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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94화 (94/145)

94화.

물렁물렁하고 미끈미끈한 것에 더해 끈적임 한 방울이 섞인 감촉이었다. 촉수의 붉은 눈알만 아니면 탑승한 느낌이 생각보다 편안하고 안락했다.

“그래, 나는 왜 찾아온 거지?”

묵직한 목소리와 근엄한 표정이 아주 잘 어우러졌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마른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어 촉촉하게 적신 후 곧장 입을 열었다.

“노엘과 친구들이 모두 잡혀가 버려서 그러는데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함께 구하러 가요!”

옥토레드퍼스는 더욱 성가시다는 얼굴이 되었다. 미간에 을씨년스러운 나뭇가지가 마구 뻗쳐 나가는 듯 주름이 졌다.

내 기대와는 달리 노엘이 잡혀갔든 어찌 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여서 긴장만 더욱 가중되고 말았다.

“굳이… 이 몸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는 다리 하나를 들어 긴 잿빛 수염을 부드럽게 위아래로 쓸었다. 그 아래로 수백 개의 뱀이 꿈틀거리는 듯한 다리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분명 귀찮아하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노엘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어찌 되든 상관없지는 않아. 하지만 그 녀석이 그리 쉽게 당할 녀석은 아닐 텐데…?”

“아니, 다 잡혀갔다고요. 저 빼고 전부!”

내가 다급하게 언성을 높이자 상황을 조금은 감지한 모양인지 그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뗐다.

“나는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보다시피 몸이 아주 커서 말이지. 그러니 널 따라 이동하는 건 불가능해.”

딱 봐도 그럴 것 같긴 했다. 일반적인 크기의 출입구를 통과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그러면 저기선 어떻게 나온 거죠?”

지금 그의 몸집은 조금 전 그가 나왔던 문보다 훨씬 컸다. 이 부분에 대해선 계속 궁금해하고 있던 터였다.

“대신 몸집을 줄일 수 있지.”

“그, 그럼! 몸집을 줄여서 다니면 되는 거잖아요.”

이 정도의 괴물이라면 저쪽 동의 모든 시드 세력을 다 쓸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 보스감은 이런 괴물을 두고 하는 말이지.

“네가 생각하는 어중간한 몸집으로 줄이는 건 불가능해. 아주 작거나 아주 크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럼 아주 작게 해서 가면 되죠.”

그러자 갑자기 그가 나를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끙-! 하고 힘을 주니 그의 몸집이 신기하게도 서서히 작아졌다.

그가 아무리 작아진다고 해도 나보단 클 줄 알았는데 어느샌가 나보다도 점점 더 작아졌고, 결국엔 내 엄지손가락만 해졌다.

…….

바닥에 우뚝 서 있는 주꾸미 같은 것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밟고 지나가기 딱 좋았다.

“올려다보기가 힘들군. 나 좀 올려 줘.”

잠시 굳어 있던 나는 귀여운 주꾸미… 아니, 옥토레드퍼스의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니 그가 꾸물꾸물하며 내 손 위로 올라왔다.

“저, 정말 작구나.”

“지금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말캉거리는 귀여운 주꾸미라니. 속살도 탱글탱글하고 쫄깃하겠지? 정말 맛있을… 아,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그럴 리가요! 그럼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단, 내가 나설 때는 반드시 어쩔 수 없는 순간만이야. 체면이 있지, 약한 것들은 상대하지 않을 거라고.”

턱을 문질러 매만지던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제 손바닥에 계속 계실 건가요?”

“나를 네 어깨에 올려 줘. 거기 붙어 있을게.”

나는 그의 말대로 내 어깨에 그를 올려 주었다. 꼬물꼬물 기어 올라가던 그는 곧 힘든지 헥헥거렸다.

“혹시 떨어지는 건 아니겠죠? 제가 도망칠 땐 좀 격하게 뛰기도 할 텐데….”

“흥, 이 몸을 뭐로 보는 거야. 작아졌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내 이래서 도와주기 싫었어.”

그가 어깨 위에서 종알종알 중얼거리는 걸 들으니 어쩐지 다시 기운이 나는 듯했다. 입가에 자꾸만 미소가 번지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은 것 같은 기분에 마음도 든든해졌다.

어서 노엘과 친구들을 구해내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들을 구하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이제 이 앞으로 쭉 가면 저쪽 동으로 넘어가는 문이 나올 거야.”

주방을 나와 복도를 따라 걷던 중이었다. 저 앞에 희미한 붉은빛이 보였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질수록 진한 핏빛을 띠는 문은 이미 파괴되어 잔해만 보일 뿐이었다.

그야말로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부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는 걸 보니 차라리 이쪽 동의 어둠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소심하게 멈추어 서서 내부를 살펴보자 붉은빛을 내는 마력석이 곳곳에 붙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아무튼 발을 들이기 쉬울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이제 한 발자국만 떼면 이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었다.

“리사, 내가 분명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바로 뒤에서 들려온 그리운 목소리에 식겁해선 뒤를 홱 돌아봤다. 무섭도록 반가운 그림자가 우뚝 서 있었다.

“노엘…? 네가 어떻게!”

노엘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이었다. 처음엔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공격을 받아냈는데 다친 곳이 하나 없다니. 게다가 모두 다 잡혀간 줄로 알았는데 어째서 혼자만 여기에 있는 걸까.

질문이 한가득 떠올랐지만, 그는 나와는 전혀 다른 얘길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말한 걸… 벌써 다 잊은 거야?”

분명 그랬다. 자신들이 잘못되면 붉은 보석을 찾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아니… 그러니까….”

“리사, 붉은 보석은 다 끝냈어?”

“응!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건 맞아. 확실해.”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어서 돌아가.”

충격이었다.

영원히 함께해 달라 할 땐 언제고 지금은 저렇게 냉정한 눈으로 돌아가라 재촉하다니. 그 차갑고 서늘한 시선이 낯설어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차분히 경계심을 품었다.

“돌아갈 거야. 그 전에 지금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나 얘기해 줘.”

슬며시 손을 말아 쥔 나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려 애썼다. 눈빛에서부터 그에게 지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노엘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금은 주름진 미간을 풀어 보였다.

“복도와 방 사이에 있던 벽이 터지면서… 나는 벽의 잔해에 몸이 전부 뒤덮였었어. 결국 날 찾지 못하고 다른 녀석들만 잡아간 것 같아.”

다른 친구들의 몸집에 비하면 노엘과 토드는 작은 편이었다. 그렇다면 노엘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왜 다시 만났는데도 자꾸만 돌아가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했다.

“그렇다니 정말 다행이야…. 마침 잘됐어. 우리 같이 녀석들을 구하러 가자.”

“뭐…?”

노엘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키웠다. 휘둥그레진 눈이 허무맹랑한 소리라도 들은 것 같았다.

“같이 구하러 가자고. 나 안 그래도 너랑 애들 구하러 가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옥토레드퍼스에게 노엘을 설득해 달라고 도움이라도 요청할까 싶었지만, 내 머리카락 사이로 조용히 숨어선 숨죽이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아니, 넌 돌아가. 애들은 내가 구할 테니까.”

오늘따라 노엘은 굳건한 요새라도 되는 양 물러나지 않았다. 재회하면 더 애틋하고 기쁘고 그럴 줄 알았는데….

게다가 이제야 나도 나로서 그의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건데 말이다. 그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 말한 뒤로 제대로 둘이서 길게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나는 이렇게나 할 말이 많은데 그는 급하게 돌아가라고만 한다. 갑자기 이런 태도라니.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너 혼자서 구하러 가겠다고? 나도 같이 가. 싸움은 못 하더라도…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노엘은 더 단단한 방어막을 만들어내며 나를 튕겨냈다.

“돌아가. 제발.”

점점 뜨거운 피가 머리 꼭대기로 치솟았다. 숨이 턱 막혀선 말문마저 막혀 버릴까 봐 뭐라도 내뱉어야 할 것 같았다.

“노엘, 네가 왜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라고 등을 떠미는 건지 모르겠어.”

“저 안에 들어가면 너도 그렇고 나도… 무사할 수 없어. 다 죽을 거야.”

“…….”

“저기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잖아. 리사, 지옥이 있다면 바로 저곳일 거야.”

“…….”

“그런 지옥의 구렁텅이 속으로 널 들여보낼 순 없어.”

“그럼 애들은 어떡해…? 베키는… 리마는….”

“말했잖아. 내가 구하러 갈 거라고.”

“혼자서 어떻게! 그러다 너마저 죽으면 어떡하려고.”

나는 살에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입구부터 느껴지긴 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저 붉은빛들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리사, 내 걱정을 왜 해. 넌 네 걱정만 하라고 했잖아.”

그가 살짝 고개를 떨구니 얼굴에 까만 그늘이 지며 붉은 눈빛이 지독하게도 짙어졌다.

그래,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몸은 정말 편할 것이다. 하지만 나도 이미 결심한 게 있으니 그럴 순 없었다.

노엘이 혼자 그들을 구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둘 수는 없었다.

이제 나도 엮여 있었다. 바로 내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배드 엔딩으로 끝낼 순 없지. 적어도 결말은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가야겠다.

“노엘…, 내가 널 좋아한다고 했잖아. 널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고, 네 걱정을 하는 것도 내 마음이야.”

너한테 휘둘리는 것조차도 다 내 마음이라고.

나는 굴하지 않고 그에게 강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어되지 않는 눈매가 조금 슬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인한 눈빛으로 그를 직시했다.

돌아가기 전, 나는 이 이야기의 행복한 결말을 기어코 보고야 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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