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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86화 (86/145)

86화.

결점 없는 물방울 같았던 결계에 핏줄 같은 금이 생겨났다.

가운데로 모인 우리는 쩌적 갈라지는 균열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와 함께 불안한 눈빛을 하고는 서로 더욱 밀착했다.

리마는 30개의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허공에 대고 물었다.

“결계가 깨질 정도의 공격을 하는 녀석이라면… 우리가 다 달라붙어 공격해도 이길 수 없는 존재인 거겠지?”

그에 대답한 이는 토드였다. 그는 차분해 보이면서도 제법 절망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역으로 우리가 이 결계를 깰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강줄기처럼 갈라지는 결계를 매섭게 노려보던 노엘은 목소리를 높였다.

“결계는 곧 깨질 거야. 이대로 순순히 끌려갈 건 아니겠지? 저들의 목적은 우릴 다시 실험실로 끌고 가는 거야.”

노엘의 말에 다들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베키 역시 날카로운 눈빛이 돼선 큰 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시 실험실로?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건데.”

“작은 굴이 이어져 있던 방에서 녀석들을 베면서 알게 된 거야. 그것들은 어떻게든 날 생포하려 하더군.”

“그럼 이상한 괴물들이 속출하는 것도… 실험과 연관이 있는 걸까? 그동안엔 쳐들어오지도 않고 잠잠했잖아.”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자신들로 실험을 자행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저렇게 괴물의 모습이 된 거라고?”

베키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실험이라면 아주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노엘의 좁혀진 미간 역시 풀어질 줄 몰랐지만 미묘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보단 차라리 저 꼴이 더 잘 어울리긴 해.”

토드는 아주 오랜만에 노엘의 눈을 마주 보고 말했다.

“그래서 우린 이제 어떡하면 되지? 노엘 전하.”

장난스러운 눈빛이 서려 있었지만 동시에 진지한 미소가 노엘의 명령을 바라고 있었다. 토드의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본 노엘은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뱉었다.

“전하는 무슨. 이럴 때만 전하라고 하는 건가.”

둘의 묘한 기류에 나는 조금 안심했다. 친했던 과거로 천천히 돌아가는 듯한 느낌에 가슴 한구석이 따듯했다.

이어서 다들 희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노엘을 바라보았고, 노엘은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렸다.

“다들 흩어지는 게 좋겠어. 이대로 뭉쳐 있다간 한꺼번에 생포당하기 쉽겠지?”

“맞아! 흩어지자.”

노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마는 무리에서 저 혼자 멀찍이 떨어져 나갔다. 천장 쪽이 아무래도 편한 모양인지 천장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제 다리들이 잘 붙어 있나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들 흩어져 방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곧 있을 공격에 대비했다.

쩌저저적. 이런 와중에도 땅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결계 여기저기에 금이 생겼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노엘이 내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졌다. 토드 역시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노엘이 무언의 눈짓을 보내자 별수 없다는 듯 물러나는 눈치였다.

“절대 다치지 마. 넌 살아남을 생각만 해.”

토드가 물러가며 내게 남긴 말이었다. 꽤 멋있어 보이길래 나도 그의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를 했다.

“토드야말로! 애인을 돌려받고 싶거든 살아남아야 할 거야.”

잠시 뒤돌아본 그는 지금 상황에 그런 농담이 나오냐는 얼굴로 피식 웃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노엘과 나 둘만 남았다. 노엘은 나를 침대 옆 옷장으로 데려갔다. 순순히 따라가던 나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리사, 이 안에 숨어 있어.”

또 옷장인가!

“저기… 나한테도 싸울 기회를 주면 안 될까? 계속 숨어 있기만 할 수는 없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네 마음은 잘 알아.”

“…….”

노엘은 낮게 중얼거리며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어서 들어가라는 턱짓을 정중하게 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위험해. 우린 모두…… 여기서 죽거나 끌려갈 거야. 최대한 싸워 보긴 할 테지만, 말은 안 해도 다들 패배를 예감하고 있어.”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희망과 활기가 넘치지 않았었나?

모두를 한 번씩 둘러보았는데, 그 말을 듣고 나서 보니 어쩐지 아까보단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결의를 단단히 다지는 것 같으면서도 두려운지 녀석들에게서 불안감이 엿보였다. 이게 왜 지금에서야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너까지 휩쓸리게 할 순 없어.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내 뜻대로 해 주면 안 될까.”

“노엘…. 그게 무슨 말이야. 공격에 대비한다며!”

“우린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리사, 너도 포기해선 안 돼. 네 삶을 계속해서 이어 가.”

나는 그에게 떠밀리며 옷장 속으로 갇혔다. 이어서 저항할 틈도 없이 그의 입술이 불쑥 내게 겹쳐 왔다.

그 부드럽고도 다정한 몸짓이 지금 이 상황을 더욱 인정하지 못하게 했다.

“싫어! 노엘, 나도….”

끼익- 덜컥.

옷장의 문이 기어코 닫히고 말았다.

다행히 옷장 아래쪽의 틈새를 통해 밖을 얼핏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틈새로 눈을 바짝 붙여 밖을 주시했다.

“리사, 그동안 내 말은 죽어도 안 들었었지. 약속을 깬 게 한두 번이 아니었잖아.”

내가 숨은 옷장 앞에 노엘이 등을 딱 붙이고 섰다. 틈새로 그의 옷자락이라도 매만지고 싶었지만, 틈이 좁아 손가락도 넣기 힘들었다.

“노엘…, 제발 무사할 거라고 말해 줘.”

두려움이 모래 위로 떨어진 빗물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최근에 꾸었던 그 꿈이 정말 예지몽이었나 싶어 더욱 떨렸다.

“이번만큼은… 정말 이번만큼은 내 말 좀 들어줘.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지 말기로. 약속해.”

정말 이대로 그 꿈처럼 돼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한동안 가족같이 지내던 이 녀석들은 또다시 그 끔찍한 일들을 당하게 되는 건가?

영영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곳을 헤매게 되는 걸까?

“누나! 약속해 줘. 거기서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멀리서 리마가 소리쳤다. 저렇게 귀가 밝은 녀석이었나. 그러자 방 곳곳에서 내게 외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이번엔 말 좀 제발 듣자. 노엘 가슴이 새까맣게 다 타 버리겠어. 우리가 지켜 준다잖아!”

문을 지키는 알프레드의 걸걸하면서도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

“맞다. 리사는 여기서 제일 연약한 존재다. 숨어 있는 게 현명하다.”

데릭은 어디서 구한 건지 끝이 둥글게 휜 쌍검을 들고 있었다.

“언니는 제가 지켜요! 이 타란티나가! 그러니 다음에도 꼭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노엘 다음으로 가까이 있던 타란티나는 푹신푹신한 침대를 벗어나긴 싫었는지 그 위에서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이어서 베키와는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물론 밖에서는 이 옷장의 틈새 속이 안 보일 것이다.

그런데도 베키는 작게 미소 지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무슨 말을 전하려 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약속하는 거다?”

어쩌면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는 말을 주고받고 나니 노엘이 다시 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질문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았어. 약속할게. 여기서 나가지 않을게. 대신 다들 제발 무사해 줘. 꼭!”

이렇게 간절하게 누군가의 무사를 기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안전하길 바라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만큼 나 역시 그들이 무사하길 바라고 있었다.

쩌저저적. 쩌저저저적.

결계가 찢어지는 소리가 한층 더 크고 굵어졌다.

노엘은 여전히 옷장 앞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붉은 보석을 찾아다니고 있었다며.”

“어? 그걸 어떻게….”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베키한테서 다 들었어. 이곳을 탈출하려면 그게 필요하다면서.”

“……응.”

나는 가슴 한구석이 쓰리다 못해 고통스럽게 아파져 오는 걸 천천히 받아들여야 했다. 내 탈출 계획을 알게 된 그가 어떤 마음일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만일 잘못된다면…… 반드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 알았지?”

“뭐?”

“모두 끌려가게 된다면 너는 곧장 붉은 보석을 찾으러 가. 그땐 이쪽 동은 한산해질 거니까.”

“뭐야. 왜 그런 말을 해.”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을 말하는 것뿐이었지만, 그 만약의 일이 필연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공격을 준비하는 녀석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나는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게 바로 네가 원하던 거였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잖아. 지금.”

나직했던 노엘의 목소리에 괴로움이 한가득 묻어났다. 나는 그의 괴로운 마음을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영원히 함께 있자고 할 땐 언제고! 이제야 나더러 순순히 돌아가라는 거야?”

“그래야 네가 살 수 있으니까!”

“…….”

“우리가 잘못되면 여기서 혼자 어떻게 견디려고 그래. 그러니까 기회 줄 때 돌아가라고!”

괴롭다 못해 슬픈 목소리였다. 그의 가슴 찢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집착했는데 떠나보낼 각오까지 하는 걸 보니, 문밖의 괴물은 얼마나 더 대단한 존재라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괴물들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노엘이 아프게 되는 것이 끔찍했다.

나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며 정신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언성을 높였던 노엘은 다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리마가 책을 읽더니 그러더라고. 사랑한다면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참 진부한 말이야.”

나는 울먹임을 그에게 들킬까 봐 그저 듣고만 있었다.

쩌저저적. 쩌적쩌적쩌적.

이젠 보이지 않아도 결계가 곧 깨지기 직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방금 막 깨졌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소리였다.

“솔직히 전혀 이해가 안 돼. 그리고 동의하지도 못하겠어. 내가 보기에 그건 사랑이 아닌 것 같거든.”

“…….”

“리사, 나는… 내가 죽어야 비로소 널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야 나 없는 네 행복을 빌어 줄 수 있어. 난 그런 놈이야. 그런 놈한테서 벗어나려면 기회 줄 때 놓치지 말고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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