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무섭게 왜 그래……. 그런 말 하지 마.”
“어쩌지. 네 이런 모습… 조금 더 감상하고 싶은데……. 그럴 시간이 없어.”
“그래, 그러니까 어서 나가 보시라니까.”
나가라며 손짓하던 순간이었다.
내게 가까이 다가온 토드가 허리춤의 검을 순식간에 뽑아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내리친 건 내가 아니라 쇠사슬이었다.
요란하고도 날카로운 소리가 부서질 듯이 들렸지만, 쇠사슬은 여전히 멀쩡했다.
“또 뭐 하는 건데!”
설마 토드가 쇠사슬을 끊을 시도를 할 줄은 몰랐다. 당황한 나는 눈을 부릅뜨고 어깨를 벌벌 떨었다.
검을 다시 집어넣은 토드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히 웃었다. 그 모습이 순수하고 해맑아 지금 이 상황과 몹시 괴리감이 들었다.
“이거론 안 되나 봐. 하하. 그럼 이걸로 해 볼까?”
망토를 살짝 들친 그의 허리춤엔 갖가지 무기가 두루 갖추어져 있었는데, 그중 이번에 뽑은 건 검은 쇠망치였다.
망토에 가려 보이지 않았었는데 저 쇠망치에 한 대만 맞아도 뭐든 부서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쿠쾅!
역시 그는 조준한 뒤에는 망설이지 않고 내려쳤고, 드디어 쇠사슬이 쩍 갈라지며 끊어졌다.
내 발목의 족쇄는 열쇠가 필요하니 여전히 붙어 있었지만, 차마 이 족쇄에 저 망치를 내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망치의 크기가 제법 컸기 때문에 내 발목이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 이제 갈까?”
“어… 어딜 가려고? 계단 근처엔 노엘과 친구들이 지키고 있다고.”
절대 안 된다. 이대로 내가 사라지면… 노엘이 또…….
겨우 그에게 돌아왔는데. 이렇게 또 떨어질 수는 없었다.
“뭐야. 리사…. 설마 내가 들킬까 봐 걱정해 주는 거야?”
“너랑 장난칠 기분 아니야. 나 지금 진지하다고.”
“나도 진지한걸.”
“난 여기서 노엘이 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아.”
나는 흔들의자에 붙인 궁둥이에 더욱 무게를 실었다.
“그럼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봐. 이러면 네가 움직일 기운이 나지 않을까 싶어.”
“……?”
어디 얘기해 보라며 팔짱은 끼었는데, 벌써 토드의 속셈에 휘말려 들어간 듯 목덜미가 서늘했다.
“노엘, 그 자식은 네가 리사가 아닌 걸 모를 거 아니야. 알았다면 이미 넌 그 녀석 손에 죽었을 거라고.”
아… 설마.
설마, 아니겠지…….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내가 그 자식한테 다 불어 버려도 괜찮은 거야? 솔직히 그 녀석이 나 대신 일을 처리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거든.”
그 설마가 적중하고 말았다.
“…….”
“네게 선택권을 주려는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죽을래, 그 자식한테 죽을래?”
족쇄가 달린 발목이 더욱 무거워진 느낌. 머릿속에 하얀 폭포가 쏟아지고 심장이 폭포 밑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토드…. 왜 이렇게 잔인해?”
급기야 헛웃음마저 나왔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눈시울이 붉어지며 뜨거워졌다.
“너야말로 왜 하필 그 자식 옆에서 연인 행세를 하는 거지? 이 몸의 연인은 나인 걸 알면서.”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긴데.
한 번 실패했던 터라 말한다고 한들 그를 설득할 수나 있을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날 먼저 화나게 만든 건 너잖아.”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가 나를 와락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짐짝처럼 어깨 한쪽에 나를 짊어 들었다.
“악! 이, 이거 내려 줘! 나 소리 지른다?!”
“어디 한번 질러 봐. 그럼 나도 그 녀석한테 다 불어 버릴 테니까.”
“…….”
그의 어깨에 매달려 격렬하게 발버둥 칠 새도 없었다. 이미 노엘의 방을 나온 직후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끙끙거리며 겨우 고개를 쳐들어 보았지만, 보이는 건 토드의 길고 흰 망토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잠자코 있다 보니 토드는 어떤 방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내려갈 수는 없었으니 여전히 같은 층이었는데, 이곳은 일전 단 한 번도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오른쪽 발… 아프진 않아?”
족쇄가 채워진 발을 말하는 모양인데, 다른 데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아픈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협박 납치범 주제에 무슨 걱정을 다 하고 난리람!
“아프면 뭐! 네가 떼어 주기라도 할 거야? 안 아프게 해 줄 거냐고!”
나는 주먹으로 그의 등을 퍽퍽 때렸다. 하지만 망토만 펄럭거릴 뿐 거꾸로 매달려 있어 내리치는 손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순 없었다.
“잠시 여기서 쉬도록 하자.”
누가 보면 먼 길을 온 줄 알겠다.
토드가 날 내려놓으며 방에 있던 책상 의자에 앉혔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 층 침대랑 책상이 놓여 있었다. 얼핏 보면 그 외엔 별다른 것 없이 평범했다.
그런데 온기가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보아, 토드가 여길 자주 드나들고 있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얏!”
토드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족쇄가 차인 내 발목을 올려 살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들린 치마를 빛보다 빠르게 끌어 내렸다.
“이런…, 아팠겠다…….”
족쇄 주변 피부에 붉은빛이 번져 있었다. 확실히 아프긴 했지만, 지금 내 마음의 무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로 코앞에 해맑은 은발의 사신이 있는데도 노엘이 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노엘 녀석한텐 내가 다 말할 거야. 다만 그 시기가 지금은 아닐 뿐…. 밝혀지기 전까지 내 곁에 있는 게 오히려 좋지 않겠어?”
“……노엘이 다 알게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날 해칠 거라 장담할 수는 없는 일 아니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고작 그동안의 연애 놀음으로 생긴 그 얄팍한 정으로?”
연애 놀음이라니… 얄팍한 정이라니. 그 말에 나는 버럭 화를 낼 뻔했다.
하지만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선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끊임없이 한 번씩 생각하곤 했었지만, 나 역시 정체를 들켰을 때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토드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어쩐지 더욱더 강하게 부정하고 싶어졌다.
노엘의 태도가 크게 변하지 않을 거라고. 적어도 날 가차 없이 내쫓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동안의 정을 봐서라도.
“자신 없잖아. 다 보여. 네 얼굴에서 다 드러난다고.”
“…….”
표정은 솔직한가 보다. 표정 관리가 안 돼서 슬픈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어떻게든…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저 보내 달란 말을 앵무새처럼 남발해 봤자 무의미할 것이었다.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헉, 그건 왜!”
“위험하니 가만히 있어.”
갑자기 토드가 단단해 보이는 커다란 집게를 꺼냈고, 망설임도 없이 내 발목에 있던 족쇄를 단번에 끊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겁을 먹을 틈도 없었다.
툭, 갈라지며 떨어지는 저 족쇄가 마치 노엘의 손이라도 되는 것 같아 왠지 서글퍼졌다.
“토드, 네가 날 데려온 건… 죽이려고 데려온 거겠지? 그래야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돌아올 수 있으니까.”
토드는 바로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아 느릿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는 대답 대신 몸을 앞으로 당겨 턱을 괴었다.
“그건 정말 확신할 수 있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죽으면 원래 주인이 돌아온다는 거. 그게 진짜냐고 묻는 거야. 난 아직 그게 잘 이해가 안 돼서….”
베키에게도 예전에 자세히 물어보려 했었지만, 그녀도 방법적인 면에선 확실히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도 대충 알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 사실 너와 처음 만났을 때까진 잘 모르고 있었어. 그저 미신 같은 느낌으로만 알고 있었거든.”
그렇다면 그 뒤로 무언가 확실한 정보를 얻었다는 건데….
“뭔가를 알아낸 거야?”
“하마터면 너만 죽이고 끝나 버릴 뻔했어. 그때 널 안 죽이길 참 잘했던 거였어.”
“…….”
토드가 갑자기 허리춤의 까만 쇠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망치 머리를 떨구어 긴 손잡이에 양손을 지탱하듯 올려놓았다.
툭- 묵직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쇠망치를 보니 어쩐지 그 특유의 짙은 검은색과 질감이 낯익었다.
노엘의 철퇴와 똑같은 색깔과 질감이었다. 쇠망치와 철퇴 모두 미세한 검은 펄이라도 박혀 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번들거렸다.
“이건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무기야. 평범한 물건은 아니지. 마력자가 아니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어.”
보아하니 마력석은 다양한 힘이 담겨 있는 모양인데, 저 쇠망치와 철퇴는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럼 그 망치엔 무슨 힘이 담겨 있는데?”
“새로운 것을 파괴하고 원래의 것을 되돌려 놓는다.”
새로운 것엔 내가 해당할 터였다. 그렇다면 저 망치를 맞으면 나는 파괴된다는 것인가?
‘이봐. 나 궁금한 게 있어. 빨리 나와 봐.’
나는 마음속으로 의문의 목소리를 재촉했다. 이번에도 안 나오면 끈질기게 재촉할 생각이었는데 웬일로 즉각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들었잖아. 저 말대로야. 너는 그저 사멸할 뿐….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갈 순 없어.]
‘…….’
[그러니 저 망치에 맞지 않게 절대 조심하도록 해.]
희망적인 대답을 들으리란 기대도 없었지만 다시 한번 확인 사살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어깨가 축 늘어져선 우울해하자니, 토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력석의 힘은 언제나 본인의 강력한 의지가 깃들곤 하지. 특히나 죽은 생명을 돌아오게 할 땐 반드시.”
“강력한 의지?”
“예를 들자면 말이야. 내가 지금 당장 너를 이 쇠망치로 치면 넌 죽을 거야. 그리고 원래 몸 주인의 영혼을 불러오게 되겠지.”
“그런데?”
“원래 몸의 주인이 돌아오길 강력히 거부한다면… 결국 그냥 네가 죽기만 하고 끝나 버린다는 말이야.”
안 그래도 억울할 판인데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상황인지.
“그럼… 그녀가 강하게 거부할 만한 사정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