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노엘은 죽으면 죽었지, 혼자 비겁하게 살아남는 짓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 거야.]
“……이런 상황에선 비겁한 것도 아닌 거 같아.”
[나더러 두 번 죽으라며 자기를 위해 뭐든 해 보라 했지만, 그런 말을 하는 표정이 그렇게 미지근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러게….”
[아무튼 난… 내가 못되게 굴었던 그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고 가려고 결심했어. 그게 바로 지금의 네가 되었고.]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거 아니지? 누구 맘대로 날 선물해!”
나는 의자에 붙인 궁둥이를 펄쩍 뛰듯 떼었다. 아마 엉망진창인 표정일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지금 환영 리사가 뭐라는 건지. 괘종시계가 머릿속에서 묵직하게 울리다 마침내 터져 버린 것 같았다.
“네가 날 부른 거였어? 그런 거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날 보고 있지 않았는데, 대신 종이에 무언갈 적고 있었다. 가녀린 손이 힘없이 떨려 글을 쓰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그렇게 꾸역꾸역 새겨 넣는 글자가 궁금해진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종이를 엿보았다.
그녀는 노엘이 보게 될 편지를 쓰고 있던 것이었다. 매일 온다고 한 그였다. 그러니 내일도 올 텐데, 만나서 말하면 될 일을… 굳이 힘들여 종이에 적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내용을 보다 보니 사소한 궁금증은 곧 휘발되었다.
<노엘, 네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난 이미 떠났을 거야.
마지막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걸려 있던 복도를 거닐다 떠나려고 해. 걸을 수 있는 기운이 날 때면 그 복도를 종종 걷곤 했었지.
그리고 내가 숨이 멎었을 때, 이 편지를 본 너는 곧장 그 반지의 마력석을 사용하려 할 거야. 널 말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겠어.
하지만 난 두 번 죽고는 싶지 않아. 생각만 해도 끔찍해.
네 그 반지의 마력석이 죽은 자들에게 정말 선택권을 준다면, 난 거부할 생각이었어. 너도 내가 이럴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렇지만 네가 그렇게 나오기로 한 이상,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어. 그동안 널 서운하게 대했던 것에 대한 속죄… 라기보다도, 이런 곳에 혼자 남게 될 수도 있을 널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줘.
사용자의 몸에 다른 영혼이 깃들게 하는 이 마력석을 미리 사용할 거야. 다행히 시간을 설정할 수 있어 타이밍이 잘 맞을 거로 예상이 돼.
그럼 나와 같은 나이와 성별을 가진 아이가 이 몸 안에 들어오게 되겠지. 아마 네게 보내는 새로운 친구가 되겠구나.
나도 어떤 아이가 오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마력석이 알아서 잘 낚아 오겠지.
물론 그 아이가 내 몸에 빙의하려면 내 몸이 살아 있어야 해.
네가 그 마력석 반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도 내 몸에 들어올 일은 없게 돼 버려. 그러니 그 아이를 데려오는 건 내 의지만은 아니라는 소리야.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 길 제국의 철퇴와 망치는 특유의 마력석으로 만들어진다고 해.
원래의 의도는 그저 단단한 소재라는 것에 치우쳤지만, 그것에 닿으면 내 몸에 들어온 아이는 쫓겨나 죽어 버릴 거야. 그러니 절대 빙의자는 그것에 손을 대선 안 돼.
뭐……, 새로운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일부러 그렇게 해서 쫓아내는 것도 방법이긴 하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되면 내 영혼이 강제로 다시 내 몸으로 들어오게 돼. 그럼 나로선 무진장 절망하게 되겠지. 그때쯤이면 일어나자마자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그러니 선택은 네가 해. 새 친구를 죽이고 나를 두 번 죽여 복수할지, 아니면 새로운 친구를 잘 사귀어 볼지, 그것도 아니면 마력석을 애초에 사용하지 않을지.>
내가 본 편지의 내용은 전체 내용의 3분의 1에 불과했지만, 좀 더 감동적이라거나 가슴 아픈 내용은 없었다. 그 뒤에 미안하단 말이 있긴 했는데 그것마저도 담백했다.
유서나 마찬가지였는데, 마치 남의 일인 양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게 신기했다.
마침표를 찍은 그녀는 편지를 세 번 곱게 접었다. 그와 함께 나는 편지의 내용을 잘근잘근 곱씹어 보았다.
‘노엘이 처음에 철퇴를 들고 쫓아왔던 게 그럼…….’
처음엔 날 쫓아내려 했던 건가. 심히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제야 그 행동들의 의미가 조금은 이해되면서도 아찔해져선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내가 마력석한테 선택된 것도 아니고 낚여서 온 거라니. 그럼 그 홍보 동영상의 노엘의 미모로 날 낚기라도 했단 말이야? 그건 뭔가 억울한데.
환영 리사는 접은 편지를 이불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어서 베개 밑에서 또 하나의 마력석을 꺼내 손에 꽉 쥔 그녀는 절뚝거리며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너… 괜찮겠어? 걸을 수 있는 거야?”
이후로 그녀는 내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저 입을 다물고 그녀의 뒤를 아주 느리게 밟았다.
그녀를 발견한 환영 연구원들은 별말 없이 내버려 두는 눈치였다. 그녀가 어딜 향하는지 빤히 알고 있는 듯했는데,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라는 걸 알아서인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실험실 아이들의 방에서 나와 몇 층을 더 올랐을까. 내가 그동안 와 보지 못한 곳이라 생각했었는데, 곧 익숙한 눈알 그림들을 보고서야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처음 눈을 떴던 곳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알 그림들을 흐뭇한 눈으로 감상하던 환영 리사는 좀 더 걸음을 내딛다 계단 근처에서 힘이 다 풀린 듯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바짝 뒤따르던 나는 놀라서 그녀의 곁에 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겨우겨우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제 걸을 힘도 없어졌어.]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노란빛의 마력석과 초록빛의 투명한 마력석을 내놓았다. 둘 다 모양은 동그랗게 작은 구슬 모양이었다.
[내 얼마 남지 않은 이 생명은 이후에 들어올 널 위해 목소리에 담아 둘 거야. 무책임하게 널 이곳에 데려다 놓기만 할 순 없으니까.]
그 말에 나는 마력석을 구경하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충격받을 일이 얼마나 더 남은 건지 모르겠다.
“목소리? 목소리라니.”
설마 내게 가끔 말을 걸었던 의문의 목소리 역시 그녀였다는 건가?
나는 커진 동공과 억울한 눈썹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 때문에…!’라는 원망 섞인 감정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당장 멱살을 잡고 흔들어 버리고 싶었는데 환영이라 통과될 뿐이었다.
환영 리사는 황당해했다가 억울했다가 결국 울상을 짓는 내게 하필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는 노란색 마력석을 든 오른손을 가슴에 올렸다.
[비록 형태는 없을 테지만, 내 남은 수명을 담아 미래로 보낼 수 있어. 그 목소린 너만 들을 수 있을 거야.]
“근데 목소리가 전혀 달랐어. 중성적이고 뭔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나를 숨기기 위해 변조를 좀 했었어. 하지만 이제부턴 내 목소리로 제대로 들리게 될 거야.]
“벼… 변조까지!”
역시 사기꾼이 맞았잖아!
이윽고 그녀가 눈을 감자 마력석과 같은 빛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한동안 그 빛이 밝게 감돌더니 환영 리사는 툭 쓰러졌다.
설마 이렇게 죽은 건가 싶어 좀 더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 봐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 가까이 귀를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했을 땐, 적막함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리사는 정말 죽었다.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생명은 허무하게도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그리고 내가 일어났던 곳도 정확히 바로 이 자리였다.
나는 축 늘어져서 누워 있는 환영 리사를 두고 천천히 일어섰다.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시한부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이 안타까워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한부도 감당 못 할 일인데 이런 험한 곳에 끌려오다니.
갑자기 그녀의 왼손에 쥐어져 있던 초록빛의 마력석이 발동하는지, 그와 같은 빛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그런데 그 빛은 아까와 달리 한참을 머물렀다.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끝나지 않았다.
계속 그러고 있자니 붙잡혀 간 노엘과 친구들이 생각나 발이 동동 굴러졌다.
[언제까지 내 시체나 보고 있을 셈이야. 네가 내 몸으로 빙의되기까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려. 그러니 이제 1층으로 내려가자.]
그동안 들었던 의문의 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이제는 정확히 환영 리사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응!”
나는 어쩐지 울적해져선 고개를 끄덕이고는 1층으로 빠르게 계단을 탔다. 그렇게 1층으로 내려가니 환영 노엘의 뒤통수가 보였다.
주위에 연구원들은 없었다. 다만 시드 공작과 몇몇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사람들 셋이 그와 함께 서 있었다.
막 이야기를 마치고 별장을 떠나려는 모양인 것 같았다.
-황녀님께서 역시 물건을 잘 알아보셨군요. 비록 값을 매길 수는 없는 것이오나…. 그만한 재물과 막대한 권한을 주신다니 마다할 수 없지요.-
공작과 다른 이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환영 노엘은 그 속에서 아름다운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마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인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그의 손에 환영 리사의 편지가 구겨져 쥐여 있었다.
그녀가 침대 위에 놓아둔 편지를 본 이후인가 보다. 자세히 보니 어느샌가 그 검은 반지도 손에 끼고 있는 그였다.
그들이 모두 떠나가고 시드 공작은 환영 노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격려하듯 툭툭 두드렸다.
-실험에 쓰긴 아무래도 아깝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무려 황녀님께서 재산을 털어 자넬 남편으로 들이겠다 하실 줄이야.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황녀님께서 네 전시회를 발이 닳도록 찾으셨다고 하더군. 아무튼……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될 테니 축하해야겠지? 황녀님의 곁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말이야.-
자신이 그의 아버지라도 되는 듯한 따듯하고도 역겨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노엘은 그 미소를 굳이 마주하지 않고 허공을 무표정으로 응시했다.
-오늘 저녁에 네 축하 파티를 열 것이다. 모든 연구원도 함께할 거야.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겠지?-
시드 공작이 사라지고, 환영 노엘은 창가에 걸터앉아 유난히 화창한 창밖을 응시했다.
나도 그가 보는 창밖의 풍경을 옆에서 조용히 감상했다. 새까맣게 된 창문의 밖은 과거엔 이런 그림이 펼쳐져 있었구나 싶었다.
연둣빛의 넓은 풀밭이 살랑이는 바람에 못 이겨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빙하가 녹은 물이 번진 것 같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무한하게 펼쳐졌다. 곳곳의 풍성한 이름 모를 나무들이 해의 방향으로 머리를 기울여 따스한 온기를 온몸으로 받는 중이었다.
창밖은 저렇게나 평화로운데 어떻게 이 안에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 건지. 저 밖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노엘, 차라리 네가 이때 얌전히 길 제국의 황녀에게 가는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끔찍한 이곳을 나가서 그녀의 남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그랬더라면.”
물론 이런 전시회에 올 정도면 제정신이 박힌 황녀는 아닐 것이다.
환영 노엘은 여전히 평온한 창밖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생각해 본다고 한들 답은 이미 나와 있었을 거야.]
“리사의 유서를 읽어 보았을 텐데도?”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괜히 긴장되어 입술이 바싹 말랐다. 어쩐지 그의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내 자신감과는 상관없이 저절로 그에게 고개가 돌아갔다.
[리사가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야. 그러니 나도 그 선물을 한번 뜯어서 열어 보고 싶어.]
결국 내가 이렇게 빙의하게 된 건 과거 리사보다도 노엘의 탓이 훨씬 더 큰 게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