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크흠!”
잠시 이성을 내려놓은 사이, 잊고 있던 목소리가 뜨거운 공기를 가르며 헛기침을 해댔다.
바로 내 목뒤에 숨어 있던 주방장이었다. 주방장이 이 상황을 지켜봤을 걸 생각하니 급격히 눈앞이 캄캄해졌다.
입술을 막 뗀 노엘의 얼굴에서 살벌하게 구겨지는 미간이 눈에 들어왔다.
“방해꾼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네. 그냥 좀 가만히 있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는데.”
노엘은 투덜거렸지만, 나는 조금 전까지 느꼈던 부드러운 감촉의 그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타액이 묻어 은은한 윤기까지 더해지니 더욱 탐스러워 보였다.
입술에도 취할 수가 있는 건지. 주방장의 존재로 날카롭게 뜨인 그의 눈매조차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저 번뜩거리는 눈알의 흰자조차 사랑스럽다.
이 정도면 중증이 아닐까.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씐 건가. 돌아가기 전까진 헤어짐은 없다는 게 오히려 나한테 더 특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미쳐…….’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마를 손바닥으로 세게 쳤다.
촤악-!
그러니 깜짝 놀란 노엘이 이마를 친 내 손을 빠르게 잡아챘다.
이토록 따듯한 그의 손안에 잡힌 내 손이 갑자기 왜 부러워 보이는 걸까. 저 안에 저렇게 꽉 쥐어진 손이 행복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인 거겠지.
이내 나는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노엘이 날 타락시켰어. 그러니 이렇게 이상해진 건 내 탓이 아니야.’
그렇게 부러운 눈으로 내 손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가 제 뺨에 그 손을 가져다 대었다.
“노, 노엘…?”
“그렇게 함부로… 소중한 네 몸을 때리지 마. 아프잖아. 네 것이기도 하지만… 이젠 내 것이기도 해.”
……꿀꺽.
“응….”
갑자기 내가 작고 연약한 소녀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굉장히… 가슴이 뜨겁고 뭉클한 기분.
노엘과 있을 때마다 느끼고 있었지만, 변함없이 날 아껴 주고 사랑해 준다는 느낌이 넘치도록 들었다.
내가 그 느낌을, 이 맛을 과연 끊을 수 있을까. 이 남자가 아니어도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수 있을까. 겁나게 하는 그였다.
“리사, 손이 시원해.”
노엘은 내 손의 온도가 기분 좋은지 뜨거운 제 뺨에다 비비적거렸다. 그 모습이 고양이 같아서 귀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나는 또 미쳐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 그럼 이쪽도 시원하게 해 줄게.”
그렇게 그의 반대쪽 뺨에도 놀고 있는 내 손을 대어 주었다. 도대체 뭐 하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나도 모르겠다.
그저 내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는 걸 낮추느라 애쓰고 있다는 것 외엔, 지금이 무척 즐겁다는 건 확실했다.
“고마워. 너무 좋아.”
노엘은 내 양손에 제 뺨을 더욱 깊이 파묻었다. 길게 들였다 내쉬는 그의 숨결이 간지러웠지만, 내 손을 탐닉하는 듯한 몸짓에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
눈을 뜬 토드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가 폭발한 것 같은 커다란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던 걸 기억해낸 참이었다.
그 이후로 다들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혼자 덩그러니 감옥 같은 철창에 갇혀 있었다.
‘여긴… 어디지.’
철창의 좁은 틈 사이로 밖을 엿보았지만 보이는 거라곤 휑한 공간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새장 같은 동그란 감옥에 혼자 갇혀 있다는 건 누군가가 의도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무사한 건지…. 알 수가 없다니.’
토드는 다시 철퍼덕 궁둥이를 붙였다. 차갑고 소름이 끼치는 철창에 등을 기대어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철창 밖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붉은빛을 내는 작은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체 모를 무언가는 가까워지자 더 확연하게 보였다. 붉은 보석 같아 보이는 그것엔 작고 하얀 날개가 달려 있었다. 그 날개가 붉은 보석을 이리로 운반해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붉은 보석 어쩌고 그랬던 것 같은데.’
가짜 리사가 거짓말을 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목격하니 금세 호기심이 생겼다. 게다가 그 붉은 보석이 곧장 자신에게 날아오니 낚아채지 않을 수 없었다.
날아온 것을 손안에 넣으니 날개는 사라져 버렸다. 대신 붉은 보석이 빛을 뿜어내며 그리웠던 눈빛을 한 그녀가 나타났다. 과거 자기 연인이었던 리사였다.
바로 눈앞에 사랑했던 그녀가 서 있었다. 동공이 커질 대로 커진 토드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곧장 통과해선 유령처럼 만져지지 않았다. 아쉬움에 손을 내린 토드는 제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토드, 네게 이 붉은 보석이 갈 때쯤이면… 난 이미 눈을 감은 후겠지.]
“내게 남긴 유언장 같은 거였구나….”
[너를 정말 사랑했어. 네 덕분에… 나는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견딜 수 있었어.]
“너를 되돌릴 수 있었는데. 어째서….”
그녀는 토드에게 모든 일들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결심하고 추진했던 새로운 일을.
잠자코 듣던 토드는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은발의 눈부신 머리카락만큼이나 맑은 눈물이 철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이 붉은 보석이 부디 늦지 않게 네게 닿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이 마력석은 속도가 좀 느린 것 같더라고.]
“이미 늦어도 한참은 늦었어. 난 네가 불러낸 그 녀석을 괴롭힐 만큼 괴롭혔다고. 하마터면 죽일 뻔했어. 이제 내 얼굴을 보기만 해도 도망가거나 치를 떨 거야.”
그녀는 양손으로 토드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하지만 토드는 그 감촉을 느낄 수 없었다.
[토드, 늦지 않았어.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늦지 않은 거야.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새 친구를 잘 부탁해.]
“리사… 고생했어. 정말 사랑했었어….”
투두둑 흘러내리는 그의 눈물과 함께 그녀도 점차 투명해지고 있었다.
[사랑해. 토드,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네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꼭 들려줘야 해.]
“흑…….”
남자의 흐느끼는 소리만이 슬프게 울려 퍼졌다. 천천히 떠나보내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막상 이렇게 다시 보니 역시 붙잡고 싶어졌다.
[너도 알잖아. 난 사랑 이야기를 제일 좋아한다는 걸…. 그러니까 꼭 들려줘. 알았지?]
그를 향해 따듯하게 미소 짓는 그녀 역시 생의 미련이 없을 리 없었다. 끝내 웃으며 흘리는 눈물을 토드에게 보이고 말았다.
“알았어…. 그러니까 너도… 그만 편히 쉬어.”
그녀의 눈물에 약해진 토드는 마음을 강하게 먹기로 했다. 살아 숨 쉬는 내내 병으로 고생했던 그녀였다. 이제는 편히 쉬고 싶은 그녀를 보내 줄 때였다.
그렇게 눈물의 인사를 나눈 둘은 헤어지는 마지막까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다시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철창 속에 홀로 남겨진 토드는 제 손바닥 위에서, 그녀의 작은 생명이 담긴 붉은 보석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
“크흠! 큼큼! 내 존재를 인식했으면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려는 건지 모르겠군. 너무한 것 아닌가. 나도 고역이라고!”
여전히 노엘의 매끄러운 뺨의 감촉을 내 손에 가득 담아내는 중이었다. 그의 말랑말랑한 중독성 있는 피부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주방장의 절규 섞인 목소리를 계속해서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내 이래서 커플 사이엔 끼고 싶지 않았어.”
나는 살며시 옷장의 대각선 틈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밖의 풍경은 역시 아름답지 못했다. 여전히 옷장 밖은 위험했다.
나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하던 녀석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저 맨살의 오리발을 다시 보니 역시 소름 끼친다. 달리기도 빠르던데 물속에선 얼마나 더 빠를지 생각하기도 싫다.
그런데 그때였다.
녀석들이 갑자기 일제히 같은 동작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리발을 철퍼덕거리며 고장 난 장난감처럼 기우뚱댔다.
한참을 그렇게 삐그덕대던 녀석들은 방을 나가 어디론가 가 버렸다.
“노엘! 정말 녀석들이 다 갔어.”
기다리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란 노엘의 말이 실현됐다. 그 사실에 나는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날 속인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그것 봐. 내가 그랬잖아.”
나는 기쁜 마음에 옷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환기가 필요했던 참이었다. 줄곧 옷장 내의 공기가 너무 뜨거워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열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코를 찌르고 들어오니 아쉬움도 들었다. 좀 더 노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같은… 뭐 그런…….
“노엘, 이제 애들을 구하러 가야지. 나랑 같이 가자. 응?”
“미안…. 미안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뭐? 어째서!”
“당장 같이 다닐 순 없지만 대신 금방 너를 찾아갈게.”
“아니, 애들을 구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애들은 네가 구해 줄 거라고 했잖아.”
뭐지. 이 직감. 직감이 또 지독하리만치 빨갛게 울리는 것 같은 건 왜일까.
“나… 나 혼자?”
“어차피 넌 애들을 구하면 돌아갈 거라면서.”
“응…. 그렇지. 근데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내 입장이 되어 봐. 리사. 너라면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빨리 보내려 하겠어? 조금이라도 늦게 보내려 하겠지. 그러니 나는 네가 애들을 천천히 구하길 바라.”
이, 이게 무슨 소리지.
“……그렇긴 한데. 너도 동의한 일이잖아? 내가 돌아가는 건.”
“아. 그 말은 취소할게. 그땐 네가 위험할까 봐 그런 거였으니까.”
“뭐? 아깐 여기 들어온 것부터 위험하다고 했잖아! 앞으로 더 위험한 걸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 앞뒤가 전혀 안 맞잖아.”
알쏭달쏭하게 구는 녀석 때문에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녀석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며 저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손에 한 움큼 쥐고는 잡아 뜯고 싶었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엘은 다정한 미소와 함께 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리사, 지금 네게 제일 위험한 건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