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그런 사정이 있다면 토드가 조금은 망설이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 건 그의 망설임이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날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런데 살려 준다는데 싫어하는 영혼이 있을까. 있다면 대체 어떤 이유로?
“글쎄…….”
그는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무언가 꺼림칙한 이유라도 있나.
콰과과쾅!
멀리서 또 굉음이 울렸다. 거리가 멀었기에 노엘의 방에서 듣던 것보단 좀 더 작았다. 그런데도 건물이 쓰러질 것 같은 큰 소리였다.
“괴물이… 그 괴물이 다시 올라왔나 봐!”
나는 벌떡 일어나서 무의식적으로 나가려 했다.
마침 아무런 속박도 되어 있지 않았으니 본능적으로 문으로 다가선 참이었다.
그런데 토드가 곧장 내 뒤를 밟아 나를 끌어당겼다.
“토드, 너도 같이 가자. 응? 같이 가.”
노엘과 녀석들이 걱정된 나머지 내 몸은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 연인의 몸으로… 네 마음껏 날뛰지 좀 마.”
“…….”
토드의 어둡고도 낮은 음성을 들으니 저절로 주춤했다. 그의 얼굴을 천천히 돌아보니, 괴롭지만 더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그동안 네가 그 자식한테 맞췄던 입술도 원래는 온전히 내 것이었어. 마음을 얻었지만 결코 단 한 번도 갖지 못했지. 나 지금 심각하게 길을 잃었어.”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차분히 생각하던 중이었다.
어쩐지 뚫어지는 눈길에 그를 올려다보니, 그의 시선이 온전히 내 입술로 향해 있었다.
***
쾅!
“노엘! 그게 다시 올라오고 있어.”
베키가 다급하게 소리쳤고, 노엘은 대기하던 타란티나 쪽으로 즉시 시선을 돌렸다.
“타란티나!”
쉬이이익.
타란티나가 올라오는 계단 쪽으로 거미줄을 뿜어냈고, 계단의 바닥과 벽이 온통 거미줄로 가득 찼다.
그녀의 거미줄에 괴물이 달라붙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시도해 볼 만은 했다.
쿠쾅!
이어서 아까 마주했던 거대한 원형의 괴물이 퉁퉁거리며 올라왔다.
모두 침묵하며 괴물이 거미줄에 닿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콰과광!
몇 번 더 올라오면 정말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마침내 거미줄에 괴물의 언덕 같은 뱃살이 닿으며 거미줄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이런…!”
하지만 오히려 괴물은 거미줄을 자신의 몸에 칭칭 감기 시작했다.
결국 괴물은 거미줄을 쓸어 모아 제 몸에 잔뜩 붙여선 접착력까지 생겨 더욱더 강력해지고 말았다.
“타란티나, 피해!”
괴물의 몸에 닿으면 꼼짝없이 붙어 버릴 것이었다.
찝찝하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무감각한 건지. 괴물은 제 몸에 뭐가 붙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저 관심사는 살아 움직이는 물체를 향할 뿐이었다.
“리마!”
거미줄 작전에 실패한 타란티나는 간단히 뛰어올라 피했다.
노엘의 지휘와 함께 그 뒤에 멀찍이 있던 리마가 이어서 독 쏘기 작전을 실행했다.
“하, 할 수 있다아! 나는 할 수 있어! 으아아아.”
비명 같은 공명음을 내며 돌진한 리마는 차츰 입을 크게 벌려 물어 버릴 준비를 했다.
인간의 얼굴이었지만 이때만큼은 턱이 비정상적으로 벌어졌는데. 그 안의 아주 뾰족한 송곳니의 생김새가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힘내세요. 리마!”
타란티나는 뒤에서 눈을 매섭게 치뜬 채 지켜보았다.
거미줄이 붙지 않은 괴물의 상부로 접근한 리마는 그것의 어깨 부분을 콱 물어 버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감에 찬 얼굴이 되었다.
“노엘! 나 방금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아!”
노엘이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이 녀석… 방금 어깨에 내 이빨이 쏙 들어갔어!”
“그럼 어깨 위 일부가 약점이라는 건가.”
이제야 검이 튕겨졌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저 괴물의 급소는 어깨거나 그 위로 이어진 머리 부분의 어딘가일 것이었다.
“잘했어. 리마.”
눈을 반짝이는 리마에게 대충 한 번 웃어 준 노엘은 금세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어서 검을 들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리마의 독이 통하지 않은 건지 괴물은 노엘을 보곤 별 탈 없이 구르기를 시전했다.
쿠구구구구궁!
얼굴과 몸의 비율이 1:9 정도 되는 몸체는 데굴데굴 거대한 바위가 굴러가는 듯했고, 노엘은 날렵하게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콰광!
그대로 굴러가 벽에 부딪힌 괴물은 마침 몸을 일으키지 못해 버둥거리고 있었다. 일어날 힘이 부족한 걸 보니, 아마 리마의 독이 조금은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일 것이었고, 노엘도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노엘은 당장 괴물의 어깨와 목이 이어지는 부근을 가차 없이 베어 버렸다.
“급소는 어깨였군.”
아킬레스건이라도 끊어진 듯 바둥거리던 괴물의 힘이 탁 풀어졌다. 괴물의 몸체만큼이나 상당한 양의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타란티나는 급소를 알아낸 리마의 우연적이고도 멋진 활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드디어 괴물을 쓰러뜨렸어!”
리마가 기뻐선 몸의 마디들에 웨이브를 넣어 절그렁절그렁 춤을 추고 있을 때였다.
쿠쾅!
순간 들려오는 파괴적인 소음에 급히 아래층을 살핀 베키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베키! 정신 차려. 왜 그러는 거야?”
알프레드가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며 흔들어대자, 그녀의 조금 벌어진 입이 겨우 바람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저거… 한 마리가 아니었어.”
혼이 나간 듯한 베키를 두고 알프레드가 계단 아래로 고개를 쏟았고, 이내 그 역시 얼빠진 얼굴이 되고 말았다.
노엘은 그들을 스쳐 지나가 제 눈에 확실히 그 풍경을 새겼다.
퉁퉁한 거대 괴물이 빽빽이 올라오고 있었고, 조무래기인 마른 붉은 괴물들도 중간중간 섞여 하나의 부대처럼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곧 약간의 망설임이 깃들었지만, 그저 한순간일 뿐이었다. 금세 정신을 단단히 붙잡은 그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장 후퇴해. 모두 어서 내 방으로 들어가!”
대답할 시간 따윈 없었다.
노엘도 이미 말을 하며 이동하고 있었으니, 노엘의 빨라진 걸음과 함께 모두 그를 바짝 뒤쫓았다.
“노엘의 방은 방어 결계가 처져 있어.”
뜬금없이 자기 방으로 이동하라는 지휘를 듣고 알프레드가 의아해하자 베키가 건넨 말이었다.
리마는 자기도 몰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여전히 존재감 없는 데릭도 놀랍다며 그 말에 입을 작게 벌렸다.
덜컥.
문을 연 노엘이 베키부터 하나씩 신속하게 들여보냈다. 타란티나 같은 거대한 녀석들은 알아서 몸을 웅크리며 기어들어 왔다.
멀리서 괴물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게 보였고, 모두가 무사히 방으로 들어온 뒤 노엘이 마지막으로 들어서며 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그는 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방어 결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쿵쿵쿵쿵. 콰과광!
곧장 도달한 괴물들이 문을 뚫으려 몸통을 박아댔고, 다행히 문밖에서 노란빛이 번쩍이며 그들을 튕겨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결계는 그들이 문에 닿을 때마다 발동했으며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노엘은 방 안에 있을 리사를 눈으로 좇았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방 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욕실에라도 간 건가 싶어 기다렸다.
침대 위엔 타란티나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천장 모서리에 붙어 있는 리마에게 말을 건넸다.
“리마, 이리 오세요. 여기 정말 푹신하고 좋아요. 저와 여기서 함께 있어요.”
리마는 침대 위의 타란티나를 향해 미간을 좁히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그럴 순 없어. 타란티나,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걸.”
“저와 침대에서 함께 쉬는 게 마음의 준비까지 필요한 건가요…?”
“당연하지. 그건 진짜 사랑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러면서 리마는 어디에 숨겨 놨었는지 모를 로맨스 판타지 책을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저 옆에 앉기만 하는 것도 그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건가요? 리마는 정말 진중한 남자로군요. 역시 제 취향이에요.’
타란티나는 그런 리마를 향해 더욱 눈을 반짝이며 눈독을 들였다.
노엘은 타란티나와 리마를 번갈아 보다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베키 역시 혀를 내두르던 중, 기다리다 못해 리사를 찾으러 욕실로 갔다.
“아우. 시원하구먼.”
“…알프레드, 왜 거기서 나오는 거죠?”
막 볼일을 본 알프레드가 배를 둥글게 문지르며 나오는 바람에 딱 마주치고 말았다.
리사가 있으리라 생각한 베키가 당황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엘이 급히 다가왔다.
영문을 모르던 알프레드는 이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리사는 이 안에 없었어….”
“없었다고?”
노엘은 곧장 알프레드를 지나쳐 욕실 안을 살폈고, 알프레드가 남긴 향긋한 냄새만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고 말았다.
츠륵.
그때 데릭이 소리가 나는 무언가를 들고 왔는데, 끊어진 쇠사슬이었다.
“이거… 저기 흔들의자 근처에 떨어져 있었다.”
“…….”
차분히 쇠사슬을 받아 든 노엘의 미간이 급격히 굳어졌다.
무참히 부서져 잘려 나간 부분을 보니 제 가슴도 그렇게 갈려 나가는 것만 같았다.
***
토드가 왜 내 입술을 쳐다보는지 긴장되었지만, 그는 별다른 행동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어색하고도 숨 막히는 분위기가 오래 지속되었다. 관자놀이로 땀이 한 방울 스쳐 지나가 빠르게 턱 아래로 뚝 떨어졌다.
밖의 쿵쿵거리던 큰 소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사라진 상태였다.
“토드…, 손목 아파.”
토드가 내 손목을 너무 꽉 쥐고 있던 터였다.
“아, 미안….”
아프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선 바로 놓아주는 그였다.
“토드, 네 마음은 잘 알고 있어. 나 같아도… 내 연인의 몸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아.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나는 다른 곳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원치도 않는데 이 몸에 들어오게 되었어.”
어떻게 하면 토드를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베키를 설득할 때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