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환영 리사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눈을 부릅떴다.
-나를 다시 살려낸다 해도 널 사랑해 줄 수 없어. 그건 네가 날 몇 번을 되살린다 해도 변함없을 거야.-
-…….-
환영 노엘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굳었다. 그러다 간신히 눈동자를 뚝 떨구었을 때, 환영 리사가 말을 이었다.
-노엘, 이리 와 봐.-
그가 앞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더 가까이 오라는 듯 그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렇게 환영 노엘의 얼굴과 그녀의 얼굴이 한 주먹 들어갈 정도로 가까워졌다.
노엘은 그저 빤히 그녀를 바라볼 뿐 더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차가운 무표정에 가까웠다.
그런 그의 뺨에 손을 감싼 환영 리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넌 이미 날 사랑하지 않아. 깨달을 때도 됐잖아.-
그 말에 환영 노엘의 미간이 움찔했다.
-무슨 소리야. 토드 대신 죽으라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마음마저 거짓이라 하는 거야?-
환영 리사는 그의 손을 잡아 그의 가슴에 얹도록 했다.
-날 보니 가슴이 설레서 두근거려?-
-……심장은 원래 뛰는 게 정상이야.-
-기분이 좋아져?-
-……지금 상황이 기분 좋을 상황은 아니잖아.-
내가 보기에 환영 노엘은 필사적으로 핑계를 찾는 사람 같았다. 어떻게든 부정하려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걸 보니, 정말 그에게 변화가 생긴 건지 궁금해져서 더욱 집중해 대화를 지켜보게 되었다.
-이렇게 나랑 가까이 있으니 긴장되어서 입이 바짝 마르고 그래?-
-…긴장하기엔 너무 오래 알고 지내 왔는걸.-
-지금 넌 전혀 웃고 있지 않잖아. 나를 코앞에 두고도.-
-그건 웃을 상황이 아니니까……!-
환영 리사는 노엘이 제 손을 가슴에 더욱 꼭 붙이도록 밀어붙였다.
-애절해서 가슴이 막 아프고 뛰고… 그래서 따듯하다가도 급격히 뜨거워지고 그래?-
-…….-
환영 노엘은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더니 또 얼어붙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다 그녀에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하지만 제 가슴에 올려 둔 손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는 잠시 잠잠히 그녀의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듯싶더니 점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느리게 젓는 그였다. 혼란스러움이 한가득 담긴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먼지처럼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고는 잠시 뒤, 제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럽게 말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텅 빈 것 같아.-
이제야 그녀의 주장을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환영 리사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등을 편히 기대어 앉았다.
-노엘, 그건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야.-
-…….-
-그러니 이곳을 살아 나가서 널 다시 채워 줄 사람을 만나.-
상황은 몹시 무거웠지만, 그녀는 별일 아닌 것 같은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 노엘을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잠시 고개를 떨구고 뜸을 들이던 환영 노엘은 제 가슴에 대었던 손을 내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침착한 평소의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그래, 맞아.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이렇게 돼 버린 게 언제부터였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
차분히 말을 잇는 그를 보니 어쩐지 대견했다. 그동안의 질긴 집착이 한순간에 무너지긴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말이다.
-사랑을 어떻게 했는지, 그 느낌이 무슨 느낌이었는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아. 그래서 다시는 못 할 거 같은 정도야.-
그 말을 하는 환영 노엘은 제 입꼬리를 씁쓸히 들어 올렸다.
나는 가슴 한구석이 깊게 찔려 오는 느낌에 두 손을 말아 쥐었다. 뜨겁다 못해 땀이 날 것 같은 손가락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리사, 나는 네가 죽으면 모두와 함께 되살릴 거야.-
환영 리사는 다시 눈꼬리를 떨구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 시한부야. 치유되지 않는 지병이 있어. 그동안 너와 애들에게 숨겨 왔었지만.-
-뭐…?-
-네가 가진 그 마력석은 지병이 있던 영혼도 그대로 되살리긴 하겠지만, 난 되살아나도 다시 내 수명대로 얼마 살지 못하고 죽게 될 거야.-
-왜 그런 얘길 이제야 하는 건데!-
-너희가 걱정할까 봐 얘기하지 못했어. 아무튼 그 마력석은 사용하지 마. 나도 그렇고 다들 원치 않을 거야.-
노엘은 제 손에 쥔 마력석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계속되는 만류에도 그는 제 마음을 이미 정한 것으로 보였다.
-그럼 원하는 사람만 일어나면 되지. 이 정도 등급의 마력석이라면 선택권도 줄 텐데.-
-…….-
-딱히 너 하나 때문에 사용하려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마. 리사.-
-부담이 아니라….-
-이젠 너도 내 소중한 친구로서 대할 거야. 그러니 더는 나도 네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그러면서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였다. 그녀에게 매달려 있던 보이지 않는 집착의 실이 툭 끊어지는 듯했다.
그녀를 연인으로 대할 때와 친구로 대할 때의 태도가 너무 달라, 그 온도 차에 깜짝 놀랐다.
저렇게 얼어붙도록 냉정한 모습이라니.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다.
환영 리사로서도 시원해할 것 같았는데, 가만 보니 시원함을 넘어 서운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였다.
-앞으로도 매일 찾아올게. 네 생사를 확인해야 이 마력석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환영 노엘은 그녀의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앉아 있다가 반강제로 눕혀진 그녀는 급격히 울상이 되어선 그의 팔을 붙잡았다.
-노엘, 그러지 마.-
-리사, 친구로 대하기 시작하니 정말 다정한 눈빛으로 봐 주는구나.-
나는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그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녀 역시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를 붙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마력석… 쓰지 마.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정말 날 위한다면 말이야. 이왕이면 너도 살아서… 계속해서 내게 다정하게 대해 주면 좋겠어. 소중한 친구로서.-
-그건 날 두 번 죽이는 거야.-
-그럼 두 번 죽어. 친구라며. 날 위해서라며? 그러니 이번엔 네가 날 위해서 뭐라도 좀 해 봐. 그동안 넌 날 벌레보다도 못한 취급을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와서 날 불쌍히 여기는 건지 모르겠어.-
-…….-
이번에도 언성을 높이지 않는 그였다. 아주 차분하고도 담담한 어조였다.
오히려 그러니 더 오싹했고 소름이 돋았지만, 그동안 그가 마음 앓이를 얼마나 했을지 이해도 되긴 했다.
-이제 너한테 져 주는 일은 일절 없을 테니 꿈도 꾸지 마. 그럼 모쪼록 푹 쉬길 바라.-
짧은 인사를 남긴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노엘의 칼날 같은 발언들에 그녀보다도 적잖은 충격을 받아 턱을 벌리고 서 있었다.
환영 리사도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갑자기 제정신이라도 든 듯 이불을 박차고 다시 일어나 앉았다.
나는 환영 노엘을 따라 나가려다 말고 그녀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베개 밑을 뒤적거리더니 맑은 빨강의 구슬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기도하듯 손을 모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온몸 주위로 붉은빛이 은은하게 비추었다. 곧 그녀의 모은 손 아래로 구슬이 물방울처럼 하나씩 뚝뚝 떨어져 내렸는데, 영락없는 붉은 보석의 모습이었다.
화들짝 놀라선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저건 붉은 보석이잖아!”
그렇게 생성된 붉은 보석을 보니 내가 그동안 찾은 개수와 얼핏 비슷해 보였다.
붉은 보석을 모두 만들어낸 그녀는 모았던 두 손을 위로 들더니 활짝 펼쳐 터뜨리는 듯한 손짓을 했다. 그 손짓을 따라 붉은 보석들이 떠오르더니 어딘가로 증발이라도 해 버린 듯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대체 무얼 하는 건지 몰라 눈만 깜박거릴 뿐이었다.
[이 별장의 기억과 의지를 담아냈어.]
그녀가 드디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간이의자에 달려가 앉았다.
붉은 보석을 만든 게 그녀였다니. 충격도 이런 충격이 있을 수 없었다. 뒤통수라도 맞은 듯 얼얼한 느낌이었다.
의문이 가득 담긴 충격에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나는 마력자라 황태자인 노엘의 정혼자가 될 수 있었어. 내 아버지가 마력학의 박사이기도 했고.]
“그럼 역시 노엘도 마력자인 거야?”
[그렇지. 아무튼… 방금 보여 준 건 네가 그동안 찾아왔던 그 붉은 보석이 맞아.]
사용한 마력석은 붉은 보석처럼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손을 턴 그녀는 다시 베개 밑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이번엔 다른 마력석을 꺼냈다.
마력석은 샛노란 색의 네모난 돌의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바로 사용하지 않는 건지 손에 쥐고만 있었다.
“나한테… 왜 그런 거야?”
역시 무얼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서 나온 황당한 질문이었다. 당황스러워서 차마 말을 더 잇지도 못하고 어버버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받아 주었다.
[내 몸에 새롭게 들어온 네가 이곳에서의 비극을 알길 바랐어. 그래야 내 친구들을 이해하고 함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내가 네 친구 녀석들과 친해지길 바라기라도 했다는 거야?”
[응. 네가 그들에 대해 알고 나면… 그 모습들이 더는 두렵지 않을 테니까.]
현재 실험당해 목숨을 잃었던 친구들이 살아나게 된 건 역시 과거 노엘이 그 반지의 마력석을 사용했다는 걸까?
“그, 그럼… 꼬마 노엘이라든가… 과거의 환영들이 날 도와준 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 가끔이지만 만져지기도 했었다고!”
아직도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는다.
[이곳의 기억이 네게 환영으로 보여졌겠지만, 환영의 본체가 살아 움직이는 한 현재 그들의 무의식적인 의지가 환영한테 깃들기도 해. 그럴 때마다 환영들은 저마다의 의지를 갖고 돌발 행동을 하기도 하지.]
“어려워….”
[엄청난 힘을 가진 마력석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진 마력석일수록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도 있어. 제물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노엘이 가진 마력석도 대가가 필요한 거야? 그래서 네가 그렇게 반대하는 거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친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그와 함께 정신도 번쩍 드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드디어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에 조금 들떠 버렸다.
[노엘의 목숨. 그의 인간으로서의 목숨을 죽은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 보면 돼. 결국 노엘은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게 되어 버리는 거지.]
그런 마력석을 노엘이 결국 사용했다는 걸까. 믿을 수 없다.
“그건… 희생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