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분명 로맨틱한 분위기와 달달한 말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원망’이라는 단어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역시 좀처럼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남자였다. 이토록 애절한 눈길로 나를 원망한다며 내민 장미꽃 한 송이라니. 갑자기 장미의 빛깔이 굉장히 탁해 보인다.
“노엘….”
“자길 떠나려는 연인에게 원망의 의미를 담아 이 꽃을 보내기도 했다나 봐. 이것 말고도 다른 의미가 더 있긴 하지만… 오늘은 이 의미를 들려주고 싶었어.”
“…….”
가슴 한구석을 찌르르하게 파고들어 제법 뻐근했다. 심장을 쥐어짜 내는 듯한 압박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래도 어쩌면… 차라리 노엘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나로선 더 나았다.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삐뚤어지는 것보단, 이렇게 날 원망해서라도 감정을 정리해 나가는 게 훨씬 나은 방향이었다.
그러니 서운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아주 조금은 서운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이게 옳다는 생각이다.
“어때? 흑장미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
봄에 피는 가장 어두운 꽃이 아닐까. 푸른 새싹이 돋아나는 희망찬 느낌의 계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둡고 묵직한 꽃이었다.
“응, 아마도. 점점 좋아질 것 같아.”
나는 이런 게 취향이었던 걸까. 아무리 봐도 노엘 같은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독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든 원망이든 저주든.
결국은 제 뜻대로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커다란 꽃을 피워내고야 말 것 같았다. 봄이 밝아 오든 말든, 눈이 내리든 말든. 가장 검고 붉게 피어오를 것이다.
“다행이야. 다음에도 네게 이 꽃을 선물하려 했거든.”
“다음에도? 너한테 원망받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그리고 이렇게 정성스럽게 원망하지 마. 조금 무섭단 말이야.”
그의 가시덩굴에 갇힌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인 걸까.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묘한 위화감이 덮쳐 온다.
“무섭게 할 의도는 아니었어. 미안.”
“미, 미안할 것까지야…! 그건 그렇고 이제 일어나. 다리 아프겠어.”
노엘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한 번에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리사, 그런데 내가 준 열쇠 목걸이는 어디 있어?”
“아…. 그거… 에디한테 빼앗겼어.”
노엘은 아쉽다는 얼굴로 내 목을 훑었다. 그러다 저 혼자 뒤늦게 깜짝 놀라선 크게 뜬 눈으로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어떡해?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어…?”
“그 열쇠 목걸이가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거잖아.”
다른 마력석이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말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번뜩였다. 좀 전부터 느껴졌던 왠지 모를 위화감 때문일까. 거짓말을 해 버렸다.
“그, 그렇지. 그래서 내일 다시 에디를 만나서 돌려 달라고 해 볼 거야.”
“그래…?”
돌아가는 방법에 관한 얘기만 하면, 그는 평소보다 더 집요하게 묻는 느낌이 들었다.
“응.”
“그래….”
귀신이라도 지나간 것 같은 싸늘한 분위기는 덤이었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있던 노엘이 다시 끈질긴 입을 열었다.
“에디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돌려받지 못하면 어떡해?”
“……빼앗아서라도 돌려받을 거야.”
“…혹시 다른 방법을 알고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질문이 날아드니 명치에 날카로운 화살이라도 맞은 듯했다.
“그럴 리가! 그런 게 있었다면 좋았겠지. 굳이 무서운 에디를 또 설득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래….”
나름 표정 관리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그가 잘 속아 주었기를 바랄 수밖에.
***
밤이 깊었다. 피로를 호소하던 리사는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노엘은 리사가 누운 침대 곁으로 의자를 가까이 당겨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가 자는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주시했다.
하필 노엘이 누워 있던 반대 방향으로 등을 돌려 잠든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어코 의자까지 가져와 리사의 모습을 제 눈에 담은 그는 몹시 흡족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자는 얼굴… 정말 귀여워. 아름다워.”
계속 보고만 있자니 손이 근질거렸다. 저 조막만 한 얼굴을 손으로 만지고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 위로 가져갔다.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손의 그림자는 닿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손은 위에서 멈추었다.
그대로 그림자로만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푹 자고 있는데… 깨우면 안 되겠지.’
이내 애써 손을 거두어들인 그는 허리를 굽혀 침대 위에 턱을 괴었다. 그러자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더 깊어진 어둠이 되어 그녀를 덮쳤다.
그러니 그녀의 얼굴이 너무 어두워져선 잘 보이지 않게 되어, 다시 몸을 뒤로 살짝 젖히는 그였다.
“리사, 흑장미가 가진 여러 의미 중 다른 꽃말을 알려 줄까.”
가슴에 얹어진 리사의 손을 살며시 들어 올린 노엘은 제 뺨에 가져다 대고 기어코 그 온기를 빨아들였다.
“당신은 나의 것.”
그는 아주 작게 중얼거리며 기쁜 미소를 띠었다. 암흑 속에서도 붉게 빛나는 안광이 생화만큼이나 싱그러웠다.
“실은 아까 이 말을 해 주려고 했었어.”
그런데 급격히 긴장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바꿔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듣는 걸 원치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괜히 네가 더 빠르게… 멀리 달아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웬만하면 그녀가 싫어하는 행동은 안 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이런 노력도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이토록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게 한 건 네가 처음이야. 네가 너무 원망스러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아. 그러면서도 네가 날 싫어하게 될까 봐 두려워.”
그녀의 손등에 자기 얼굴을 파묻은 그는 슬프지만, 행복한 듯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게 진짜… 사랑이란 거야?”
이렇게 아픈데 이게 사랑이라고.
***
푹신한 침대에서 오래간만에 푹 잤다. 밤새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게 잠들어 몸도 개운해졌다.
먼저 일어나 있던 노엘은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살짝 들뜬 기분인 것 같았다. 아침 동안 노엘이 해 주는 토스트를 먹으며 잠시 수다도 떨고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간 걸 이제야 인지했다.
“난 이제 가 봐야겠어.”
몹시 아쉬워하는 그의 눈동자가 나를 강하게 붙잡는 듯하여 애써 눈을 피했다.
“그래, 그럼 몸조심해.”
빠른 걸음으로 나가려는데 자물쇠가 걸린 첫 번째 철창이 오싹하게도 나를 반겼다. 잠긴 자물쇠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그가 열쇠를 챙겨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그 모습에 무척 안심했다. 아닐 거라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어렴풋이 불안했던 것 같다.
그가 이렇게 자꾸 신뢰를 주니,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 뒤통수라도 맞게 되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도 되던 참이었다.
철컥.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아주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하나를 넘고 나니 다른 철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컥.
마지막 철창의 자물쇠를 빼낸 그가 드디어 나를 내보내 주었다. 영영 못 나올까 봐 전전긍긍한 자신이 떠올라 괜히 머쓱했다.
내가 철창 밖으로 나오자마자, 노엘은 안에서 다시 철창을 닫고 자물쇠를 빠르게 잠갔다. 마치 자기 자신을 가두는 듯한 광경에 보는 내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저렇게 꼭 빨리 잠가 버려야 하나. 누가 보면 당장 괴물들이라도 쳐들어오는 줄 알겠다.
“그럼 갈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시 아쉬워서 그런 것 같았다.
금방 또 볼 수 있겠지, 하면서도 언제 볼지 기약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
게다가 같이 보내는 시간 동안 입맞춤도 못 했다. 무려 하룻밤을 보냈는데 말이다. 사실 같이 있는 내내 신경 쓰고 있었는데, 어째선지 노엘은 입을 맞춰 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야. 나… 지금 서운해하는 건가. 이건 그냥 서운해하는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왜 애가 타는 거지.
그가 정말 날 돌려보낼 결심을 하고 마음을 단단하게 고쳐먹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그렇다고 내가 먼저 다가가서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명백히 헤어져 달라고 했던 쪽은 나인데.
“또 봐!”
나는 괜히 입술만 달싹이다 그에게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힘겹게 뒤를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리사, 하고 싶어.”
심장을 만지는 것 같은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다시 뒤를 돌지 않을 수 없었다. 염치도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노엘은 양손으로 철창을 쥔 채 머리를 최대한 바깥으로 바짝 붙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어쩐지 죄수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키스하고 싶어. 이리 와. 해 줄게.”
아니……. 이건… 아니, 정말…….
이러긴가.
가슴이 쿵쿵 뛰며 설레고 말았다. 멀뚱멀뚱 감격하지 않은 척 멍하니 서 있으니, 그가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이번엔 양팔을 철창 밖으로 쭉 뻗어 펼치고서.
“넌 돌아갈 몸이라 눈치 보여서 나한테 키스 안 해 줄 거잖아. 그러니 이젠 무조건 내가 먼저 해야겠다. 그렇지?”
“…….”
“어서 오라니까. 네가 안 와서 내가 이 자물쇠를 열고 나가면… 그땐 널 다시 내보내 줄 자신이 없어. 이 철창 안에서 나랑 평생 갇혀 살게 될지도 몰라.”
지금 그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무척, 무척이나 기다렸던 모습이었다.
망설였던 건… 저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져서. 조금만 더 건드려지면 울컥할까 봐 그랬다.
“그러면 곤란한데…. 그러니 네가 열고 나오기 전에 내가 그리로 가야겠다.”
다소 어색한 말을 내뱉고는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섭게 원망하던 모습치고는 심각하게 사랑스러운 행동이 아닌가.
이윽고 못 이기는 척 다가간 나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그의 달콤한 입술을 거침없이 받아들였다.
격렬히 원했다는 정직한 몸짓에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그와 내가 서로에게 가장 솔직해지는 시간이었다.
철창 밖으로 나온 그의 손이 내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어루만지는 그 손길과 홀린 것 같은 눈동자만으로도 그와 깊이 교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잘록한 허리로 손을 휘감아 철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철렁이는 쇳소리가 다급하게 부딪혀 오는데 그의 열기는 끝날 줄을 모르고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곳곳을 뜨겁게 휘젓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