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러다 문 근처쯤 왔을 때, 후다닥 빠르게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안에서 넘어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둘 다 나를 보지 못한 것 같다. 실험실에서 멀어진 나는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달렸다.
노엘과 토드가 서로 싸워 봤자 누구 하나 죽겠는가 싶었다. 그 사달이 나려면 이미 과거에 났었어야 했다.
분명 적당히 하고 날 다시 찾으러 둘이 손잡고 나설 게 눈에 선했다. 그러니까 내 코가 석 자란 말이었다.
‘빨리 붉은 보석을 찾아야 해……!’
이렇게 자유롭게 뛰어 본 게 얼마 만인지 속이 다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다.
달리다 보니 토드가 물리친 걸로 추정되는 커다란 괴물이 쓰러져 있었다. 멈춰 있을 시간이 없었던 나는 가볍게 괴물의 팔을 뛰어넘어 피했다.
다행히 다른 괴물은 나타나지 않아 무사히 실험실 아이들의 숙소로 도착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급히 주위를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환영 리사의 개인실로 들어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개인실이 아닌 근처 장식장에 붉은 보석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거칠게 집어 들자 토드의 환영이 나타났다.
방금까지 개인실에서 환영 리사와 함께 있었던 모양이었는데, 어째선지 양팔을 붙들려선 끌려가고 있었다.
-토드. 안 돼! 토드……!-
개인실 안쪽에선 환영 리사의 절규가 새어 나왔다.
환영 토드는 자신이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녀가 걱정되었는지 눈을 떼지 못했다.
노엘이 토드 대신 실험실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텐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연구원들과 토드가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개인실로 곧장 들어갔다.
환영 리사가 침대에서 나오려 했는지 바닥에 떨어져선 주저앉아 있었다. 몇 번이고 스스로 일어나 보려 했지만,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고 있자니 금방 환영 노엘이 들어왔다.
-리사!-
환영 노엘은 신속히 그녀를 들어 올려 침대에 다시 앉게끔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자마자 노엘에게 돌아온 건 가차 없는 따귀 세례였다.
짜악!
타격한다기보단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따귀를 맞은 환영 노엘보다도 놀란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입을 쩍 벌렸다.
-이 거짓말쟁이!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녀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노엘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말일까?
-거짓말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순한 얼굴이었다.
-토드가 실험실로 끌려갔어! 끌려갔다고! 네가 하기로 했는데 어째서 그가 끌려간 거야.-
순간 노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입을 살짝 벌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분명 내일 나를 실험실로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난 노엘의 결백을 확신했다. 내가 그동안 지켜본 녀석은 저렇게 당황해할 녀석이 아니었다.
하지만 환영 리사는 토드가 끌려가니 정신이 이미 저만치 나갔는지 노엘의 멱살까지 잡고 소리를 질러댔다.
-나쁜 놈. 네가 죽었어야 했어. 무조건 네가 가장 먼저 죽었어야 했어!-
가슴 아픈 광경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리사…….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당장 나가서 죽어 버려. 당장 나가서 죽으라고!-
토드를 잃어 겁먹은 그녀만큼이나, 전부를 잃은 것을 넘어 세상을 잃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어쩌면 그가 가장 상처받고 절망스러울 때 이런 표정이 아닐까. 그런 표정을 지금 보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 저런 말을 듣는다면… 정말 죽고 싶어질 수도 있을 만큼 힘들 것이다.
‘이건 아니야. 지금은 충격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걸 거야.’
바라보는 내 심장이 고통으로 두근거렸다. 노엘도 얼마나 충격받았으면 저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을까.
그는 화도 한번 내지 않고 순순히 다른 쪽 뺨도 내어 주었다.
짜악!
봉숭아꽃처럼 물든 그의 양쪽 뺨이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마치 내가 맞는 것같이 가슴이 저릿하다.
한참 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던 노엘은 연구원 하나가 와서야 고개를 들었다.
-네 제안은 소용없게 되었어. 미리 말해 주지 못했군.-
그 말에 노엘은 연구원 쪽으로 고개를 돌려 힘없이 물었다.
-……분명 그땐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황족이었던 몸이라 그런가, 폐하께서 그쪽을 궁으로 초대하려 한다는 얘길 들었어.-
난리를 치던 환영 리사도 지금만큼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운 좋은 줄 알아. 우리 제국의 막내 황녀님이 그쪽의 전시회를 몰래 다녀가셨던 모양이야. 자넬 잊지 못해 남편으로 들이겠다고 폐하를 계속 들들 볶는다는 소문이 있었어.-
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래. 그럼 노엘은 여기서 죽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그렇다는 건… 나는 실험에 쓰지 않겠다는 건가?-
-이제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고. 네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목도 날아가 버릴 거야.-
-리사는…? 리사도 풀어 줄 순 없는 거야? 토드도…! 그 녀석도 함께……, 티나도…… 티나는 어디 있는 거지?-
노엘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한 녀석들의 이름을 하나씩 읊었다.
산만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지만 그의 다급한 마음이 느껴져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티나? 티나라면 이미 실험을 마친 상태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뭐 너도 잘 알겠지.-
노엘은 눈을 부릅뜨며 연구원의 멱을 잡았다. 토드를 노려볼 때보다도 훨씬 살벌한 눈빛이었다.
-어떻게 그 어린아이를……! 어떻게…….-
-이, 이거 놓지 못해? 나도 명령받는 처지일 뿐이라고!-
-그럼 너는 아무 죄도 없다는 거야?-
다시 티나의 실험 현장을 떠올리게 된 나는 가슴을 손으로 여러 번 쓸어내렸다. 그 충격이 다시 올라오지 않도록 가능한 밑으로 쭉 흘러내려 묻었다.
연구원은 노엘의 손아귀에서 겨우 벗어나더니 죄지은 사람처럼 달아났다.
-노엘이 거짓말한 게… 아니었다니.-
환영 리사는 손으로 이마를 짚다 뒤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곤 제정신 아닌 사람처럼 웃어댔다.
-하하. 하하하….-
하지만 내 눈엔 오히려 그녀가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다. 노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인지한 그녀였다.
환영 노엘은 벽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았다. 지탱할 곳이 그곳밖에 없다는 듯 몸을 맡긴 그는 눈을 감고 조용히 울먹였다.
***
그런 상태로 환영들이 사라지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개인실을 빠져나왔다.
기다리다 보면 다음 붉은 보석이 생성될 것이었지만, 답답해져서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차라리 노엘이 혼자라도 살아남았다면 어땠을까. 노엘에겐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을 텐데 말이다. 다시 황족의 신분을 되찾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노엘만은 실험당하지 않고 다시 화려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할 녀석이 아니었다. 어떤 두려움이라도 모두 포용할 것 같은 그의 곧은 눈빛이 아른아른 떠오른다.
‘짜증 나….’
자기가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지. 뜬금없지만 그가 너무 멋있어 보여서 곤란하다.
‘자기 혼자만 멋져 보이려 하니 토드가 화가 날 만도 했겠어.’
괜히 토드까지 끌어들이며 혼자 짜증 내던 중이었다.
순간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어? 그러고 보니… 토드가 어디로 끌려갔더라.’
어쩌면 다음 붉은 보석은 개인실이 아닌 토드의 실험실에 나타날 것이란 생각이 번쩍 든 것이었다.
‘일단 이쪽으로 사라진 건 확실한데….’
토드가 끌려갔던 방향으로 들어가다 보니 그동안 가 보지 않았던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붉은 문이 달린 방이 여기에도 있었다.
손 한 뼘 정도 되는 두께의 무거운 문을 열어젖히니, 곧장 어둠 속에서 작은 보석이 반짝 붉은빛을 냈다.
조심스레 발을 안으로 내딛자 스산한 기운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철컥.
실험실 안쪽으로 들어오자 무서워서 열어 두었던 문이 저절로 닫혔다.
‘뭐지…?’
저 문은 알아서 닫히는 게 아니었을 텐데.
우우우우.
자세히 보니 무언가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그것이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어둠 속이라 그저 새까만 형체가 인영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확실한 건 나보다 키가 머리 두 개는 더 크다는 것이었다.
으스스한 낮은 목소리가 우우- 하며 공명음처럼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하으윽!’
스멀스멀 다가오는 걸 보고 견딜 수 없던 나는 당장 쭈그려 앉아 머리를 양손으로 조아렸다. 비명 지를 여유? 지금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우우우.
기다란 그림자가 넘실거리며 나를 집어삼킬 듯 덮쳤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모습에 나는 숨이 멎고 말았다.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붉은 보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두려움에 떨던 중, 그림자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우?”
녀석은 까맣고 기다란 직사각형 몸체를 지니고 있었다. 다리는 따로 달리지 않았지만 흐물거리는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
몸 자체는 딱딱한 모양과는 달리 부드럽고 여린 느낌이었는데, 차마 만져 보진 못하겠기에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단팥묵 같기도 하고….’
몸의 위쪽에 커다랗고 인위적으로 보이는 동그란 눈이랑 쭉 찢어진 입이 달려 있었다. 표정은 인형처럼 하나로 고정되었는지 변화가 없었다.
광인 같은 눈과 입이 소름 돋는 인상이었지만, 나를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너… 뭐야?”
“우.”
“우…?”
“우!”
…….
이름이 ‘우’인 걸까. 아니면 ‘우’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걸까. 궁금하지만 날 위협할 게 아니라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 우.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아! 살려 줘서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