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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87화 (87/145)

87화.

파지지직.

줄곧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결계 막이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일부가 툭 찢어졌다. 그 부분을 중심으로 나뭇가지 뻗어 나가듯 여기저기가 터져 나가더니 결국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푸른빛을 뿜어내던 결계가 깨져 사라지니 금세 어둠이 무섭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들려온 노엘의 나지막한 목소리.

“리사, 기억해. 우리가 잘못되면 네가 해야 할 일은 당장 붉은 보석을 찾는 일이야. 알았지?”

“노엘…!”

노엘에게 무어라 말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급박한 침묵도 아주 잠시였으니.

이윽고 문과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장식장이 단번에 부서져 날아갔다.

문이 날아가자마자 복도 쪽의 벽도 폭발했다. 그와 함께 방 내부로 벽을 이루던 돌들이 조각조각 공격을 가하듯 옆으로 쏟아졌다.

벽에 있던 작은 가구들까지 터져 버려선 그 잔해에 맞거나 벽에 파묻혀 모두 맥도 못 추고 쓰러졌다.

폭탄이라도 터진 느낌이었다. 내가 저 밖에 있었다면 이미 가녀린 살이 벌집처럼 뚫렸을 것이다.

쾅!

한 번 더 끔찍한 굉음이 이어졌고 무언가 내가 있는 옷장 문으로 날아들었다. 옷장의 나무 문에 박힌 무언가가 안으로 뚫고 들어왔다. 다행히 위쪽에 박혀 웅크리고 있던 나는 무사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삐- 하는 소리가 났다.

더 터질 게 남아 있기라도 한 걸까. 이제 그만해도 될 텐데. 다들 쓰러져 있는 걸 부서진 구멍을 통해 똑똑히 보았는데. 어째서….

우우우웅- 어지럽고 메스껍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몹시 무기력하게 하는 소음. 그 소리에 기가 빨려선 천장을 보니 옷장 웃통의 반이 찌그러져 있었다.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긴 못이 나를 조준하며 떨어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피해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아.’

어떤 힘이 이렇게 지독하게도 나를 깔아뭉개는 건지. 보이지 않는 압력이 땅속으로 꺼지라는 듯 재촉했다.

그렇게 한 번 더 굉음이 들려왔을 땐 여전히 삐- 하는 이명과 함께 주변이 새하얘지며 눈이 감겼다.

***

눈을 뜨니 익숙한 공간의 천장이 나를 반겼다.

동그란 눈알 같은 모양의 패턴이 그려진 천장. 4층 실험실 아이들의 숙소에만 그려져 있는 무늬였다.

붉은 보석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왔었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분명 노엘의 방 옷장에서 기절했었다. 아직도 그 당시의 공포가 생생했다.

그러니 내가 여기 있는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를 옮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다들… 다들 어떻게…….”

노엘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한 걸까?

그들의 목적이 실험을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이라면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기절했던 것처럼 녀석들도 기절시켜서 끌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왜 이곳에 혼자 있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머리가 지끈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뭐든 기억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제자리걸음일 뿐. 붉은 보석을 찾아가라는 노엘의 마지막 말만 아련하게 되풀이되며 들려온다.

마침 근처 붉은 문의 실험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붉은 보석을 만진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 떠올리니 이번 붉은 보석은 저 붉은 문 너머에 생성될 차례였다.

‘토드의 실험이 진행되던 중이었지. 그때 토드는 아직 죽지 않았었어.’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 붉은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갔다.

전에 있던 지박령 같은 녀석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단팥묵이라고 이름까지 지어 줬었는데…. 설마 녀석도 붙잡혀 간 건 아니겠지.

원형 유리관 근처에 예상대로 붉은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혼자 영롱하게 붉은빛을 발하는 걸 보니 노엘이 날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심장이 아린다.

여느 때처럼 붉은 보석을 주워 들었으나 이번엔 주위가 확 밝아지지 않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빛이 전부 꺼져 있는 상황이었다.

원형 유리관 안엔 환영인 토드가 쓰러져 있었고, 그 밖에선 환영 노엘이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즉시 환영 노엘의 옆으로 가까이 가 토드를 살폈다. 주위엔 연구원 한 명 없었고, 기계들도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다. 실험은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토드도 결국… 떠나고 말았어. 그 마력의 양을 감당하지 못했을 거야.]

쓰러진 토드를 보며 어떻게든 생명의 기운을 찾아내려 애쓰던 중, 환영 노엘이 내게 말을 걸었다. 담담한 목소리라 괜히 옆을 돌아보았다가 후회하고 말았다.

환영 노엘의 뺨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표정은 얼핏 보기에 무표정 같았으나 깊은 고통이 배어 있었다.

그 모습이 가슴 아프면서도 역시 내 감이 틀린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역시 토드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잖아.”

환영 토드가 실험 전에 내게 부탁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 말들을 생각해내니 서로를 소중히 생각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이 녀석이 죽어 갈 동안 한 번도 여기에 발을 들이지 못했어. 마지막까지도 지켜봐 주지 못했어. 그놈의 용기가 나지 않아서.]

“노엘, 나는 토드가 죽기 전에 잠시 대화를 나눴었어. 바로 이곳에서.”

[그랬어…?]

“응. 계속해서 지켜보진 못했지만, 실험이 시작되기 전에 만났었지.”

[그랬구나. 어땠어? 이 녀석…… 괜찮았어? 그럴 리 없겠지만….]

그는 내 말에 조금 더 차분해져선 눈물을 닦아냈다.

“토드가 네게 말을 좀 전해 달라고 했어.”

나는 그에게 전하려 했던 토드의 말 그대로를 간신히 기억해 전해 주었다.

친구가 돼 줘서 고마웠다는 말. 함께 있으면 두려울 게 없었다는 말.

가만히 듣던 환영 노엘은 다시 한번 크게 눈물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지금은 위로한다고 한들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놔두는 게 낫겠다.

그렇게 기다리자니 토드에게 눈길이 저절로 갔다. 외상은 단 한 곳도 보이지 않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현재의 토드가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멀쩡해 보이는 사람의 형태를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나 보다.

‘그렇다면 노엘과 리사도 몸이 변하는 실험은 당하지 않은 거겠지.’

어느 쪽이든 심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좀 진정되었는지 환영 노엘이 일어났다.

[리사에게 가 봐야겠어. 지금쯤이면 토드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거야.]

환영이 여기서 끊길 줄 알았는데 환영 노엘이 붉은 문을 뚫고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나도 그를 뒤쫓았다.

곧장 발길이 닿은 곳은 예상했던 대로 환영 리사의 개인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는 내내 주위가 꽤 어두컴컴했다. 이제 실험에 쓰일 포로는 노엘과 리사뿐이었다. 그러니 빛을 다 밝힐 필요는 없었겠지.

괜히 더 서늘하고 암울해진 분위기에 정말 퀘스트의 끝을 향해 가는구나 싶었다.

-리사…!-

들어가자마자 환영 노엘은 침대 위의 축 늘어진 환영 리사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처럼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눈 밑에 항상 달고 다니던 그림자는 더욱 깊어져 움푹 꺼진 것처럼 보였다.

-토드가… 결국…….-

환영 노엘의 예상대로 그녀도 토드의 죽음을 알아챈 터였다. 하지만 눈물을 흘릴 힘도 없었는지 말도 겨우 하는 듯했다.

-리사, 말하지 마. 쉬어야 해.-

-어차피…… 나도 금방 그를 따라가겠지. 느껴져. 이 호흡이 곧 끊기리라는 게.-

-그런 말 하지 마!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노엘…. 어차피 난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원래도 조금씩 병으로 약해져 가던 리사는 토드의 죽음을 계기로 살아갈 의지를 완전히 놓은 듯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작고 힘겨운 숨소리였다.

환영 노엘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동그랗고 까만 보석이 금색의 테두리에 붙어 있는 반지였다.

-리사, 이걸 봐. 이게 뭔지 알아?-

커다란 반지를 보여 주며 말하는 환영 노엘의 목소리가 어쩐지 비장한 것이 심상치 않았다.

-노엘……. 그걸 어떻게 네가…?-

-제국의 황제였던 아버지의 것이었지. 나라가 무너지는데 황제는 이걸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선대의 어느 황제도 감히 쓰려고 하지 않았던 마력석의 반지야.-

마력석으로 세공된 반지인가 본데.

이제껏 들어 본 걸 종합해 보면 마력석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힘이 담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마력석은 마력이 있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실험실 기계들을 떠올리니 기계로도 마력석에 마력을 주입해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건 주로 마력이 없는 사람들이 마력석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모양이었다.

‘그럼 노엘이 가진 저 반지는 대체 무슨 힘이 담겼길래? 노엘도 마력을 쓸 수 있는 건가?’

환영 리사도 그 반지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모양인지 즉각적으로 단호하게 입술을 벌렸다.

-노엘, 안 돼. 하지 마.-

-내가 이걸로 너희 전부를 살릴게. 너도 토드도 베키도! 모두 살아날 수 있어.-

환영 노엘의 입가에 광기가 스며든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죽을상이었던 그가 행복한 미래라도 꿈꾸는 듯 경쾌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야, 노엘. 넌 살 수 있잖아. 그러니 반드시 살아. 제발… 그 마력석만은 사용하지 말아 줘.-

-나만 살아 나갈 순 없어.-

무려 모두가 살아날 수 있는 마력석이라니. 그런 엄청난 마력석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굉장히 희망적인 소식일 텐데 그녀는 왜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걸까?

모두가 살 방법이 있는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만류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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