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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83화 (83/145)

83화.

우리는 거울을 통해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찰랑.

철퇴의 쇠사슬이 마찰했다. 내 위치를 파악한 노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거울 속에서 벗어나자마자 정신이 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런…!’

내 쪽으로 달려드는 그를 피해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중앙 계단 쪽으로 뛰어갔는데 하필 붉은 괴물들이 우르르 올라가고 있었다. 이대로 갔다간 괴물들의 먹이가 될 게 뻔했다.

그래서 재빠르게 방향을 돌려 근처 실험실로 들어갔다.

마치 병실 같은 곳이었다.

수십 개의 침대가 양옆으로 놓여 있었고, 침대 하나마다 커튼이 빙 둘러져 있었다.

‘노엘이 내가 이곳에 들어온 걸 봤을까?’

그가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대한 안쪽에 있는 침대의 커튼 안으로 몸을 숨겼다.

나를 둘러싼 커튼 속이 안락하면서도, 밖이 보이지 않아 상당히 불안했다.

‘침대 밑은 너무 뻔하잖아.’

침대 밑에 들어가 숨어 버릴까 고민도 했지만, 어차피 노엘이라면 침대 밑도 확인해 볼 것이다.

침대 밑에 있다가 들키면 오히려 도망가기도 더 힘들 테니 차라리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게 낫겠다.

‘입구 쪽에 있는 곳들부터 확인하겠지?’

그가 다가오면 다른 침대의 커튼으로 계속해서 옮겨 갈 생각이었다. 안 들키게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터벅터벅. 끼이이익.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사, 여기 들어오는 거 다 봤어. 이 커튼 사이 어딘가에 있겠구나.”

꿀꺽. 마른침이 숨넘어가듯 넘어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며 차분히 정신을 집중했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아깐 그런 모습을 보여 미안했어.”

그런 모습이란 상자를 부수고 다니던 것을 말하는 듯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잔잔하게도 들려왔다.

“그걸로 네게 실망을 안겨 줬을까 봐 걱정돼. 차라리 놀란 만큼 날 마음껏 탓했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더 무서웠다. 오히려 그땐 몰래 움직이기에 상자 부수는 소리가 아주 도움 되었다. 그에게 실망하고 말고 할 처지도 아니었고.

아무튼 이 가라앉은 고요함이 매우 무섭다. 조금만 소리를 내도 그가 나를 찾아낼 것 같았으니까.

차라리 여기서도 더 부수라고 상자를 던져 주고 싶었다.

“절대 네게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안심해.”

안심하라니……. 다 알고도 나한테 화가 나지 않았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날 끌어내려는 함정이 분명해 보인다.

“무서워하지 말고 그만 나와 주지 않을래?”

저 앞쪽의 커튼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커튼을 열어 보기만 할 거란 건 고작 내 편협한 상상일 뿐이었다.

별안간 우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튼이 뜯겨 내리는 굉음이 울렸다. 천장에 붙어 있던 커튼레일이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바닥에 힘없이 나뒹굴었다.

“이렇게 커튼을 다 뜯어 놓으면… 네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지겠지?”

나는 아찔한 정신을 부여잡고 간신히 맨 뒤의 침대로 옮겨 갔다. 커튼 속으로 들어와선 이제 어떡해야 할지 몰라 손톱을 물어뜯었다.

서서히 목이 죄어 오는 느낌에 어깨가 서늘하게 떨려 왔다.

그사이에도 몇 개의 커튼이 머리채 쥐어 잡히듯 뜯겨 나가고 있었다.

‘방법이… 방법이 없어.’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딱 한 가지가 있긴 했다. 노엘이 커튼을 뜯는 사이 달려 나가 도망치는 것.

하지만 나가다 잡힐 수도 있는 위치였다. 게다가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또 숨을 곳을 찾아 들어가야 할 것이었고, 그 일이 무한 반복될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토드가 돌아올 때도 된 것 같다.

‘정말 최악이구나.’

하필 이런 때에 의문의 목소리마저 잠잠했다.

“이제 커튼이 다섯 개 남았어. 이래도 나오지 않을 거야?”

더 이상 벌 시간도 없었다. 그가 근처에서 커튼을 뜯어 내리자 거친 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하나씩 무너질 때마다 내 머리털이 뜯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으아아… 제발…….’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오는 건지.

“나와 겨우 그 정도 함께 지낸 걸로는 부족하지 않아?”

…….

“나는…… 아직도 한참은 부족한데.”

‘아니, 왜 또 로맨스 쪽으로 장르를 바꿔 먹는 거야. 지금 누가 봐도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이대로 우리 둘만의 시간을 멈출 순 없어. 아니, 멈추지 않을 거야. 절대.”

역시 속임수겠지. 내 정체를 알게 된 걸 모르는 척하기로 한 모양이다.

근데 노엘이 그렇게 간교하고 악한 녀석이었나?

문득 뇌리를 스친 의문이 다시 가슴을 뛰게 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노엘이 그런 잔인한 남자였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모두 거짓말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이보다 잔인한 실연이 있을까 싶은 정도다. 차임과 동시에 죽임까지 당해야 하니 말이다.

그의 성정이 어떻건 간에 섣불리 그를 믿을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나와 영원히 함께한다고 했잖아.”

촤르륵!

그 말과 동시에 내 눈앞의 커튼이 레일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순간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장막이 걷히듯 쏟아지는 커튼과 함께 몸이 바싹 굳어 버렸다. 뼛속까지 발가벗겨지는 듯한 감각에 놀랄 틈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커튼을 야무지게 짓밟은 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 더는 도망 못 가.”

***

마지막으로 살펴볼 곳을 둘러본 토드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복도를 거닐었다.

여기도 없는 걸 보니, 지금 노엘이 있는 곳에 리사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참이었다.

발걸음에 속도를 붙인 그는 노엘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

“너, 설마 진짜 모르고 있던 건 아니지?”

토드가 그녀의 정체를 폭로한 직후였다.

사실 당장은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어쩐지 조바심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뭘 자꾸 모른다는 건데.”

토드는 답답했다. 노엘이 자꾸 말을 하길 꺼리는 듯하여 더욱 그랬다. 게다가 그는 대화에 집중하기보단 그녀가 어디 있나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결국 노엘의 멱을 잡고서야 그의 시선을 온전히 빼앗을 수 있었다.

“리사의 몸에 다른 녀석이 들어가 있다고 말했잖아.”

“그 입 닥쳐.”

“뭐야…?”

“닥치라고.”

“너… 역시 알고 있었어?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던 거지?”

노엘은 아주 불쾌한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처음부터.”

토드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혼란스러웠다.

그가 모르고 있을 리 없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곤 있었지만, 알고도 방치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알면서도 지금 그걸 감싸 주는 거야?”

“그거라니. 말했을 텐데. 내 연인이라고.”

토드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미친 건가. 리사가 마음을 받아 주지 않으니 이젠 몸만이라도 취하겠다는 거야? 그 안에 다른 혼이 들어 있는데도?”

얌전히 잡혀 있던 노엘이 새빨간 눈을 번뜩였다.

순간 그가 강력한 힘으로 방심한 토드의 멱을 잡다 못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크윽! 뭐 하는 짓이야.”

그대로 토드 위에 올라타선 그의 옷깃을 부여잡고 분노를 참지 못해 손을 떨었다.

“닥치라고 했지! 그 입 다물라고 했잖아.”

토드는 그제야 노엘이 일부러 그녀에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근처에 그녀가 숨어 있다면 들었을 것이다. 노엘에게 자신의 정체가 밝혀졌다는 것을.

하지만 노엘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길 원치 않았다.

그건 그렇다 치자. 지금 그가 어째서 이토록 절망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토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어서 돌아온 건 관자놀이의 핏대가 도드라진 노엘의 원망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

노엘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금방이라도 감정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숨기려고… 모르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

토드는 처음으로 그의 눈물을 맞이했다.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가 얼마나 그녀를 원하는지 그 모습 하나만으로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다.

“그런데 네가 그걸 지금 다 망쳐 버렸어….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감히…!”

“못 들었을 거야.”

“뭐야?”

“이 근처에 리사가 있었다면 진작 찾았겠지. 그러니까… 못 들었을 거라고. 내가 너한테 정체를 까발린 것을.”

젠장.

“…반드시 그래야 할 거야.”

“그렇다고 해도 언젠가는 알게 될걸.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일이야.”

“때가 되면 리사가 알아서 얘기해 줄 거야.”

“그 녀석이 널 좋아하는 척 속이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네 호의를 사서 연명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잖아.”

토드는 사실 그녀를 그렇게까지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녀가 노엘을 좋아하는 건 진심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것마저 곧이곧대로 알려 주긴 왠지 싫었다. 방해하고 싶은 복잡한 기분에 놓인 것이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괜찮아. 리사가 원하면 난 얼마든지, 그 무엇이든지 알아도 속는 척해 줄 수 있어.”

기가 막히고 숨도 막힐 지경이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냐는 눈으로 쏘아보았지만, 노엘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괜찮다니… 지금 네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정신 차려.”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넌 신경 꺼.”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어. 나도 리사를 되찾아야 하니까.”

“포기해.”

“너라면 포기할까?”

“안 하지.”

그 물음엔 노엘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했다.

“노엘, 제발 리사를 되찾게 해 줘. 제발……. 네 친구기도 하잖아.”

노엘은 그의 간곡한 부탁에 잠시 고심했다. 결국엔 내키지 않아도 타협점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내게 시간을 좀 줘. 그녀가 죽지 않고 리사의 몸을 떠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그럼 정말 그녈 그 망치로 쫓아내야 속이 시원하겠어? 지금껏 잘도 망설여 왔잖아. 어차피 넌 그럴 수 없는 놈이야.”

“제길!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넌 원래 그런 놈이라니까. 네가 망설이지 않았다면 난 이미 널 내 손으로 끝냈겠지.”

“후우…. 알았어. 알았으니까… 정 그렇다면 반드시 알아내야 할 거야.”

“……그때까진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있어 줘. 그럼 정말 고맙겠어.”

“기다려 준다니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될 것을.”

노엘과 토드는 둘 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빙의자가 현재의 몸을 떠나 살아남는 방법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노엘이 토드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지금의 그녀가 죽든 살든 끝은 결국 이별뿐이었다.

서로가 다 알고 있는데도 이런 약속을 한 것은 상황상 일단 휴전하자는 의미였다.

***

“아니면… 내가 좋다고 한 건 모두 거짓이었어?”

분명히 이 커튼은 마지막이거나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뜯겨야 할 커튼이었다.

하지만 노엘은 내가 숨은 곳을 알고 있었다는 듯 주위의 커튼을 남겨 놓은 채 이곳으로 직진해 왔다.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니 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고 말았다.

“왜 말이 없어…?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건데. 무슨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나는 유난히 크게 떨리는 오른팔을 꽉 붙들었다. 이내 참았던 숨이 한계에 닿았는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헉. 허억. 허억…….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려고 쉬는 숨임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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