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개인실 침대 밑을 보니 새삼 데릭이 떠올랐다. 얼마나 자주 다녀갔으면 먼지도 거의 없이 깔끔했다.
‘데릭처럼 여기 들어가 숨을까….’
그러다 아까 침대 밑에서 토드한테 딱 걸린 게 생각나 버렸다. 그러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침대 밑은 좋지 않겠어.’
나는 개인실을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이 닳도록 왔다 갔다 했으니 익숙한 공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뜬금없이 환영 노엘이 앉았던 흔들의자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뒤쪽으로 숨을 공간이 없나 확인하려다 무심코 건드렸는데, 흔들흔들 움직이면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쩐지 바닥이 울린 것 같은 진동에 즉시 멈추고 의자를 살펴보았는데 의자의 목재가 삐걱거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바닥에서 나는 소린가 싶어 흔들의자 밑의 카펫을 살짝 들추어 올려 보았다. 나무 바닥에 조그마한 문이 나 있었다.
‘오…?’
의자를 낑낑대며 조금 밀었더니 문을 열 수 있었다.
끼이익.
“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너무 캄캄해서 계단이 있는지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뻗어 아래를 휘저어 봤는데.
‘분명 이쯤이면 계단이 있어야 할 텐데……. 와… 이거 뭐지.’
일단 내가 생각한 계단은 없었다. 아래가 뻥 뚫려 있었다. 밑은 어디가 끝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계속 이리저리 팔을 휘두르다 보니 철제 막대 같은 것이 만져졌다.
사다리였다. 이곳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게끔 이어져 있는 공간이었다.
‘어쨌든 다행이긴 한 건가…….’
어차피 끝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으니 위급 시 사다리를 타고 조금만 내려가 잠시 몸을 숨기는 것도 괜찮겠다.
흔들의자의 위치가 앞으로 조금 당겨지긴 했지만, 크게 달라졌다는 점은 못 느낄 것이었다.
‘급할 땐 나쁘지 않겠어.’
다만 저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꺼려지긴 했다.
흠……. 쓸데없는 걱정일까.
잠시 내키지 않는 마음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이쪽으로 누군가 오고 있었다. 마침 시기도 딱 절묘하게 말이다.
‘이런…!’
그래서 더 고민할 새도 없이 곧장 사다리에 발을 내디뎠다.
내려가서 문까지 야무지게 닫았는데, 문틈에 작은 돌이 언제 끼었는지 아주 작은 틈이 생겨 버렸다.
어지간하면 다시 열었다 닫았겠지만, 이 정도는 눈치도 못 챌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 작은 틈 사이로 밖을 엿볼 수 있으면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발밑의 싸늘한 공기가 스멀스멀 올라와 피부에 차갑게 와 닿았다.
“리사?”
노엘의 목소리였다.
터벅터벅.
노엘만 있었다면 당장 뛰쳐나갔을 텐데. 또 하나의 발소리가 성큼성큼 가까워졌고, 예상대로 토드란 걸 알 수 있었다.
‘그새 둘이 화해라도 한 건가?’
“리사, 혹시라도 여기 있다면 계속해서 잘 숨어 있어야 할 거야.”
‘으윽……. 아직 진행 중이구나.’
토드의 살벌한 음성에 나는 어깨를 웅크리고 매달리듯 사다리를 꽉 껴안았다.
“너 그만하지 못해?”
둘은 여전히 냉전 상태였다. 나를 찾느라 잠시 몸싸움을 중단한 모양인데 평화로운 타협점은 찾지 못했나 보다.
“너야말로 이제 애들한테 돌아가. 리사는 내가 지켜.”
“뭐…, 지켜……? 그 망치로?”
노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하나뿐인 내 연인이니까.”
“토드, 말은 바로 해야지. 지금은 내 연인이야.”
“갑자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둘은 각자 중얼거리며 나를 찾아 근처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두 발걸음 모두 빠릿빠릿하게 분주히 움직였다.
“갑자기라니? 내가 리사의 마음을 얻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강제로 가둔 것도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리사를 강제로 데려갔던 네가 할 소린 아니지. 생각하니까 또 화가 나네.”
몸싸움을 안 하니 이젠 말싸움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이 주변의 문이란 문들은 모조리 열고 닫기 바빴다.
“노엘, 설마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건 아니겠지? 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
갑자기 들려온 말에 불안감이 급격히 밀려들어 왔다. 이대로라면 토드가 내 정체를 노엘에게 말하겠구나 싶은 분위기였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물씬 감돌았다. 갑자기 왜 대화가 그런 방향으로 가 버린 건지 모르겠다.
입술 아래로 유리알 같은 땀방울이 맺혀 또르르 떨어졌다.
‘설마…… 설마!’
“알아보긴 뭘 알아봐. 그 입 다물어.”
“……알려 줄까? 지금 네가 모르고 있는 것.”
‘설마. 토드… 안 돼. 제발……!’
“하나도 안 궁금해. 내가 모르는 건 아무것도 없어.”
“리사랑 나만 알고 있는 건데? 너도 알고 싶지 않아? 그녀가 너에게만 비밀로 하는 것.”
이렇게 나와 노엘의 사이를 갈라놓을 셈이었나? 아주 그냥 물어보지 않아도 친절히 알려 줄 기세였다.
사다리를 쥔 손에 미지근한 땀이 찼다. 미끈거리는 감촉과 비릿한 쇳내가 불쾌하리만치 지독하다.
“들어도 내가 리사한테 직접 들을 거야. 그러니 넌 제발 그 입 좀 닥쳐.”
‘내게 직접 들을 거라니…….’
노엘의 말을 들으니 그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다시금 강하게 솟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다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토드가 모든 사실을 말하고 나면 변하겠지. 토드와 함께 손잡고 원래의 그녀를 되찾으려 할 것이다.
그럼 더는 내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니게 되겠지.
‘틀렸어…. 이젠 절대 노엘이든 토드든 붙잡히면 안 돼.’
“지금 리사의 몸에 다른 녀석이 들어가 있어.”
개인실 앞으로 모인 두 남자의 발이 동시에 우뚝 멈추어 섰다.
“…….”
결국 노엘이 다 알아 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충격받았으면 말도 못 하고 저러고 있을까.
“이제야 관심이 생겼어? 더 자세히 설명해 줘?”
“…….”
더는 노엘의 반응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살금살금 내려가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가 후들거리니 거동이 썩 편치 못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차피 앞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내려가다 보니 노엘과 토드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왔다.
제법 오래 내려온 느낌이었는데 아직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힘에 겨워 잠시 멈추어 선 나는 다시 사다리를 끌어안고 숨을 골랐다. 그사이 눈물도 말라 굳어 버렸다.
‘노엘과도 이제 끝이네. 더는 마주 볼 일도 없을 거야. 그래서도 안 되고.’
지금쯤 충격받아 혈안이 되어선 날 찾아다니고 있겠지. 그 철퇴를 들고 다니면서.
거기다 이젠 노엘까지 합세했으니 둘한테 쫓기게 된 셈이었다. 철퇴에 쇠망치까지.
둘 중 무엇에 맞아 죽겠냐고 물어본다면…….
‘아니, 그건 아니지! 그럴 순 없어. 정신 차리자. 기운 내야 해.’
나는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게 무슨 나약한 정신 상태람!’
어차피 여기 평생 갇혀 살 것도 아니었다. 지금 와서 내 목적이 변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노엘과의 연애는 짧았지만 무섭기도 했었고, 즐겁기도 했었고…, 행복하기도 했었다.
그래, 어차피 돌아갈 내겐 그걸로 충분했다.
애초에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는 남자였다. 내 취향을 가득 담은 남자. 하지만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라 더욱 치명적인 남자.
그런 남자와 잠시라도 같이 지낼 수 있어 행복…….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왜 또 방향이 이렇게 흘러가는 거야.’
갑자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나 왜 자꾸 실연당한 사람처럼 정리하고 있는 건데….’
가슴이 꽉 죄어 왔다. 말벌한테 한 군데만 여러 번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쓰라렸다. 결국 그 부분만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생각보다도 내가 그를 많이 좋아했던 건가.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이 그 정도를 증명하고 있었다.
노엘한테 직접 말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려나 보다.
한껏 쓰라리던 가슴속에 커다란 무언가가 콱 맺혀 버린 것 같아 답답해지고 말았다.
틱. 틱. 틱. 틱.
‘뭐지?’
아래에서 가볍게 톡톡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다리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아래쪽에서부터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진동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가 올라오는 건가?’
나는 엉겁결에 떠밀리듯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틱. 틱. 틱. 틱.
‘뭐, 뭔데…….’
그저 열심히 사다리를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정체 모를 존재와 피할 수 없는 어둠 속 사다리 위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차게 식었던 땀들이 뜨겁게 데워졌다. 하필 올라가는 사다리는 끝도 없었다.
‘도대체 난 얼마나 내려왔길래 끝이 안 보이는 거야!’
끙끙거리며 오르는데 점점 체력이 급속도로 저하되는 것이 느껴졌다. 목구멍에서 쇠 맛이 올라와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헉헉…….”
미치겠다.
틱. 틱. 틱. 틱.
멈추면 안 되는데, 더 이상 다리가 다음 칸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발가락에 아무 감각도 들지 않는 걸 보니 쥐라도 난 것 같았다.
간지러운 소리가 더욱 가까이 올라오자 사다리를 타고 있는 무언가의 무게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묵직한 무언가가 사다리를 하나씩 일정한 속도로 올라와 이제 곧 마주치겠다 싶어질 때였다.
나는 그대로 사다리를 꽉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 제발… 제발요….’
나를 발견한 무언가가 바로 아래에서 오르기를 멈추었고,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잠시 멈추었던 무언가는 내 앞으로 이동해 다시 올라오길 시도했다.
나는 무언가의 반대쪽에 있었으니, 내가 밟고 있는 곳을 피하면 올라올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제발 이대로 지나가 주길 바라면서 눈을 더욱 꼬옥 감았다.
‘제발 이대로 그냥 지나쳐 가길…….’
가만히 쥐 죽은 듯 기다리니 내 얼굴까지 올라온 무언가가 멈추어선 숨을 내쉬었다.
퓨-우.
‘흐아악……?!’
그 긴 숨결이 내 얼굴에 흩뿌려지니 목덜미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쫙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