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나는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저 호흡에만 집중하고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았다.
조금씩 진정될 때마다 노엘의 모습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 발각되는 즉시 철퇴 엔딩을 맞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내가 진정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 흐름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었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이제 나를 찾아냈으니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달콤한 소리조차 하지 않겠지.’
이런 상황인데도 몹시 억울하고 속상했다. 그의 사랑만 거짓이었겠나. 내 사랑도 허상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내게만 보여 주었던 그의 모습을 이젠 볼 수 없게 돼 버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적극적이고 열렬한 하루하루를 지낼 걸 그랬다.
후회했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할 일 없이 보낸 건 아니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건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노엘….”
어쨌거나 내 게임은 여기서 끝나나 보다.
그런데 어째서 여전히 같은 눈빛으로 날 보고 있는 건지. 왜 그런 눈으로 내게 손을 뻗어 내미는 건지.
아직도 날 속여야만 하는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리사, 이제 돌아가자.”
나를 안심시키는 다정한 눈빛과 꼬리 내린 가지런한 눈썹이 내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무엇이 괜찮은 건데. 이젠 솔직해져도 되잖아.
“노엘, 이제 내게 숨기지 않아도 돼. 네가 내 정체를 알게 된 거 다 알아. 아까 숨어 있다 들었어.”
“…….”
“그러니까 더는 날 안심시켜서 손쉽게 처리할 생각 하지 않아도 돼. 그만 끝내자. 나도 힘들어서 이 이상은 못 하겠어.”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었다. 어딜 가든 숨바꼭질은 끊이질 않을 것이고 내 두려움만 커질 뿐이었다.
이 상태로는 붉은 보석의 이야기를 진행하기에도 불리했다.
결국 처음부터 지금까지 난 독 안에 든 쥐였다. 여전히 생에 대한 미련은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지쳤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쳤다기보다도 의욕을 잃은 것 같다.
노엘이 나에 대해 다 알아 버렸다는 사실에 대해 왠지 모를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숨고 싶은 순간일지도 몰랐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스럽다.
내 입으로 그에게 정체를 말했더라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잔인하게도 그러고 싶었던 순간 내게 기회는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안심시켜서 손쉽게 처리하려 하다니……. 지금까지 넌 날 그런 놈으로 보고 있었던 거야?”
“정말 미안. 언젠가 네게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네.”
노엘은 여전히 손을 뻗은 채로 두 걸음 더 다가왔다.
바로 앞에 그의 쫙 편 손바닥이 당장 손을 내놓으라는 듯 버티고 있었다.
이제 이 손을 잡으면 꽉 잡혀서 도망치지도 못하겠지. 어차피 손을 안 잡아도 도망치긴 글렀지만, 그에게 순순히 한쪽 손을 내어 주었다.
그러니 생각보다도 엄청난 힘이 내 손을 조여 왔다. 그의 단단한 손아귀에 온몸이라도 붙잡힌 듯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제 포기하겠다는 건가. 순순히 내게 목숨을 내어 주겠다. 이거야?”
나는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지막엔 좋았던 기억만 안고 가고 싶었다. 무섭고 험악한 노엘의 얼굴이 아닌 다정했던 얼굴만 기억하고 싶었다.
“네가 사랑한 건 내가 아니잖아. 누구보다도 네가 이 몸의 주인을 사랑한 걸… 잘 알고 있어.”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아는데.”
“그래서 너도 처음에 날 쫓아온 거였잖아. 이 몸을 돌려놓으려고. 나도 이젠 다 알고 있으니까…, 네 본심을 숨기지 않아도 돼.”
“그래…. 이제 내 본심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구나.”
달콤하고도 살벌한 목소리에 놀란 나는 의도치 않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껏 내가 보지 못한 그의 표정은 더 이상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만했던 모양이다.
이토록 날 안정시키는 미소가 또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또 장르가 바뀌어 버릴 줄은 몰랐다.
“그럼 숨김없는 본심으로 네게 말할게.”
“응…?”
“너를 사랑해.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 이보다 더 사랑한 적이 없을 만큼.”
“…….”
그가 내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간절한 눈동자가 끊임없이 내 눈을 마주치며 달라붙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지켜봐 달라는 듯 애원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혼란스러워 그저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어째서 다 알고도 날 여전히 사랑한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노엘, 나는 네가 아는 리사가 아니라니까? 지금 이게 무슨…….”
“다 안다고 했잖아.”
“아는데도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대체 언제부터?”
“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네가 옷장 속에 숨은 걸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뭐…?”
당황스럽다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단어가 필요했다.
그가 처음부터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날 아는 척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먼저 속인 쪽은 내가 아니라 노엘이었다는 것이 된다.
‘내가 원래의 리사인 척하도록 눈감아 주고 있던 게 노엘이라니. 이게 무슨…….’
나는 어느새 다른 의미로 억울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아직도 그를 이해하려면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가슴이 흥분해선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내게 했던 행동들이 모두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조차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였다.
이 사실에 긴장이 한꺼번에 풀어지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제 안심해. 난 널 포기하지 않아.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건 지금의 너야.”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자길 희생시키려 하면서까지 좋아했던 그녀가 아니었나.
“그러니까 너도 날 쉽게 포기하지 마. 나를 좋아하잖아.”
“…….”
“지금까지 네가 날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네 행동에서 무엇이 진심이고 거짓인지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그를 속인다고는 했지만, 정말 속아 넘어간 건지는 나도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속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눈먼 사람처럼 더는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의심해도 얕은 물에서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스스로 눈을 막고 생각을 차단해야,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결코 널… 우습게 본 건 아니었어.”
“너라면… 날 우습게 봐도 상관은 없어.”
이윽고 활짝 열린 내 손바닥에 그가 도톰한 입술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번에도 내 눈에 맞춘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숨을 들이켤 때만큼은 잠시 내리깐 그의 풍성한 속눈썹을 볼 수 있었다.
“……그… 좀 더러울 텐데. 먼지가 묻었을지 몰라.”
결코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간질간질한 감정을 견디지 못하겠는 걸 어쩌겠나. 이런 나 자신에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손에서 얼굴을 뗀 노엘이 살짝 풀린 눈으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 먼지… 깨끗해지게 내가 다 청소해 줄까.”
그가 내 손바닥을 다시 제 입술로 가져다 대려는 순간, 나는 경악해서 손을 빼내려 몸부림치며 안간힘을 썼다.
“아, 아니! 됐어. 됐다니까!”
“왜 더럽다며. 내가 다 닦아 준다니까.”
“괜찮다니까!”
노엘은 계속해서 내 손을 살짝 내민 제 혀끝에 가져가려 시도했고,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이리저리 휘둘러 못 가져가게 막았다.
그러다 보니 정말 닿을 것 같던 순간이었다.
“노엘! …… 리사…?”
문 쪽에서 누군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왔고,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토드였다.
이 방에 노엘만 있는 줄 알았는지 나를 보고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노엘은 방해받아 김이 팍 새었다는 듯 차게 식은 눈으로 토드를 응시했다.
“리사는 방금 막 찾은 참이야.”
덕분에 그가 쥐던 내 손목은 자유로워졌지만, 다시 맞잡은 손은 어느샌가 깍지까지 끼고 있었다.
토드는 그 손에 유난히 집착적인 시선을 두는 눈치였다.
“찾았으면 어서 돌아가자.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아래에서 방금 이상한 진동이 울렸는데, 나만 느낀 건가?”
“여기선 그런 느낌은 없었지만…. 어쨌든 얼른 돌아가야겠지.”
토드가 따가운 시선이라도 보내면 어쩌나 했는데, 나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길래 조금 의아했다.
상황이 다급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좀 부드러워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서 가자.”
우린 복도로 나가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중앙 계단에서 괴물들을 마주칠 확률이 몹시 높긴 했지만, 노엘과 토드가 함께 있으니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든든한 느낌에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었는데 다행인 건지 중앙 계단은 한산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하네. 이렇게 깨끗할 리가 없는데.”
토드는 다행스럽다고 여기면서도 불길한 예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악!”
“리사!”
5층 계단을 오르던 중, 둘의 속도에 무리해서 발걸음을 맞추느라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즉시 중심을 잃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는데 노엘이 내 허리에 팔을 휘감아 지탱했다.
내 오른쪽에 있던 토드도 허공을 휘젓던 내 팔을 붙들어 주었는데, 내가 중심을 잡은 이후에도 그는 팔을 놓지 않았다.
“방에 도착할 때까지만.”
토드는 눈을 피하며 그 한마디만 중얼거릴 뿐 다른 말은 없었다.
그렇게 두 남자 사이에서 열심히 계단을 올라, 드디어 우린 노엘의 방이 있는 6층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