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숨결이 이렇게 시리도록 차갑기도 힘들 것이다.
날 무시하고 위로 올라가 준다면 다행이었으나, 내 얼굴에 대고 숨을 내쉰 정체 모를 녀석은 앞에서 꿈쩍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내 앞에서 멈추어 선 채 계속해서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도 조금 쉬다 보니 다시 기운이 나 용기를 내어 사다리를 하나 올랐다.
내가 눈을 감은 채로 한 칸 올라가자 앞의 숨결도 한 칸 따라 올라왔다.
‘뭐야. 따라오는 건가?’
그렇게 또 한 칸을 올랐더니 숨결도 역시 따라서 올라왔다.
계속 그런 식으로 올라가던 중, 다시 땀도 나고 숨이 차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자칫 땀 찬 손으로 잘못 올랐다간 미끄러져서 저 아래로 떨어지는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날 따라 오르던 녀석은 여전히 내 앞에서 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같이 사다리를 올라서 그런지 그새 정이 든 것 같다.
이젠 무섭지도 않았고 되레 내 앞에 뭐가 있는 건지 궁금한 지경에 이르렀다.
공격도 안 하는 걸 보니 어쩌면 나쁜 짓을 일삼는 녀석은 아닐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어 결국 눈을 살며시 떠 보았다.
“…….”
눈앞의 신비로운 생명체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아까 봤던 단팥묵 모양의 괴물이랑 똑같았다.
해괴하게 웃고 있던 그 녀석과는 달리 이 녀석은 울상인 얼굴이었다.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져선 당장이라도 굵은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녀석이 안쓰러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얼굴로 계속 날 쳐다보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얘랑 같이 있으면 누가 봐도 내가 울리려는 걸로 보일 것 같아.’
“너, 말할 수 있어?”
내 물음에 녀석은 도토리묵 같은 몸을 꼬며 도리도리 저었다. 아쉽게도 말은 할 수 없는 생명체인가 보다.
“그래도 알아들을 수는 있나 보네.”
녀석은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끄덕였다.
나는 한 칸씩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녀석도 엉금엉금 따라왔다. 저런 얼굴로 따라오니 너무 귀여워서 당황스러웠다.
“이름이 있을까?”
같이 가는 김에 말동무라도 생긴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녀석에게 말을 걸게 되었는데, 녀석은 원래 이름이 없는지 윗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름이 없구나….”
이름도 없는 존재들이 이런 어두운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니 어쩐지 쓸쓸해져 단팥묵 녀석이 떠올랐다.
‘그럼 그 녀석도 이름이 없었던 거였구나. 이름 지어 주길 잘한 것 같아.’
말동무와 함께 사다리를 오르니 아까 전의 슬펐던 생각도 조금은 사그라든 것 같았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도토리묵이야. 아니, 좀 줄여서 토리묵이라 하자.”
그냥 처음 녀석을 보자마자 떠올랐던 음식이었다. 예쁘게 잘라 놓은 도토리묵 같은 형태.
절대로 아무 생각 없이 지은 이름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다행히 녀석도 마음에 드는지 미친 듯이 몸을 앞뒤로 접어댔다. 그러다 사다리가 심하게 흔들거려 부러지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
“그, 그렇게 움직이면 위험하다고.”
토리묵을 진정시키려는데 어느새 머리 위에 문이 닿아 있었다.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하니, 노엘과 토드는 그사이에 다른 곳으로 가 버린 모양이다.
나는 살았다고 숨을 토해내며 그대로 나와 털썩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다리 아파 죽는 줄 알았어.’
사다리 통로의 문을 닫으려 했는데 녀석이 머리만 빼꼼 내밀어 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토리묵, 안 나올 거야?”
각진 네모 얼굴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기다란 막대 같은 팔을 뻗어 문을 스스로 닫으려 했다.
“거기 혼자 있으면…….”
쓸쓸하지 않나. 그건 나만의 생각인 걸까.
생각한 순간 토리묵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았다. 토리묵은 다른 팔을 꿀렁거리며 내게 흔들었다.
잘 가라는 의미로 보였다. 내 생각보다도 훨씬 씩씩한 녀석들인가 보다.
“그래, 토리묵. 다음에 또 봐.”
아쉬움을 삼킨 나는 결국 이길 수 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인사했다.
“정말 독특한 녀석들이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나는 다시 개인실로 걸음을 옮겼지만 여전히 붉은 보석은 생성되어 있지 않았다.
‘하루는 꼬박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때였다.
밖에서 쇠사슬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름 돋는 마찰 소리가 등골을 깊숙이 후벼 파는 듯했다.
나는 당장 제일 가까운 개인실의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사다리가 있는 쪽으로 다시 가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끼익.
역시나 빠르게 접근한 누군가가 곧장 개인실로 들어왔다.
“분명 여기서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노엘이었다.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토드도 다시 근처로 돌아온 모양이다.
이제 노엘도 내 정체를 알았으니, 나는 필사적으로 둘에게서 도망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토리묵 덕분에 우울한 감정이 좀 가시긴 했지만, 노엘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시 가슴이 쓰라리고 울적해졌다.
노엘이 두리번거리다 침대 밑을 확인하려는지 굽힌 무릎을 땅에 대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손을 바닥에 짚고 머리를 내리려는 순간.
입을 틀어막은 나는 두근대는 심장 소리에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토드의 목소리가 날 살렸다.
“여기! 흔들의자 밑에 비밀 통로가 있어.”
토드가 사다리가 있는 통로를 발견했다. 내가 흔들의자를 옮겨 놓는 걸 깜박해서 자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와, 완전히 들키는 줄 알았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지만 졸아든 심장은 풀어지지 않았다.
‘노엘도 토드가 하려는 일에 동참하게 된 거겠지? 그녀를 되살리려 할 거야.’
둘 사이는 아까보다 확실히 차분하고 협조적인 분위기였다. 둘의 목적이 같아진 게 틀림없었다.
‘그렇겠지. 그렇게 될 수밖에……. 지금 보니 녀석들이 날 퇴마라도 하려는 거 같아.’
노엘이 사다리 통로 쪽으로 가고,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고는 녀석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지 고개를 내밀어 지켜보며 때를 기다렸다.
이내 예상대로 토드부터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노엘도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는데 그의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에 나는 곧장 개인실을 나왔다.
사다리의 끝이 정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그만큼 내려갔음에도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은 노엘과 토드가 다시 올라올 확률을 높여 줄 것이다.
그러니 나도 얼른 안전한 장소를 찾아 숨어야만 했다. 밖으로 나온 노엘은 다시 침대 밑을 확인하려 할지도 몰랐다.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해.’
노엘이 들어가자마자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사다리 통로 안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위로 불쑥 튀어나왔다.
나도 마침 그곳을 계속 주시하며 나온 참이었다. 결국 두더지처럼 목을 내민 두 개의 붉은 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리사!”
딱 걸려선 잠시 몸에 가시라도 돋은 듯 움찔했던 나는 당장 냅다 내달렸다.
그것도 잠시, 녀석들이 금방 복도로 나오겠구나 싶어 근처 실험실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그들이 복도로 진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빨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잘 살펴보니 가운데에 원형의 커다란 유리관과 실험 가동 기계가 빙 둘러 있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네모난 나무 상자들이 주변을 가득 채웠는데, 어딘가 어수선했지만 잡동사니가 많아 숨기에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나는 일단 내 키보다도 높게 쌓인 나무 상자들 틈으로 들어왔다.
‘숨바꼭질은 말만 들어도 이제 토할 것 같아.’
서늘한 정적에 숨도 쉬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리사.”
그렇게 조금 있었을까, 노엘이 금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토드는 다른 곳을 찾는 중인지 이번엔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노엘은 눈에 걸리적거리는 상자를 족족 치워 버렸는데, 상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내는 커다란 소리에 나는 깜짝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리사?”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상자가 와르륵 굴렀다. 어쩌다 잘못 걸린 상자는 그의 발길질에 뿌드득대며 부서지기도 했다.
나는 그가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이동해 몸을 숨겼다.
그러다 보니 더는 숨을 곳이 없어져, 노엘이 거닐고 있는 쪽의 반대편으로 몸을 낮춰 다니기 시작했다.
가운데에 놓인 유리관을 둘러싼 기계들이 내 몸을 가려 주었으니, 빙 둘러서 그와 반대 방향으로 계속 이동하면 발각되지 않을 터였다.
다행스러웠던 건 그의 걸음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도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가능했다.
“여기도 없나. 대체 어디 간 거야…….”
한 번도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철퇴로 애꿎은 나무 상자들을 화풀이하듯 모두 쳐내고 있었다.
와그작와그작 짓밟히는 소리까지 들으니 더욱 긴장되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도 저 상자들처럼 되면 어떡하지.’
괜히 나무 상자에 감정이 이입돼선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가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계속해서 둥글게 기어갔다.
그렇게 한 바퀴 돌았을 때쯤이었다. 앞을 보니 나무 상자의 잔해들이 무덤처럼 쌓여선 가득했다.
“그래, 그렇게 꼭꼭 숨어서 영원히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실험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노엘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는지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도 똑같이 멈춰서 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나한테서 벗어날 기회는 지금뿐일지도 모르니까.”
아직 도착하진 않았지만, 밖에서 가까워지는 토드의 발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갑자기 일이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려 유감이야.”
나는 죄어 오는 가슴에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대어 꾹 억눌렀다.
“그러니까 절대 나한테 들키지 마. 도망갈 거면 확실하게 떠나 버려.”
고인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용납되지 못할 침묵이 흘렀다.
이만 나가려는 걸까. 그가 다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가 나가는 반대 방향으로 겨우 기어갔다.
“저쪽엔 없어. 여긴 다 살펴본 건가? 이런.”
토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니, 차마 들어오진 못하고 입구에서 상자 조각의 무덤을 보며 놀라는 듯했다.
“……다 찾아본 거 확실해?”
“아직 한 곳이 남긴 했는데…. 그건 그렇고 분풀이도 좀 적당히 해.”
“…….”
“……그럼 난 남은 한 곳을 마저 살펴보도록 하지. 넌 여기서 좀 진정이나 하고 나와.”
토드가 노엘과 함께 나갈 것이라 기대했는데 기운이 쪽 빠졌다. 저 혼자만 쏙 가 버리다니. 원래도 원망스러웠는데 더욱 원망스러워진 참이었다.
문이 닫히고 다시 노엘과 나만이 이곳에 있게 되었다.
“리사, 아깐 화나서 떠나 버리라는… 그런 말을 했는데……, 그건 진심이 아니었어.”
노엘이 또 무슨 혼잣말을 중얼거리는가 싶어 귀를 기울이던 중, 나를 비추고 있는 거울에 시선이 닿았다.
“나 스스로한테 화나서 그랬어. 그땐… 네가 정말 여기 있는 줄은 몰랐거든.”
옆 벽에 나를 비추는 거울이 있었고,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의 붉은 눈빛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모든 호흡이 멈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