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무튼 결론은 리사와 친구들 모두를 살리고 싶은 거지?”
[줄곧 여기서 언제 실험당할지 두려워하며 갇혀 지내기만 했던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런 마력석이라면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자들에게 거부권을 줄 수도 있다고 들었어.”
[확실히 줄 거야.]
“그러다 다들 살아나길 거부하면… 어쩌려고 그래?”
현재 상황으로 보면 다행히 모두가 거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만약 다들 거부했더라면 노엘은 저 혼자만 이곳에 발목 잡혔을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그런 큰 위험을 안고도 암흑 같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배짱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녀석들의 선택이니 받아들여야겠지. 그래도 딱 한 사람만은 반드시 일어날 테니까. 괜찮아.]
환영 노엘은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딱 한 사람이라면… 리사?”
[응. 몸만 리사고 속은 다른 아이겠지만…. 그 아이는 좋든 싫든 일어나서 나와 함께 지내게 될 거 아니야.]
새삼 그 아이가 나란 사실에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이런 식으로 내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여기서 선택권이 없는 건 빙의자뿐이었다.
“그, 그렇겠네.”
[그럼 적어도 난 영원히 혼자는 아니겠다. 그렇지?]
무겁게 가라앉으며 휘는 그의 눈매가 쓸쓸해 보였다. 그 눈웃음에서 슬픔과 희망이 동시에 묻어나는 듯했다.
“응, 그렇겠다. 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어. 만약 네가 마력석을 사용했는데, 리사의 영혼이 살기를 거부하면 빙의자도 못 들어가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되는 게 맞아. 하지만 그녀는 무조건 받아들일 거야. 어차피 생명을 얻고 나면 자기 대신 빙의자가 바로 들어올 테니까.]
“아, 그래……. 내가 이해한 게 맞았구나.”
그녀가 죽을 때 손에 쥐고 있던 초록빛의 마력석이 생각났다. 아마 그 마력석을 미리 사용해 둔 모양인데, 원하는 때에 발동되는 마력석도 있나 보다.
아직도 얼떨떨하기만 하다. 그냥 곱게 갈 수도 있는 거였는데 기어코 나를 낚아 불러들이다니.
[아무튼 고민이 생겼어. 처음 그 아이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나이도 성별도 리사와 같다고 했잖아.]
그 아이란 단어를 말할 때마다 어째선지 설레는 표정으로 미소 짓는 그였다. 새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을 무척 기대하는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얼굴까지 붉어지며 수줍어하다니. 녀석의 표정별로 사진을 찍어 소장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란 생각에 어쩐지 더 흥분되었다.
“음…. 그러게.”
[어떤 아이일까…? 정말 궁금해.]
“그 아이를 내쫓을 수도 있다면서. 그러진 않을 거야?”
나는 노엘이 철퇴를 들고 쫓아올 때를 떠올렸다. 벌써 오래된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아직 그때를 떠올리면 이렇게 또 심장이 무섭게 쿵쿵거린다.
[글쎄……. 갑자기 리사가 보고 싶어지면… 아마 고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긴 해. 이젠 친구로서의 감정이긴 하지만.]
역시 그땐 이 녀석도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혼란스러웠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가끔 철퇴에 손이 올라갔던 거였나.
답답하지만 정확히 무슨 감정이었을지는 노엘만 알고 있겠지.
“리사에 대한 미련은 더는 없는 거야?”
그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솔직히… 다시 얼굴을 보면 감정이 되살아날 것 같아 두렵기도 해.]
“……그게 가능할까? 속에 다른 사람이 있는데?”
[……역시 몸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어.]
“아니! 그게 무슨 변덕이야.”
나는 펄쩍 뛰며 창가에서 궁둥이를 떼었다.
[이번엔 가져 보지 못했으니까. 다음번엔 가져 볼까? 그 껍데기만이라도.]
굉장히 장난스럽고 짓궂은 눈빛이다.
“……그게 뭐야….”
[그래, 고민이 끝났어. 그 아이를 만나면, 그녀가 바로 내가 사랑했던 리사라고 생각해야겠어! 내가 한창 사랑했던 때 그녀의 모습이라 여기는 거야. 물론 내가 정말 사랑한 게 맞는지조차 지금은 의문이긴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광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짙은 붉은 안개가 나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번지는 중이었다.
“……뭐라는 거야. 역시 말이 이상하잖아.”
내가 보기에 이 녀석, 지금 내적으로 대혼란을 겪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이어 가는 거야. 어때.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행복할지도 몰라!]
이제야 노엘이 왜 내게 진짜 리사에게 하는 것처럼 행동했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 만나는데도 아주 친근하게 다가왔었지.
그러니까 그때의 그는 정말 자기 혼자만의 사랑을 이어 가려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을 속이고 나를 속이면서. 삐뚤어진 마음으로.
“처음은 그런 의도일지라도……. 그러다 보면 그 안에 있는 아이가 궁금해질 날도 오겠지. 그럼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재의 그는 이 안에 있는 나를 정말로 좋아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지는 알 방도가 지금은 없었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생각하니 갑자기 노엘이 무척 그리워졌다. 당장 보고 싶었다. 이렇게 환영으로 보고 있지만, 내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따듯한 그를 보고 싶었다.
내게 푹 빠진 그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고 싶었다.
내 길어진 말에 환영 노엘은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과거 환영의 모습이었다.
***
어느덧 창밖의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진 밤이 되었다.
시드 공작이 연 연회로 모두 다른 동으로 발걸음을 옮긴 뒤였다. 덕분에 이쪽 동은 아주 한산해졌다.
가끔 복도 끝 정원으로 이어진 문에서 정원사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아마 지금의 정원사가 저 정원사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저녁 근무라도 하고 있던 모양인데, 노엘이 마력석을 쓰는 건… 아마 오늘이지 않을까 싶다.
환영 노엘과 그 뒤로도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던 나는 그를 따라 1층의 계단 앞 넓은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함께할 수 있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 이제 너와 이렇게 대화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네.]
환영 노엘은 나를 향해 가볍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 정말 과거 환영의 이야기는 곧 끝을 맞이하는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환영들과도 정이 든 건지, 시원섭섭한 것이 어쩐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웠어. 나도 즐거웠던 것 같아. 무섭기도 했지만.”
내 말에 잠시 당황스러워하던 그는 이상하다는 듯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곧 환영 노엘이 손에 끼던 반지를 빼내어 기도하듯 두 손으로 감쌌다.
잠시 뒤, 반지의 마력석과 같은 검은빛이 그의 주위로 회오리처럼 휘몰아쳤다.
나는 막상 그 모습을 보니 덜컥 두려움이 몰려왔다. 저주라도 받을 것 같은 짙은 빛이었다.
저기에 삼켜져 버리면 희망도 미래도 없는 곳으로 가 버리게 되지 않을까. 어둠만이 가득한 세상에 버려질 것 같은 위압감에 둘러싸였다.
하지만 그는 마치 그것이 구원의 빛인 것처럼 기쁘게 웃고 있었다.
이윽고 휘몰아치던 어둠이 조금 잦아들더니, 그의 주위에 사과 껍질 돌려 깎는 모양으로 문자가 펼쳐졌다.
<이 건물에서 죽은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합니다. 단, 죽기 전의 모습 그대로 깨어나게 됩니다. 또한 이 건물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부여되기 전, 망자의 영혼에게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필수 재물 1: 본 마력석의 사용자는 본인의 생명을 내놓습니다. 다만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생명체로서 이 건물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필수 재물 2: 건물 안의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내놓습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두 사용자와 같은 생명체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거부권이 없으며 역시 이 건물을 평생 나갈 수 없습니다.>
반지 마력석의 효능을 확인한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당시 살아 있던 시드 공작과 연구원들도 생명을 빼앗기고, 노엘과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엘에게 원한을 가지게 된 걸까? 그러니 우릴 끊임없이 공격해 왔던 걸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멀쩡히 살아 있다 갑자기 한순간에 귀신처럼 되어 갇혀 버렸으니 얼마나 원통할까.
그렇지만 그들이 저질러 온 만행을 생각하면 원통할 자격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남았을 텐데도 계속해서 연구를 해 왔다. 그러니 지금 그렇게 괴물의 모습을 띠게 되었겠지. 그 모습으로 자신들을 강화해서 우릴 습격해 왔다.
‘죽어서도 괴물은 괴물이구나.’
나는 말아 쥔 양 주먹의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환영 노엘을 계속해서 응시했다.
마력석의 문구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편히 눈을 감았다. 곧 잠이 들 사람처럼.
그러더니 마력석의 어두운 빛이 폭주하는 것처럼 강하게 몰아쳤다. 그 빛은 환영 노엘의 몸을 감싸다가 분산되어 여기저기로 흩어져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을까. 환영 노엘은 곧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아주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맑은 눈물 자국이 길게 내려와 있는 걸 보니 두려움이란 감정이 아예 없진 않았나 보다.
별장의 창문들에선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흘러내려 더는 밖을 볼 수 없었다. 저렇게 흘러내려선 굳은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같다.
그러고 난 뒤에도 마력석의 빛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몸에서 모든 걸 뽑아내겠다는 듯 사방으로 뻗어져 나갔다.
“설마… 저게 생명의 빛이라도 되는 건가.”
그리고 한참 뒤, 죽었던 노엘이 눈을 떴다. 미세한 움직임이 시야에 잡혀 그를 보았을 땐, 이미 앉아 있었다.
‘정말 깨어난 건가?’
어딘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 낯선 분위기에 차마 말을 걸기 어려웠다. 죽을 때와 달리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는 제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는 그였다.
[기분이… 썩 나쁘진 않네. 달라진 것도 하나 없는 느낌이야.]
그러고 있으니 마력석의 문구가 다시 그를 감싸며 나타났다.
<사용자와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 죽은 자들의 명단입니다.
-베키, 리마, 알프레드, 데릭, 티나, 옥토레드퍼스, 토드, 리사.>
솔직히 명단을 보니 감동적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정말 나랑 노엘 둘만 남을 뻔했다.
게다가 녀석들은 노엘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임이 분명했다. 이런 곳에 갇혀 살아가겠다는 결심은 아무나 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근데 옥토레드퍼스는 누구지….’
이름이 참 장황하다. 만나 보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어딘가에 숨어 있기라도 했던 걸까?
나처럼 문구를 확인한 노엘은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가 친구들한테 감동해서 눈물이라도 펑펑 흘릴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명단에 자신의 예상과 다른 점이라도 있었던 건지. 점점 심각한 눈빛으로 그늘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