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노엘은 못 이기겠다는 듯 단단히 굳은 입꼬리를 누그러뜨렸다.
“……돌아가라고 데려다 놓았더니….”
“잠깐만. 데려다 놓았다고…?”
모두 잡혀가고 난 뒤, 기절했던 나는 옷장이 아닌 실험실 아이들의 숙소에서 눈을 떴었다.
그럼 노엘이 데려다 놓았다는 거야? 그걸로 모자라 계속 지켜보았던 거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운 좋게 무사했으면 거기서 날 바로 깨웠어야지. 대체 숨긴 왜 숨은 거고!”
“이렇게 내가 같이 있으면, 네가 녀석들을 구하러 가자고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혼자 남았는데도 구하러 가겠다고 나온 거야? 주방장까지 데리고 말이야.”
내 목덜미에 숨어 있던 옥토레드퍼스가 놀랐는지 크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나오지는 않고 조용히 숨어 있다.
“아, 아무튼! 나는 베키랑 리마랑 데릭이랑… 모두를 구한 뒤에 돌아갈 거야.”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내디디며 입구로 들어섰다. 고작 한 걸음이었지만 이제 다른 동으로 옮겨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노엘도 한 걸음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와 나의 거리는 불과 여섯 발자국 정도로, 금방 닿을 거리였다.
“네 다른 의견은 모두 존중할게. 하지만 이번엔 제발 내 말대로 해 주면 안 될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날카로운 눈매는 더욱 가늘어져선 스치기만 해도 베일 듯했다.
웃음기도 사라진 것이 진중하게 날 설득할 모양인데, 나 역시 이번만큼은 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싫어. 노엘이야말로 이번만은 내 말대로 해 줘. 우리가 힘을 합해야 애들도 빠르게 무사히 구하지.”
“…….”
“나 이제 마력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
그래서? 라는 그의 표정이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나게 했다. 내가 전설의 괴물 학살자라도 싸우게 하진 않을 거라는 말.
그러니 촉이 딱 알맞게 들어섰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리 능력자라도 그를 설득하진 못할 것이라는 촉이.
꿀꺽.
침잠된 부위기 속에 내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만이 처절하게 들려왔다.
“리사, 어쩐지 공포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야. 내겐 너를 잃는 게 공포거든. 생각만 해도 숨넘어갈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야. 너희들이 또 실험 대상으로 위협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돌아가는 방법은 뭔데?”
“응…?”
그가 갑자기 내 목에 걸린 열쇠 목걸이에 맹렬한 시선을 두었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열쇠 목걸이를 꽉 쥐고 있던 탓일까.
“그건 왜 만지작거려?”
“아, 이거 말인데. 귀환의 마력석으로 세공된 목걸이였어. 그러니까 이걸로 난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게 됐어.”
“그런 목걸이였다니.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알았네. 그 열쇠 목걸이는 마력자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응, 그렇다고 들었어.”
떨면서 대답하는 순간 곧장 후회하고 말았다. 노엘도 마력자였으니 이 열쇠 목걸이를 손에 넣기만 하면 나를 강제로 보내 버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귀환 마력석의 효능은 돌아가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일정 시간 동안 열린 문은 바로 들어가지 않으면 빠르게 닫힐 것이라고도 했으니, 이 마력석 열쇠를 사용할 땐 신중해야 했다.
저벅.
노엘이 느릿하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돌아가기 싫다면 강제로라도 내가 직접 보내야겠어.”
“아니! 다가오지 마. 나 지금 너한테 진짜 서운하거든? 짜증 날 거 같아.”
왜 그렇게 잘생겨서 보기만 하면 치솟던 짜증이 가라앉는 건지. 정말 짜증이 났다. 답답해서 뭐라 따질 말도 더 있었는데 자꾸 저 다부지게 들어간 매력적인 입꼬리를 보니 기억도 나질 않는다.
“알았어. 리사, 안 다가갈게. 그러니 좀 진정해.”
“지금부터 당분간은 나 따라오지 마. 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솔직하게 알려 줄 게 아니라면!”
또박또박 이어진 내 말에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는 그였다. 시무룩해진 그 눈빛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애써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뒤돌아 붉은빛투성이인 어둠으로 뛰어 들어갔다.
“리사!”
뒤에서 노엘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이 가득 담긴 그 목소리만 들어도 내가 어떤 무시무시한 곳으로 들어온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노엘이 뒤늦게 쫓아오는 소리와 함께 나는 어떻게든 그를 따돌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뒤통수가 얼얼하니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성질내고 나면 노엘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조금 있기는 했다.
“사랑싸움이라니. 아주 좋을 때로군, 좋을 때야.”
목덜미에 붙어 있던 주방장이 걸걸한 목소리로 혼잣말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수다 떨다가 엄한 데로 빠질 수도 있었다.
달려 들어와 보니 긴 통로가 이어졌다. 동의 구조가 저쪽과는 무척 달랐다.
그야말로 미로 같은 곳이었다. 출입구가 여러 군데 뚫려 있는 모습은 아주 복잡해 보였다.
방 하나하나가 어디로 이어진 건지 전혀 모를 정도로 어지러웠는데 대궐같이 넓어서 더욱 길을 찾기 힘들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보이는 대로 마구 들어오다 보니, 어느 순간 나를 뒤쫓던 노엘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람.
간신히 숨을 고르고 난 뒤에야 주위가 세세하게 눈에 담겼다. 여전히 군데군데에 있는 붉은빛의 마력석 탓에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러니 어쩐지 금지 구역에라도 들어온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들어선 곳엔 출입구만 네 개가 뚫려 있었고, 특별히 복도라고 할 것도 없었다.
공기 자체도 착 가라앉아선 커다란 중력에 짓눌린 답답함에 숨조차 턱 막혔다.
중간중간 테이블과 소파가 여럿 놓인 걸 보니 차 한잔하며 가볍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 같기도 했다.
“어? 저건… 뭐지?”
모든 사물이 빨갛고 까매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걸 이제야 보았다.
뒤통수만 보여서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분명 사람의 머리 같았는데 머리카락이 전혀 없었다.
붉은빛 아래였지만 살색의 뒤통수임이 짐작되었다. 대머리일까?
이내 나는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이 갑자기 우뚝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어나 뒤도는 모습을 본 그 순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사람의 형태를 했지만 눈, 코, 입, 귀가 모두 없었다. 몸통은 늘씬하고 날렵해 보였으며, 발은 큰 오리발 같았다.
기괴한 형체에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는데, 그것은 일어선 뒤로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나한테 해를 가할 생각은 없는 건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왜 가만히 있는 건지. 설마 눈이 없어서 안 보이나. 귀가 없으니 소리가 안 들려서? 근데 왜 일어난 건데.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내렸다. 여러 추측을 한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이 방을 나가려 마음먹었다.
그래서 천천히 등을 돌려 가장 가까운 문 쪽으로 살금살금 발을 내디뎠는데.
철벅 철벅 철벅 철벅 철벅.
갑자기 매섭게 달려오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악!”
그것이 열 걸음 남긴 앞까지 순식간에 달려와 있었다. 가까이서 더 자세히 보니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작고 다리가 심하게 길었다.
비명을 간신히 입으로 틀어막은 나는 중심을 잃곤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달려오던 것은 또 그대로 멈춰 내게 고요한 시선을 던졌다. 온몸이 극심하게 떨려 왔다.
“이봐. 정신 차려!”
충격으로 굳어 있던 내게 주방장이 소리쳤다. 그래 봤자 작아진 크기만큼 목소리도 모기처럼 작았지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 옥토… 레드… 퍼…스. 저… 저거 뭐야, 대체.”
“그냥 주방장이라 불러.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나는 찔끔 나오자마자 휘발된 눈물을 닦으며 겨우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는 순간까지도 그것은 가만히 있었다.
“아니….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왜 따라오는 건데.”
그것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말이다. 거기다 발소리도 잊히지 않았다. 저 오리발 같은 발바닥이 땅을 치며 달려오는 소리는 끔찍했다.
당장이라도 놀라서 죽을 것 같았지만, 이렇게 눈싸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것에게서 눈을 한시도 떼지 않고 뒤로 걸었다. 내가 문에 도달할 때까지도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끼익.
문을 열며 닫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것을 주시했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그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철벅 철벅 철벅 철벅 철벅.
내게로 달려오던 그것의 발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닫은 문 쪽으로는 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출입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헉!”
나는 다급히 두리번거리다 바로 이어진 통로로 들어갔다.
철벅 철벅 철벅 철벅 철벅.
그것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들어선 통로엔 문 없는 출입구가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계속해서 가까워지는 기척에 심장이 쿵쿵쿵쿵 터질 듯했는데, 문제는 숨을 곳이 마땅히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철벅 철벅 철벅 철벅.
바닥을 찹찹 찰지게 치며 오는 그것은 곧 모습을 드러낼 텐데. 얇은 벽 하나를 두고 거침없이 나를 찾아오는 것이 이곳의 구조를 잘 아는 모양이었다.
철벅 철벅 철벅.
그것의 발걸음은 단 한 번도 멈추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내가 보이지 않아도 어디 있는지 다 안다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아 진짜 미치겠…….’
철벅 철벅 철벅.
나는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미로 속에서 죽음의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했다.
철벅 철벅 철벅.
끝도 없이 이어진 출입구들로 도망이라도 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던 순간이었다. 이렇게 계속 달리다 보면 나를 쫓아오는 그것도 지쳐서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기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먼저 지친 건 그것이 아닌 바로 나였다. 숨이 차 염소 같은 소리를 내쉬며 헐떡였다.
“흐억…… 흐어어….”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겠다. 저 미친 오리발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뒤따라왔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마치 기계처럼 여전히 활기찬 리듬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사, 사람 살려…….”
저것은 소리로 날 찾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친 내가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거칠어진 호흡을 씨근덕거리긴 했지만 이 넓은 별장에서 숨소리 하나만으로 계속 쫓아온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뛸 수 없는 것보다도 문제는 앞이 꽉 막혀 버렸다는 것이었다. 더는 앞으로 나아갈 통로가 없었다. 주위엔 가구조차 하나 없이 텅 빈 곳들 뿐이었다.
몸을 숨길 곳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철벅 철벅.
이내 그것이 내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사람 피부의 오리발이 바닥에 착 내려앉았다.
철벅 철벅.
나를 발견한 그것은 또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