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노엘은 꽉 안은 리사의 등을 소중히 쓸어내렸다. 눈을 내리깔고는 짙은 미소를 띤 채 그녀의 목덜미를 빨아들일 듯 입을 맞추었다.
잠시 후 몸을 떼어 내었을 때, 리사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귀엽게 찡그린 저 눈썹 사이가 무척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노엘은 그곳에도 입술을 가져다 대어 탐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그럼 리사, 몸조심해.”
리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별수 없다는 듯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말이지 네 머릿속 좀 뜯어보고 싶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
노엘은 걸어 나가는 그녀의 등에 대고 뒤늦게 작게 읊조렸다. 활짝 피어난 눈빛이 황홀하게도 빛나고 있었다.
“기뻐…. 너도 드디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나 봐.”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녀는 투덜거리며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 사라졌다.
노엘은 잠시 멍하니 있다 깜빡 잊었다며 놀라선 옷장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싱그러운 검붉은 장미꽃 한 송이가 머리를 드러냈다.
“이런… 이걸 준다는 걸 깜빡했어.”
검붉은 장미를 손에 든 그는 제 코에 깊숙이 가져다 대었다.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며 활짝 열린 옷장 위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리사, 지난 게임은 명백한 네 승리였어. 첫 번째 게임은 내가 방심해선 완전히 말려 버리고 말았지.”
잠깐 사랑했던 옛 친구가 널 부른 것까진 좋았는데. 나 몰래 네가 붉은 보석을 찾아다니며 탈출할 준비를 하고 있던 건 전혀 몰랐지 뭐야.
노엘은 옛 친구인 리사를 원망했다.
‘어째서 그녀에게 돌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거야. 아무리 보상이라고 해도 그렇지. 기껏 나를 위해 불러 놓곤, 다시 그녀를 빼앗아 갈 셈이야?’
그녀의 의도를 전혀 모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리사에게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 주며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려 했던 건 알겠다.
보상이 없었더라면 붉은 보석 따위 애초에 나 몰라라 했겠지. 어쩌면 어찌할 줄을 몰라선 두려움에 지쳐 혼자 죽어 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보상을 위해 열심히 해냈고, 자신으로부터 떠날 방법을 알아내고 말았다.
노엘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었지만, 이 모든 일을 예측할 수는 없었다. 명백한 패배였다.
그동안 그녀에게 호위 기사를 붙여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녀를 관찰해 왔던 터였다. 그리고 붉은 보석을 모두 찾아 보상받았을 그녀가 어떤 방법으로 돌아가려 하는지 알아보려 했다.
그녀에게 일부러 돌아가라는 말을 던졌지만 진짜로 돌아가게 하려는 건 아니었다. 방법을 알게 된 순간 모조리 파괴할 계획이었다. 리사의 미움을 받더라도.
“이제야 네 계획과 목적을 알게 되었는데…. 널 돌려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절대 못 보내.”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어떡하지. 리사, 나 정말 너한테 푹 빠졌나 봐. 방금 헤어졌는데 이렇게 또 보고 싶어 죽겠어.”
검붉은 장미의 향기를 모두 빨아들인 노엘은 꽃잎들을 한꺼번에 움켜쥐더니 거침없이 떼어냈다. 그리고 손안의 꽃잎들을 바닥에 조금씩 흩뿌리며 걸었다.
꽃잎들이 노엘의 발자취라도 되는 듯 그가 지나간 자리에 살랑이며 내려앉았다.
노엘은 마지막 남은 꽃잎 한 장에 서늘한 눈길을 주며 날려 보냈다.
“이제 너와 나의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어.”
강한 의지가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 갇혀 타오르듯 일렁이고 있었다. 야무지게 다문 입술은 곧 벌어지며 장미보다도 예쁜 미소를 피워냈다.
“세 번째는 없을 거야. 이번엔 내가 반드시 이길 거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벅저벅 느릿한 그의 걸음이 사라진 바닥에서 두근거리던 꽃잎들도 잠잠히 잠들었다.
***
노엘과 헤어진 나는 이전에 갔던 길과는 다른 길로 들어선 참이었다.
공간이 널찍하니 시원하게 뚫려 있어 거리낌 없이 편히 걸을 수 있었다. 주위엔 가구 판매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양한 가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주방장, 노엘은 대체 어떤 사람이죠?”
“…그건 사귀고 있는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분명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모르겠어요. 아까 말하는 거 들었어요? 완전 이랬다저랬다….”
정신 파괴 스킬이라도 있는 걸까.
노엘과 같이 친구들을 구하러 가려던 든든한 계획은 깨져 버리고 말았다. 내 계획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환상에 가까웠다.
“그러게, 키스만 하지 말고 대화도 좀 많이 하고 그러지 그랬어.”
주방장은 옷장 안에서의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틀림없었지만, 괜히 찔리는 걸 보아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입으로 그렇노라 인정하기는 싫었다.
“대화도 많이 했거든요?! 그래도 알 수가 없는걸…….”
답답함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툴툴거리다 보니, 어느새 저 끝에 계단이 보였다. 1층의 끝인가 보다.
당장 저 앞의 계단에 눈이 멀어 활기찬 걸음을 막 내디뎠을 때였다.
갑자기 양옆의 공간에서 무언가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벅철벅하는 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뭐지…. 설마 아까 그 녀석들이 다 이리로 온 건가?”
어기적어기적 나오던 창백한 낯의 오리발들은 나를 보고 일제히 멈추어 섰다.
조금 전보다 많았다. 계단 앞을 촘촘히 막아서 지나가기도 불가능해 보였다.
분명 내가 또 눈을 떼면 미친 듯이 달려오겠지. 누가 보면 수십 대 일로 눈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일단 내가 계단으로 갈 공간이 필요해.’
그들을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바로 떴다.
그 짧은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을 때리는 진동에 소름이 다 돋고 말았다. 심장이 스산하게 얼어붙는 감각에 정신마저 아찔하다.
녀석들은 그새 두 걸음씩 움직였지만, 계단까지 가기엔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확실하게 길을 만들어 달라고!”
나는 아예 뒤를 돌아 달렸다. 달리고 달리다 홱 뒤를 돌아보았다.
“으윽!”
조금만 더 늦었으면 맞기라도 했을까.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건지, 내 코앞까지 온 한 녀석이 제 발만 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저걸로 날 내려칠 셈이었나?
곧바로 뒤에 우글거리는 녀석들에게 시선을 분산시키니 모두 멈추어 섰다. 드디어 일정한 대열이 흐트러지며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겼다. 이제 계단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 녀석들을 따돌리고 무사히 지나가려면 내 눈이 뒤통수에도 달려 있어야 했다.
‘와… 이거 어떡하지.’
울고 싶다. 하지만 지금 안구에 습기라도 찼다간 이 녀석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정신을 집중했다. 천천히 내 눈앞의 공간을 살폈다. 그러다 보니 번쩍이는 생각과 함께 길이 보였다.
바로 오른쪽 벽이었다. 벽에 붙어서 간다면 녀석들을 내 앞뒤로 두지 않아도 된다. 대신 좌우로 열심히 시선을 줘야 했지만, 그 정돈 문제없이 할 수 있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등에 벽을 붙이고 게걸음으로 이동했다. 녀석들은 내가 가는 방향으로 몸만 틀 뿐 달려들지는 않았다.
잠시 시선을 받지 못한 것들이 가끔 움찔거리긴 했지만, 눈알이 빠지게 집중하니 어떻게든 됐다.
‘빨리 벗어나고 싶어. 그만 좀 보고 싶다. 이 징글징글한 녀석들.’
드디어 계단에 도달한 나는 들이켰던 한숨을 크게 내뿜었다.
후아…….
이제 어떡한담. 이대로 계단을 올라가 봤자 따라올 게 분명했다.
그럼 2층에서도 계속 이렇게 돌아다녀야 한다는 건가? 친구들을 구하긴커녕 당장 나부터 구해야 할 판이다.
‘어떡해야 하지? 일단 끌고 올라가서 숨을 곳이라도 찾아야 하나?’
문제가 있다면 난 이쪽 동이 처음이었다. 2층에 뭐가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녀석들을 다 끌고 올라가긴 감수할 위험이 컸다. 게다가 이젠 눈도 아플 지경이었다.
붉고 어두운 빛 아래에서 녀석들은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눈도 없으면서 날 지켜보는 느낌은 이토록 강하게 들다니. 정말이지 끔찍하다.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요? 진짜 저것들을 2층까지 데려가고 싶지는 않은데….”
주방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를 사용할 거라면 아무래도 이런 데가 제격이지 않겠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까웠다.
“적어도 최종 보스를 해치우는 데에 써 드려야 할 것 같단 말이죠. 예를 들면 시드 공작이라든가…….”
“최종 보스를 만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다.”
이 역시도 맞는 말이었다. 이러다간 친구들을 구하기도 전에 내가 귀환 마력석을 써서 탈주하게 생겼다.
“하아… 그래도 아껴 두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운 마음에 절망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방장이 없으면 말동무도 사라지는 것이기에 더 슬퍼졌다.
“일단 여긴 내가 막을 테니 넌 어서 올라가도록 해.”
“다 무찔러 버릴 때까지 제가 기다릴게요! 그리고 다시 같이 가면 되죠.”
그 말을 하는데 저 멀리서 어둠의 군단이 보였다. 새 녀석들이 원래 있던 녀석들에게 합류하며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대체 저 많은 놈들은 어디 있다가 나오는 거야. 저절로 입이 쩍 벌어져선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기다릴 텐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는데. 저 녀석들… 지금도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다고.”
“그렇긴 하지만….”
목뒤에서 어깨 위로 주방장이 꾸물거리며 이동하는 바람에 닭살이 돋았다. 내 머리카락 밖으로 나온 그가 커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