓아올 풍경이 그려졌지만, 저 속도라면 나를 절대 따라잡을 순 없었다.
작은 발이 숨 가쁘게 도도도도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녀석은 지고 있는데도 신나서 크게 웃고 있었다.
그저 누군가와 함께하는 이 시간 자체가 흥겨운 것처럼 보였다.
벌컥!
마지막 문을 열어젖히니 저 앞에 정말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드디어 여기서 해방된다는 기쁨이 차오르던 와중 털썩!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앗!”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보니 에디가 앞으로 넘어져선 일어나지도 못하고 울먹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골인 지점이었지만 무른 마음이 또 비집고 들어오고 말았다.
곧장 에디에게로 달려갔다.
“에디! 괜찮아?”
무릎이 빨갛게 올라왔지만, 다행히 까지지 않아 피가 나진 않았다.
나는 에디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떨어진 얼굴 피부를 다시 고쳐 주었다. 몇 번 하다 보니 이젠 징그럽다는 생각보다도 어떻게 하면 더 잘 붙여 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울 것 같던 에디는 그새 울음이 쏙 들어가선 제 얼굴을 만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마워, 누나…. 나 같은 건 내버려 두고 먼저 골인해 버릴 줄 알았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네가 크게 다칠 뻔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라 정말 다행이야.”
“…….”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나를 지그시 보는 눈빛이 퍽 나쁘진 않아 보였다.
이내 에디는 바닥에 떨어진 과도를 다시 주워 들었다. 그 과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장이 쫄깃하게 꼬이는 것 같았던 나는 에디에게서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누나, 나는 역시 누나를 보내고 싶지 않아.”
에디가 칼날을 뒤로 해 움켜쥐고는 급작스럽게 높이 쳐들었다.
“너 설마… 또 달려들려고?”
정답이었다. 갑자기 에디의 눈알에서 실핏줄이 터질 것처럼 불어났다. 기껏 붙여 준 피부는 쭉 찢어진 입꼬리에 또 너덜거렸다.
“보내지 않을 거야아아아아!”
곧장 내 쪽으로 무섭게 달려드는 에디를 피해, 기겁한 나는 계단을 향해 돌진했다.
“흐악!”
역시 녀석은 달리기로는 나를 따라잡지 못했다. 계단에 먼저 도착해 발을 올린 나는 달리기 시합은 이미 의미가 없는 것 같아 그대로 3층으로 도망치려 했다.
반쯤 올라갔을까. 뒤에서 들려야 할 에디의 도도도거리는 발소리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뒤돌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에디는 계단 앞에 멈춰 있었다.
녀석이 더는 올라올 생각이 없어 보여 나는 놀라서 흥분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했다.
“누나의 친구들은 모두 10층에 잡혀 있어. 그러니 10층으로 올라가야 해.”
“……뭐야…. 왜 가르쳐 주는 거야?”
“어쨌든 누나가 이겼으니까. 당연히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정말이지 이랬다가 저랬다가 헷갈려 죽겠다. 이상한 녀석들만 득실거려선 이제 정상적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알려 준 건 고마워. 하지만 아까 일은 너무 심했어. 덩치는 너보다 크지만 난 아주 심약한 사람이라고.”
나도 모르게 서운한 표정을 짓자 에디도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장난이 너무 심했지. 다신 안 그럴게. 정말 깎으려던 건 아니었어….”
“……그럼 나는 이제 정말 가 볼게.”
10층까지 한 번에 올라갈 방법은 없는 걸까. 벌써 앞날이 캄캄하다. 이 계단을 오르면 겨우 3층인데.
“그런데 누나! 이건 더 이상 필요 없는 거야?”
에디가 들어 보인 건 빼앗긴 내 열쇠 목걸이였다.
“응? 어차피 돌려줄 생각 없잖아.”
“그건 그래.”
씩 웃는 걸 보니 뭔가 약이 오른다.
“혹시 10층으로 더 빨리 가는 법은 없을까?”
“몇 층에 있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붕! 뜨면서 한 번에 올라가는 게 있었던 것 같아.”
엘리베이터 비슷한 장치가 있는 걸까.
“고마워. 잘 찾아볼게!”
“그럼 이제 정말 가는 거야?”
“응! 안녕…. 에디.”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혼자 두고 가려니 또 발걸음이 무거워지긴 했지만, 자꾸만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다행히 에디도 내게 흔쾌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 누나. 나랑 놀아 줘서 고마웠어.”
나는 조금 쓰라린 가슴을 안고 계단을 올랐다. 어쩐지 더는 이곳에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안쓰러운 녀석들만 있는 건지.
익숙지 않은 이별이 계속되니 힘들었다. 앞으로 이별해야 할 친구들만 생각해도 벅찼고 속절없이 깊어지는 노엘에 대한 감정도 심히 곤란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얼른 10층으로 가서 애들을 구하자. 그러고 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가는 거야!’
마음을 다시 한번 크게 다잡은 나는 힘차게 계단을 뛰어넘었다.
***
리사를 올려 보낸 에디는 흐뭇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다소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가긴 어딜 가. 누나, 나랑 또 놀아 줘야지.”
미소로 뜯어진 피부를 꾹꾹 누르며 뒤돌아 가려고 한 순간이었다.
언제 접근했는지 커다란 인영이 뻗어 있었다. 그 인영의 끝에 서 있는 건 노엘이었다.
노엘은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와 에디의 정수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놀아 주긴 뭘 놀아 줘. 리사는 나랑 놀아 주기도 바빠.”
에디는 제 정수리를 감싸며 미간을 찡그렸다.
“흥! 그건 누나가 선택할 일이지. 누나랑 있으면… 이런 내 얼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보다 더 흉측해져도 변함없이 다정하게 대해 줄 것 같아. 그래서 보내기가 정말 힘들었어.”
리사와의 헤어짐을 몹시 아쉬워하는 에디를 보니 노엘도 이해한다는 얼굴로 입꼬리 한쪽을 씰룩거렸다.
“맞아. 리사는 기본적으로 밝고 따듯하지. 지극히 현실적인데 살살 유혹하면 가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넘어와 줘. 웃는 것도 정말 예쁘고 눈빛도 아주 맑아. 안 먹힐 거란 걸 알면서도 제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게 너무 귀여워. 머리 굴리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는 것도 매력적이야…….”
노엘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주관적인 리사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에디는 한 단어라도 놓칠세라 집중하여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그렇게 지치지도 않는 노엘의 찬가가 겨우 끝난 뒤에야 에디는 열쇠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형이 말한 거. 이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