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97화 (97/145)

97화.

노엘은 느릿한 걸음으로 계속해서 쓸 만한 가구를 물색했다.

덜컥.

제 눈높이까지 오는 어린이용 옷장을 발견하곤 문을 열어 본 그는 석류알 같은 눈동자를 밝게 빛냈다.

“이건…… 쓸 만할지도 모르겠어.”

아래는 3단 서랍장이라 사실상 옷을 거는 공간은 전체 크기에서도 반토막 난 공간밖에 되지 않았다.

입꼬리를 비틀어 당긴 노엘은 마음에 든다는 듯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리사가 마음에 들어 할까?”

이내 다시 고민하는 듯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노려보다가.

“더 작은 건 없나….”

고개를 저으며 눈을 엉큼하게 떴다.

“더 작으면 들어오려 하지 않겠지. 이게 딱 좋겠어.”

설레는 미소가 그의 얼굴에 한가득 번졌다. 생각만 해도 좋은지 입꼬리는 계속 귀에 걸린 채, 예쁘게 휜 눈꼬리와 맞닿을 듯했다.

어딘가 음침했지만 데이트 전, 설렘과 기대감에 푹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멈추지 않는 두근거림에 그 어느 때보다도 살아 있다고 느끼는 중이었다. 맥박 뛰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에까지 울려 퍼졌다.

“리사. 네 체향이 거의 다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자신에게 묻어 있던 그녀의 체향이 몹시 그리웠다. 둘이 꼭 붙어서 잠을 청했던 날들이 생각났다. 내내 그녀의 향기 속에 파묻혀 지냈었는데.

그런데 그러지 못한 지가 꽤 오래되었다.

“다시 너로 가득 채워야겠어.”

벌써 꽉 채우기라도 한 듯한 생기 있는 얼굴이었지만 상상 따위를 현실과 비교할 순 없었다.

“그리고 네게도… 나를 가득 남길 거야. 내가 곁에 없어도 언제나 함께 있다고 느낄 정도로.”

제 몸에서 나는 향은 아무리 맡아 봐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리사가 제 체취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가 항상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랑스러운 풍경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결에 본능적으로 품에 파고들어 와 냄새를 맡고는 향이 좋다며 잠꼬대를 했었다.

그렇게 들러붙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볼 때면, 노엘은 얼굴이 빨개지며 참을 수 없는 욕구에 매몰차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잠에서 막 깬 그녀와 눈을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도 없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곁에 있어 준 적이 거의 없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녀는 노엘이 부지런하다고 오해하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리사. 조금만 기다려.”

아주 자상하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끼이-.

음산한 불빛 속 새까만 그림자가 어린이 옷장을 끌어 옮기기 시작했다.

적당한 곳에 옷장을 옮겨다 놓은 그림자는 곧 그 안으로 쏘옥 들어가 턱을 괴고 웅크려 앉았다.

그대로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녀를 기다렸다.

***

“와아아악!”

나는 노엘의 품에 와락 안겨 들어갔다. 그러자 노엘은 신속하게 옷장 문을 닫았다.

문짝에 대각선으로 난 길고 좁은 틈을 통해 바깥 상황을 엿봤다.

나를 따라오던 것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들어오려다 서로 충돌해 쓰러졌다. 그러다 다시 하나씩 천천히 일어나선 이 옷장 근처로 철벅철벅 달려왔다.

그러곤 내가 보이지 않게 되니 그 자리에 다들 고장 난 것처럼 멈추어 섰다.

“노엘, 여기서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저것들이 정말 다른 데로 갈까?”

“물론이야. 대신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몰라. 차분히 기다려 보자.”

틈 사이로 들어오는 붉은빛 덕분에 옷장 안도 빨갛게 물들어 조금이지만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아래쪽으로 갈수록 빛이 닿지 않았기에 특정 위치에서만 볼 수 있었다.

뭔가 무드 등 같기도 하고……. 색이 굉장히… 로맨틱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로맨틱이라고 하기에는 좀 자극적인데…….

아니, 아니지. 내가 또 무슨 생각을!

정신 차려야 했다.

갑자기 만난 노엘과 이렇게 좁은 공간에 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지금은 두근거릴 때가 아니었다.

“이러다 모두 또 실험당하면 어떡해? 빨리 애들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심히 걱정이었다. 때가 늦어 녀석들을 또 지옥으로 몰아넣게 될까 봐.

하지만 노엘은 조급해진 내게 차분히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 아직 시드가 나를 잡지 못했잖아. 아마 녀석들을 볼모로 날 끌어내려 할 거야. 그때까진 인질로 써먹어야 하니 녀석들을 살려 둘 테고.”

“그럴까?! 정말?”

“그럼, 날 믿어.”

나는 그제야 조금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심장 박동이 차분히 가라앉나 했는데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근데 노엘…, 그러고 있으면 팔 안 아파?”

“응. 안 아파.”

노엘의 얼굴이 아주 조금 떨어진 코앞에 있었다. 공간이 무척 협소해서 거의 구겨지다시피 들어왔는데, 지금 내 다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와 몸이 실뭉치처럼 엉켜 버린 것 같았다. 그의 오른팔은 내 꺾인 허리 뒤를 지탱했고, 왼팔은 바로 내 얼굴 옆 벽을 짚고 있었다.

옷장 속에서 벽 치기를 하면 이런 느낌인 건가. 아니, 애초에 옷장 속에서 벽치기를 할 일이 없잖아.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이런 내 얼굴의 변화를 그는 알아볼 수 없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은 좀 놓이는데.

좋은 냄새가 어디선가 솔솔 피어올랐다. 노엘만이 품고 있던 향긋한 냄새. 몰랐었는데, 나는 이 향기가 그리웠던 것 같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그와 가까이 있는 것이. 숨 막힐 정도로 밀착하고 있는 것이.

그러니 다시 이전의 뜨거웠던 감정들이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자, 자세를 좀 바꿔 볼까?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아. 사실 내 다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어.”

심장이 내는 요란한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급히 말을 꺼냈다.

“어떻게? 일단 하나씩 천천히 움직이는 게 좋겠어. 지금 우리 둘만으로도 이 공간이 꽉 차 있으니까.”

“그럼 뭐부터 움직일까?”

노엘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네 오른쪽 다리가 어디 있는지부터 좀 찾아볼게.”

“으, 응! 뭔가… 위로 들려 굽혀진 느낌인데.”

노엘이 벽 치기 했던 팔을 떼더니 뒤를 더듬었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내 오른쪽 다리에 감각이 돌아왔다.

다리에 닿은 그의 매끈한 손끝이 길을 찾듯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내 발목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여기 있었네. 네 오른쪽 다리.”

알고 보니 그의 허리 옆에 꺾여 있었다. 알아챈 순간 발끝에서부터 피가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허리를 틀어 조금 풀어 준 덕분이었다.

“으, 이제야 느껴져. 피가 잠시 안 통했었나 봐.”

“어떡할까. 차라리 내 허리 위에 제대로 걸치고 있을래? 그럼 좀 편해질 거야.”

어차피 다리를 쭉 뻗을 공간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엘이 말한 대로 할 수는 없었다.

“아, 아니! 좀 구겨져도 좋으니 발은 바닥에 내려놓게 해 줘.”

얼굴이 화하다 못해 식은땀이 흐를 준비를 하는 듯했다. 등줄기에선 이미 한 방울씩 내 절규와 함께 생성되는 중이었다.

“……미안, 바닥에 내려놓을 공간은 없을 것 같아. 그러니 내 말대로 하자.”

“뭐, 뭣?”

엎드려 있던 노엘이 상체를 내 쪽으로 더욱 내렸다. 그러고는 내 오른쪽 다리를 제 허리 위로 올려놓았다.

빈틈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저절로 고정되어 편안하긴 했다. 그런데 결국 자기 말대로 할 거였으면 권유할 필요도 없던 것 아닌가.

내가 의문을 품고 물어볼 시간도 없이, 그가 곧장 다음 행동에 들어갔다.

“이제 네 왼쪽 다리를 찾아볼게.”

“어? 으, 응. 왼쪽 다리도 지금 피가 안 통하나 봐. 근데 다리 위인지 옆인지 좀 딱딱한 게 있는 것 같아. 정확한 건 아니지만.”

최대한 조금이라도 자세히 설명하려 하다 보니 어쩐지 목덜미가 싸해졌다. 괜히 입 밖으로 꺼냈다고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저 오리발 녀석들한테 찰박찰박 밟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네 왼쪽 다리가 어딨는지 대충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

“응…?”

그가 자기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 사이에 껴 있던 내 왼쪽 허벅지를 스친 손이 차분하게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옷이 같이 끼어 있어서… 섣불리 빼다간 네가 다치겠어.”

“고… 고마워. 처, 천천히 해도 돼.”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더욱 또렷하게 느껴지는 왼쪽 허벅지의 감촉에 온정신이 팔렸다. 본의 아니게 자꾸만 집중되는 걸 어떡하나.

“정말 천천히 해도 돼?”

“어? 아니? 아니, 그러니까 천천히 빨리하라는 말이었어.”

분명 내 표정은 엉망이 되었을 거다. 창피하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느껴지는 단단한 무언가에 온몸의 감각이 쏠렸다.

“노력해 볼게. 다치니까 힘은 빼고 있어.”

“응.”

아마 더 부끄럽고 당황스러울 사람은 노엘일 텐데. 그는 여전히 침착하고 부드럽게 대처했다. 이럴 때 보면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것 같다.

치맛자락을 가지런히 정리한 노엘은 천천히 자기 다리를 움직여 내 왼쪽 다리를 밖으로 밀어냈다.

덕분에 내 두 다리가 멀리 벌어지고 말았지만, 지금 이 공간에서 이보다 더 편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니 나도 조금은 진정이 돼 참았던 숨을 풀잎피리처럼 내쉬었는데, 그는 날 진정시킬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