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어서 가자며 노엘이 내민 손을 지그시 내려다본 나는 주저 없이 붙잡았다. 이렇게 좋은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뒤에서 누군가 칼을 들고 쫓아오든 전기톱을 들고 쫓아오든 신경도 쓰이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가자.”
“응!”
내 손을 꽉 쥔 노엘은 곧장 다음 문을 열었다. 길고 긴 복도가 나왔는데 열 개나 되는 문이 양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가운데쯤으로 간 노엘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에 지하로 내려가는 삭막한 계단이 나왔다.
워낙 컴컴한 데다 입구가 좁아 들어가기가 꺼려져서 노엘의 손을 잡아당기며 거부했다.
“여, 여긴… 뭐 하는 데야?”
그는 내 불안을 이해한다며 안심시키려는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2층에서 내가 유일하게 숨어 있던 곳이야. 입구가 조금 음침하긴 하지만… 원래 이런 데 숨어야 들키지 않는 거잖아.”
조금이 아니라 아주 음침했다. 내려가면 미치광이 살인마라도 살 것같이 생겼다.
이대로 날 속박하거나 감금하려는 건 아닌지 괜히 의심이 들고 말았는데, 노엘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더욱 혼란해졌다.
별의별 생각이 뇌를 스치는 바람에 미간만 한껏 좁아지고 있을 때였다.
“누나! 어딨어. 누나!”
에디가 복도로 나온 모양이다. 기어코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나 보다. 마음이 촉박해졌다. 굼뜨게 굴다 들키면 노엘이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냥 어서 들어가자.”
노엘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자꾸만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대니 뇌가 또 두 갈래로 쪼개질 것만 같았다.
거뭇거뭇 축축한 계단을 쭉 따라 내려오자 웬 철창으로 통로가 콱 막혀 있었다. 노엘이 철창을 옆으로 밀어내니 앞에 또 다른 철창이 나왔다.
그렇게 감옥 같은 철창만 다섯 개를 지났는데, 노엘은 철창을 통과할 때마다 안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밖에서 들어오는 침입자를 막아야 하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불안을 잠재우려는 모양이었지만, 그럴수록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는 중이었다.
‘나… 괜찮은 걸까.’
왠지 함께 갇히러 들어가는 모습이지 않은가.
왜 이렇게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는 건지. 붉은 보석을 통해 그래도 그를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다.
상황과 환경이 이런 탓이라 그런 걸까?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신기하고 미치도록 궁금하게 하는 남자였다. 그는 가끔 기괴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다정하고 나를 아주 소중히 여긴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
그를 아는데도 여전히 그가 궁금했다. 아마 평생 같이 지내도 영원히 알지 못할 것만 같았다.
철컥.
마지막 철창에 자물쇠를 채운 노엘이 멀뚱멀뚱 서 있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러곤 나를 이끌어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이, 이런 곳에 어떻게……!”
갑자기 다른 공간에라도 온 것 같았다. 물론 다른 공간에 온 건 맞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환경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넓고 푹신한 침대, 테이블과 소파 등 고풍스럽고 웅장한 침실을 통째로 옮겨 놓은 풍경이었다. 전반적으로 화려함보다는 잔잔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더 강했고, 검은색과 검붉은색이 주를 이루는 방이었다.
침대의 한쪽엔 방과 같은 색의 장미가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제 좀 안심이 되었어?”
긴장을 풀라며 어깨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무척 다정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닫힌 자물쇠 다섯 개가 떠나갈 줄 모르고 여전히 불안으로 남아 있었다.
이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한 긴장을 푸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응, 나는 괜찮아.”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이제 전혀 불안하지 않다는 듯 거짓 자신감을 내비쳤다. 가끔은 정신이 행동을 따라가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동안 나도 몸을 숨겨 다니며 조심스레 알아보긴 했는데, 아직 녀석들이 갇힌 곳을 찾지는 못했어.”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제야 조금은 속이 풀렸다. 역시 그는 그 나름대로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숨어 다녔구나.
“뭐야! 나랑 같이 다니지 않겠다길래 괜히 혼자 긴가민가해선 오해했잖아.”
“나랑 다니면 너도 위험해지니까. 그들의 원한이 내게 집중되어 있으니, 나와 다니면 네가 험한 꼴을 보게 될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도 그런 것쯤은 조금 예상했어. 저 밖에 있던 녀석이 널 간절히도 찾더라고.”
혼자 다니는 것 자체도 충분히 위험한 것 같은데. 차라리 함께 다니고 싶은데 그가 단호하게 거절할 게 눈에 보이니 고집부리며 기운 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저 에디란 녀석은 시드의 아들이야.”
“뭐? 시드의 아들이었다니. 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들도 있었구나.”
“아들은 그의 혼외 자식이었거든.”
“그럴 수가.”
“시드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에디는 처음부터 얼굴 피부가 없이 태어났어. 그리고 그제야 그 어미도 시드에게 얼굴 피부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 아마 처음엔 몰랐을 거야. 시드가 인공 피부를 아주 잘 붙이고 다녔으니까.”
그렇게 시드의 정체를 알게 된 그녀는 도망갔고, 에디도 그녀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고 했다. 이미 가정이 있었던 시드로서는 그런 에디를 차마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겠지.
그래서 아예 이 별장에 두고 키웠던 것이다. 어차피 밖으로 나간다 한들 괴물 취급받을 것이 뻔했으니까.
시드는 인공 피부로 잘 감추고 다니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얼굴 피부는 활동적인 아이가 끼고 다니기엔 부적절했다. 특히 에디는 표정이 풍부해 조금만 웃어도 피부가 금방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다.
그래도 에디를 버리진 않은 걸 보니 시드가 부성애는 있긴 했나 보다.
“시드는 자기 유전자를 보완하기 위한 실험을 했던 걸까.”
“대부분은 그랬던 것 같아.”
“에디가 참 안쓰러워.”
“리사, 지금 에디에게만 안타까운 감정을 갖는 거야?”
“응…?”
또 이런다. 또… 또.
“언젠가 널 보내야만 하는 나를 안타깝게 여겨야지.”
노엘의 아련한 눈빛이 나를 직시했다. 저만 바라보라는 듯 꽉 붙드는 붉은 눈동자에 구속이라도 된 듯한 이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내가 널 떠난다는데… 그런데도 넌 내가 변함없이 좋은 거야? 밉거나 싫어지지는 않는 거야?”
물음의 사이엔 한 치의 망설임도 공백도 없었다.
“응! 전혀. 어떤 변함도 없이 네가 여전히 사랑스러워.”
“…….”
노엘은 정말 사랑에 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홀린 눈빛이었다. 저 남자가 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저걸 여자가 몰라본다면 그건 그냥 눈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천치라고 하겠지.
“리사, 혹시 특별히 좋아하는 꽃이 있어?”
“좋아하는 꽃? 음…… 글쎄. 막 특별히 좋아하는 꽃은 없어. 웬만하면 다 예뻐서 좋아.”
“그럼 지금이라도 이 꽃을 제일 좋아해 보는 건 어때?”
뭐지. 꽃을 추천해 주는 남자는 또 처음이다.
“흑장미야.”
활짝 핀 검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빼 든 그는 향기를 들이켜며 소파에 앉은 내 옆으로 섰다.
“흑장미는 무조건 다 검은 꽃잎만 있는 줄 알았어.”
“주로 그렇지. 하지만 봄의 흑장미는 이렇게 검고 붉은 색으로 피어나.”
밝고 화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쩐지 매혹적이고 진중한 느낌이 드는 꽃이었다. 은은하게 가까워지는 저 꽃향기가 은밀하게 유혹해 오는 듯했다.
“그렇구나. 그건 나한테 주려고?”
“응.”
노엘은 그 흑장미를 내게 들어 올리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나는 프러포즈라도 하는 듯한 자세에 화들짝 놀라선 벌떡 일어나 버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일어나!”
얼굴로 피가 쏠려 붉어졌고, 사방에 화로라도 있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하지만 노엘은 완고했다. 아직도 흑장미 한 송이를 든 채 꿈쩍없이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사, 왜 그렇게 놀라? 그저 네게 꽃 한 송이를 주려는 것뿐이니 안심하고 받아.”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머쓱해져선 다시 다소곳하게 궁둥이를 붙였다.
‘뭐야. 프러포즈도 아니면서… 무슨 꽃 한 송이를 이렇게 거창하게 주는 거야.’
괜히 나 혼자 심장 콩닥콩닥해져선 당황하다니. 실망스러운, 이 묘한 기분은 갑자기 왜 드는 건지. 아니, 실망은 또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혼자 있었다면 당장 저 침대에 뛰어들어 베개에 머리를 세차게 박고 싶었다.
“고, 고마워….”
흐트러짐 없이 한쪽 무릎을 꿇은 그를 묘한 기분으로 내려다보다 이내 얼른 흑장미를 받아들였다.
그의 모습을 보니 상당히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자세의 각도 하나하나가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멋있다고 해야 할지…. 평소 그대로의 모습일 뿐인데 왜 저렇게 근사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절제미 섞인 간절한 눈빛에 다시 한번 마음을 철저하게 빼앗기고 말았다. 꽃이 내게로 옮겨 온 뒤에도 노엘은 그 자세 그대로를 유지한 채 입술을 열었다.
“흑장미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
“꽃말… 같은 건가?”
꽃말이라니 이렇게 로맨틱해도 되는 건가. 흑장미의 꽃말은 모르지만, 뭐 뻔하겠지? 사랑을 담은 의미일 것이라 추측되었다. 보통 이런 때엔 그런 의미를 말하기 위해 사용되니 말이다.
그러니 또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쿵, 쿵쿵 뜀박질을 시작한 심장이 저 유혹의 손짓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나 왜 자꾸 기대하는 거냐고. 아, 몰라….’
그만 반항하고 포기하련다. 그저 그가 이번엔 또 무슨 달콤한 말을 할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윽고 노엘이 씁쓸한 미소를 일그러뜨렸을 땐,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심장이 술렁였다.
“네가 원망스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