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나도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나만… 나만 그렇게 쉽게 목숨을 내놔야 한다는 건… 너무해.”
여전히 토드와 나의 거리는 가까운 상태였다. 급작스럽게 도망치려는 시도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손목은 놓아주었지만, 이번엔 내 어깨를 양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
“날 괴물 취급하지 말아 줘. 나도 원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란 걸… 제발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호소하는데도 통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야 한다.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슬프게도 의문의 목소리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정말이지 대체 뭐 하는 녀석인지 모르겠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진 잘 알아들었어. 하지만 나로선 이 방법밖에 없는데…. 별다른 수가 없는걸.”
“내가 자력으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이 몸의 주인도 자연스럽게 돌아오지 않을까?”
나는 눈을 치켜뜨며 그를 관통할 듯이 쳐다보았다. 신뢰의 눈빛이 무엇인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자력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기는 하는 거고?”
“어… 어! 물론! 붉은 보석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 줘야 해.”
“붉은 보석…?”
“응! 그걸 다 완수하고 나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어.”
“누가?”
“어, 음…….”
내 안의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라고 말해 봤자…….
미친 사람 취급당하는 건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자길 속이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테니까.
“거짓말하는 거구나.”
아악…….
“무슨 소리야! 진짜라고!”
“그럼 내게 보여 줄 수 있어? 그 붉은 보석이란 거.”
“…….”
보여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 눈에만 보인다고 말하면, 분명 또 역시 거짓말이라고 말할 게 뻔했다.
‘진짜 미치겠…….’
“왜. 역시 거짓말인가 봐? 아무 말이 없네. 붉은 보석을 보여 줄 수 없어?”
저것 봐. 보여 줄 수 없냐며 벌써 난리다.
“보, 보여 줄게. 하지만 4층으로 내려가야만 해.”
일단 속일 수밖에 없겠다. 기회를 봐서 도망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이 녀석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4층으로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려간 김에 녀석을 따돌리고 붉은 보석의 이야기를 진행해야겠다.
아주 알찬 계획이 머릿속에 지도를 만들듯 그려졌다.
“4층으로…? 흠…….”
“어때? 계단 말고 내려갈 방법이 있을까?”
“…….”
그는 계속해서 고심하는 모양이었다.
“내 말을 믿을지 말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되잖아. 괴물들은 현재 6층으로 관심이 집중돼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드디어 결정을 내린 그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말했다.
“알았어.”
일단 한 차례 위기를 넘겼다.
등을 타고 내리던 식은땀이 다 날아가 버린 느낌에 커다란 한숨이 쉬어졌다.
“후…. 잘 생각했어. 토드, 나도 선량한 사람이라고. 네가 사람 목숨 하나 살린 거야.”
괜히 기뻐선 주둥이가 나불거렸다.
“하지만 네 말이 거짓이라면 그 자리에서 널 죽일 거야.”
“그, 그래. 그땐 네 맘대로 하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허세를 부렸지만, 치마 속 다리가 오들오들 떨려 왔다.
“그리고 가는 도중 도망이라도 친다면…… 그 즉시 노엘한테 네 정체를 다 까발릴 거야.”
“아…….”
이런, 도망가는 게 바로 내 계획이었는데! 그러면 노엘이 결국 다 알게 되는 건가?
도망치고 난 뒤에는 절대로 돌아가선 안 되었다.
제일 무서웠다. 내 정체를 알게 된 노엘이 내게 보이게 될 낯선 눈빛이. 그가 휘두르게 될 철퇴보다도 훨씬 더 두려웠다.
그러니 이젠 틀렸다. 내게 퇴로란 길은 없어졌다.
붉은 보석의 이야기가 얼마나 더 남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거의 다 왔다는 직감이었으니 이렇게 된 이상 이 직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노엘이 내 정체를 알게 된 후라도, 날 찾아내기 전에 모두 끝마치면 될 일이었다.
거기다 괴물들 때문에 나를 쫓기도 힘들 것이었다. 문제는 나도 그 괴물들을 잘 피해 다녀야 한다는 것.
물론 그 이전에 토드에게서 잘 도망쳐야 하겠지.
“자, 그럼. 가 볼까? 아래층으로.”
“어떻게…?”
침대 근처로 간 토드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아래로 기울였다.
그가 바닥의 카펫을 단숨에 휙 걷어내자, 카펫 아래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그러곤 반지 모양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니 끼익 소리를 내며 작은 통로가 열렸다.
안을 들여다보니 곧장 내려가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데에 비밀 통로가 있다니.”
토드, 이 녀석…. 쓸모 있었어.
“일단 이 비밀 통로는 5층까지가 한계야. 5층에선 중앙 계단을 이용해야 해.”
“그, 그렇구나.”
토드가 먼저 앞장서서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에게 빛나는 마력석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이거, 네가 앞에 있으니 걸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는 별로 필요 없었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건네받아 목에 걸었다.
“어차피 곧 수명이 다해 빛이 꺼질 거야.”
끼익.
문을 닫은 나는 그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빛이 곧 꺼질 거란 말에 뒷덜미가 오싹해지는 듯했다.
빛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나는 앞서 내려가던 토드의 어깨 위에 양손을 올렸다. 그러자 토드가 흠칫 놀라선 멈추어 섰다.
“뭐, 뭐 하는 거야?”
“어? 아니…. 곧 빛이 사라진다고 하니까……. 캄캄해지면 내가 널 놓칠 수도 있잖아.”
사실 무서운 게 더 컸지만, 사실대로 말하기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적어도 토드 앞에선 겁먹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별다른 대답 없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데, 내가 잘못 본 건지 몰라도 귀가 무척 새빨갰다. 옛 연인의 손이라도 닿으니 부끄러운가 보다.
“이제 계단은 다 내려왔어.”
정확히 한 층 정도 내려왔을까 싶은 길이였던 것 같은데.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을 즈음, 마력석의 빛이 수명을 다해 꺼지고 말았다.
밝았던 빛에 적응했던 눈이 다시 쑤욱 꺼져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눈알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묵직한 어둠이 몰아치자, 나는 토드의 등에 후다닥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다시 한번 그를 공포 완화용 인형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나는 겁을 잔뜩 먹어선 그의 망토를 꽉 끌어 잡고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단 듯 멈추어 섰다.
그래도 노엘이 서운해할까 봐 망토만 끌어안은 거였는데. 지금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긴 하다.
“이, 이봐!”
토드는 무섭지도 않은지, 이 순간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저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그가 즉시 몸을 돌려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가 몸을 돌린 순간에도 나는 그의 망토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었다.
힘 때문에 잠시 떨어지긴 했지만, 오래간만의 어둠이 무서웠던 나는 악착같이 다시 찰싹 붙어 버렸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토드.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자. 아무것도 안 보여. 눈이 적응할 때까지만.”
그를 잡아당기고 있는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오들오들 떨기까지 했으니 토드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노엘도 꼬셔서 설득한 건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어이가 없어서 무서움이 순식간에 후다닥 날아가 버렸다.
“노엘을 꼬시다니. 노엘은 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잘해 줬는걸.”
“하긴, 녀석이 병적으로 리사를 좋아하긴 했지. 고분고분한 네 모습에 눈이 멀어서 제가 좋아한 여자가 누군지도 못 알아본 건가.”
토드가 노엘을 나쁘게 말하니, 나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내가 널 꼬실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까 오해도 좀 작작 하셔!”
큰소리 뻥뻥 치며 그의 망토를 부여잡던 손을 홱 떨쳐 버렸다.
이런 인형은 공포 완화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아니, 도움이 되긴 했지만, 기분이 영 찝찝해서 안 되겠다.
이젠 눈도 어둠에 적응했는지 검은 실루엣이 차차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을 읽는 것까진 불가능할 정도였지만, 굳이 살피고 싶지 않았다.
“왜, 날 꼬시면 혹시 알아? 널 녀석으로부터 보호해 줄지.”
이건 또 무슨 변덕인가 싶다. 아니, 변덕이 아니라 날 시험해 보는 걸지도 모르겠다.
“됐거든? 날 모욕할 생각이라면 접는 게 좋을 거야. 이래 봬도 지조 있는 여자라고. 나는 노엘이 아니면 안 돼.”
“뭐야. 진심이야?”
“뭐가?”
“진짜 그 녀석을 좋아한다고?”
뭐라는 거야. 사람 당황스럽게…….
그렇게 물어보면 갑자기 쑥스럽잖아.
“그럼 이제껏 뭐로 본 거야?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척 연기라도 하는 줄 알았어?”
토드는 앞으로 슬슬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표정으로는 근엄하게 경계하며 녀석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갔다.
분명 이렇게 가다 보면 토드를 따돌릴 만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을 부릅뜨고 정신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역시 짜증 나.”
“그래도 그렇지. 넌 친구라는 녀석이…. 노엘이 외로울 건 생각 안 해 봤어?”
“…….”
“난 너희가 어렸을 때처럼 좋은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연애사만 아니면 너희 둘은 아무 문제 없었잖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뭔가 많이 알고 있는 느낌이네.”
“붉은 보석이 너희 과거를 알려 주거든. 물론 모든 일화를 보여 주는 건 아니지만.”
“그래? 희한한 보석이네…. 하필 왜 우리 과거를 알려 주는 걸까.”
“나도 그게 참 궁금해.”
왠지 나를 이곳에 끌어들인 게 그 보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와 무언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근데 날 먼저 내친 건 노엘 녀석이야. 도통 말을 들어야 말이지.”
“그래도 포기하지 마. 노엘도 무척 괴로워하고 있을 거야.”
“……너 진짜 짜증 난다. 그 녀석을 되게 위해 주네.”
나도 모르게 노엘의 어둠 속 미소를 떠올렸고, 어느새 그를 따라 그윽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