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104화 (104/145)

104화.

나는 눈을 부릅뜨고 건너편 책장으로 다리를 쭉 뻗어 길게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주 신중해야 할 때였다.

내가 안쪽으로 슬그머니 들어가자 방금까지 숨어 있던 곳에 다다른 발소리가 잠시 멈칫했다.

‘이제 어느 쪽으로 가려나.’

계속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멈추었던 발소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발걸음은 바로 내 옆 책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또 다른 발소리가 개인 서재의 출입구로 들어왔다.

‘뭐지? 한 명이 아닌데…?’

혼란할 틈도 없이 두 발걸음이 서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사부작거리는 발소리가 책장을 하나씩 끼고 양쪽에서 지나가는 중이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더니 뜨거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머릿속이 마비된 듯 새하얘져 갔다. 이렇게 되면 더는 달아날 구멍이 없었다.

‘에디와 나와의 게임에 누군가 끼어들기라도 한 걸까? 그럼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장 이의를 제기해야 함이 마땅했지만 무심코 나가서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체 누구야….’

책장에 등을 딱 붙인 나는 서서히 가까워져 오는 그들을 기다렸다. 그들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뭐가 어떻게든 되겠지.

집중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뚝 끊긴 발걸음은 분명 코너를 돌기만 하면 나를 찾아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 명의 다리가 거의 동시에 멈추다니? 말도 안 되었다. 둘이서 짜고 치는 게 아닌 한은.

조용히 숨죽이던 그때였다. 정확히 내 눈앞으로 하얀 무언가가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

도톰한 입술이 달려선 흐물거리는 그것은 분명 에디의 얼굴 피부였다. 알아차리기도 전에 무언가가 곧장 내 앞으로 낙하했다.

훨씬 묵직한 그것은 거꾸로 떨어지는 에디의 몸통이었다.

“까꿍!”

“아악!”

피부가 떨어져 붉은 근육을 그대로 내보인 에디의 얼굴은 착지하자마자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죽을 정도로 놀랐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책장 위엔 언제 올라간 건지. 내 앞으로 다이빙한 에디는 전혀 아픈 기색이 없었다.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제 얼굴 피부를 다시 붙이고 있었다.

“아, 정말 불편하단 말이야. 맨날 떨어져.”

나는 마비될 뻔한 심장을 움켜쥐고 숨을 헐떡였다.

역시 퍼뜩 집에 갈 걸 그랬나.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이런 건 정말이지 쥐약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데서 공포를 덜 느끼는 것도 아니었지만.

“누나? 누나, 괜찮아?”

똑똑.

에디가 내 팔뚝을 가볍게 문 두드리듯 쳤다. 나는 아직도 입을 쩍 벌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절대적인 안정?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심하게 놀라면 서러운 감정도 같이 드는 걸까?

급속히 서러워져 에디가 들고 있는 과도조차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그렇게 무서웠어?”

내 앞에 쪼그려 앉은 에디는 과도로 바닥의 카펫을 찌이익 찌이익 긁어 찢어댔다.

조금 진정이 된 나는 간신히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그랬더니 피부가 제대로 붙지 않아 눈알 한쪽이 크게 노출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희귀한 병 같은 걸까?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에디의 얼굴에 손을 뻗고선 눈알 주위의 들뜬 피부를 잘 붙여 주었다. 눈알이 원래대로 쏙 들어가 보이도록.

에디는 처음엔 내 손길에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꼼꼼히 붙여 주는 걸 느끼고는 편안히 몸을 맡기듯 긴장을 풀었다.

“무섭긴. 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깜짝 놀란 거지.”

무서운 거라면 하도 봐서 조금은 면역이 생긴 걸까. 에디의 얼굴은 계속 보다 보니 이젠 그리 무섭지 않았다.

“내가 무섭지 않다고?”

“하나도 안 무섭거든!”

콩!

나는 녀석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더 세게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 정도 배짱은 없었다.

“아야.”

“저 높은 곳에서 그렇게 뛰어내리는 게 어딨어! 위험하잖아.”

물론 내가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진짜 무진장 놀라서 심장 터질 뻔했다.

맞은 머리를 감싸고 싹싹 문지르던 에디는 어딘가 멍해 보였다. 그렇게 멍한 얼굴로 한참을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러다 게임의 끝을 알리는 괘종시계의 소리를 듣고는 다시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렸다.

“자, 어쨌든 내가 이겼으니까. 열쇠 목걸이를 줘.”

에디가 작은 손바닥을 활짝 펴서 내밀었다. 나는 별말 없이 목걸이를 풀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는 목걸이가 마음에 든다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주머니 속에 소중히 넣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여기 한 사람이 더 있었어.”

괴물일 수도 있겠지만, 억울했다. 그 의문의 발걸음만 아니었어도 잘 숨어 다닐 수 있었을 텐데.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잘못 들은 거 아닐까?”

“분명 들었다고. 그래서 내가 더 숨지도 못하고 여기 발 묶여 있었는걸.”

“흠……. 이상하네. 그렇다면 진작 나타나야 했잖아.”

보아하니 에디도 정말 모르는 건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반응이었다.

정말 내가 긴장해서 잘못 듣기라도 한 건지. 청각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괜히 귀를 후비적거리는데 에디의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이 느껴져 무릎을 털고 벌떡 일어났다.

“왜? 더 할 말이라도 있어?”

“내 피부를 잘 붙여 줘서 고마워. 이렇게 해 준 건 누나가 처음이야. 나를 본 사람들은 징그럽다며 다들 도망가기 바빴거든.”

살다 살다 이런 감사 인사는 처음 들어 보았지만, 그래도 진심이 느껴지는 걸 보니 녀석은 꽤 외로웠던 게 아닐까.

“부모님은 어떻게 된 거야?”

노엘이 연구원 세력 모두를 귀신 비슷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다들 이 별장의 지박령으로서 살아 있었다.

“부모님…… 없어.”

“없다니… 여기에 없다고 말하는 거야?”

“아빠랑 있었어. 근데… 아빠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그렇구나. 아빠 따라서 파티에 온 거였어?”

“아니, 나는 여기서 쭉 지내고 있었어. 엄마가 날 아빠한테 버렸어. 그런데 아빠는 날 데려갈 곳이 없다고 했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뭔가 딱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어서 가 봐야 하는데 계속 대화하고 싶어 하는 저런 표정이라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나, 노엘을 알아?”

“어? 어, 응…. 너도 노엘을 아는 거야?”

“알아. 우릴 이곳에 가둔 장본인이잖아.”

연구원 중 누군가의 자식인 걸까. 아이는 죄가 없겠지만, 죄가 있든 없든 이곳에 있던 사람은 어차피 다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쪽 동에 있는 이들은 노엘에게 엄청난 원한을 품고 있을까.

“근데 노엘은 왜?”

“노엘을 데리고 와 주면 이 열쇠 목걸이는 다시 돌려줄게.”

“데리고 와 달라고?”

“응, 다들 노엘을 찾고 있어. 찾아서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거든. 그런데 영 찾을 수가 없어. 숨바꼭질의 천재인가 봐!”

“복수… 역시… 그렇구나.”

만약 노엘과 같이 다니고 있었다면, 나까지 원한을 사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걸 알고 일부러 나랑 함께하지 못한다고 한 걸까.

게다가 다들 노엘을 찾고 있다고 하는 걸 들으니, 노엘은 그에 맞서 자기 나름대로 숨어 다니는 것일지도 몰랐다.

“데리고 올 거지? 이 열쇠 목걸이… 누나한테 엄청 소중해 보였는데.”

에디가 신이 난 듯 활기차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무겁게 저었다.

“미안, 나 노엘과는 친하지 않거든. 노엘이 날 싫어해. 그래서 데려오려고 시도한다고 해도 내 말은 믿지 않을 거야.”

어차피 열쇠 목걸이가 아니어도 돌아갈 수 있는 마력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되찾지 않아도 되었고, 노엘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

에디는 못마땅한지 조심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어쩐지 과도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다가오는 두려움을 애써 삼키며 빨리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누난 이만 가 볼게.”

도망치듯 발을 빠르게 내디디자 뒤에서 에디가 소름 돋게 바짝 따라왔다.

뭔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봤는데 녀석이 험상궂은 얼굴로 과도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얼굴 피부가 또 떨어질락 말락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노엘을 데려올 수 없으면 이제 누난 필요 없어!”

그러고는 내게 무섭게 달려들었다.

“끄아아아악!”

이 순간, 무얼 고민하겠나. 나도 질세라 내달려 도망쳤고, 계속해서 문을 열어젖히며 끝없는 방들을 지났다. 그래도 꼬마보단 내 다리가 더 길기에 달리기는 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잠금장치가 있는 문을 발견했고 나는 들어서자마자 걸어 잠갔다. 건너편에서 도도도도 달려오는 무서운 에디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것 같다.

문 앞에서 멈춰 선 에디는 문 뒤에 있는 내게 흥분해선 씩씩거리며 말했다.

“열쇠 가져올 테니 거기서 딱 기다려. 누나.”

흥, 너 같으면 가만히 기다릴까?

나는 바로 달려서 다음 방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을 하도 열어댔더니 팔이 욱신거려 겁도 없어진 참이었다. 사실 이젠 닫힌 문만 봐도 구역질이 나는 듯했다.

……!

거칠게 연 문 안에 누군가가 떡하니 서 있는 형태를 보곤 멈추어 섰다.

“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형의 얼굴을 본 순간, 다급한 마음조차 차분히 가라앉았다. 익숙하고 다정한 손길이 나를 반기듯 훌쩍 다가왔다.

“정말 보고 싶었어. 리사.”

노엘이었다. 그렇게 오래 못 본 것도 아닌데.

나는 자연스럽게도 그에게 다가가 덥석 안겼다. 마치 그 품 안이 원래 내 자리라도 되는 것처럼 편안하고 아늑했다.

그의 따듯한 온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이 온기라면 귀신도 다 녹아서 없어지지 않을까.

“나도…. 나도 네가 보고 싶었나 봐.”

아아, 이 향기.

그의 향긋한 체향을 들이켜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안전지대처럼 더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렇게 생긋 웃는 노엘의 미소에 모든 상황이 한 방에 해결되고 진정되었다.

“리사, 그렇게 말해 주니… 가슴이 진정이 안 되네. 일단 밤이 깊었으니 함께 쉬러 가자.”

쉬러 가자는 그의 말이 의아했지만 지금 내가 꼭 듣고 싶은 말이었다. 잠시 숨 좀 돌리고 싶었는데. 그는 이번에도 내가 무얼 원하는지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