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베키는 손톱으로 할퀴었다가 가운데 손톱 하나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 베키도 회의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책을 모두 뭉개 버린 괴물은 다시 무서운 속도로 굴렀고, 그대로 계단 아래로 내려가 사라졌다.
“뭐… 뭔데! 저거 왜 돌아가는 거야?”
독이라도 쏴 보려고 준비하던 리마는, 괴물이 바로 후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구르는 소리는 3층쯤에서 또 머무는 듯했고, 그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책만 부수고 가 버렸다는 건…….”
베키가 부러진 손톱을 문지르며 낮게 중얼거리자, 노엘이 이어서 말했다.
“동료들을 데리고 올라올 셈인 건가…?”
알프레드도 거들었다.
“둘 중 하나겠네. 동료를 데려오거나 기운이 다 빠져서 쉬러 갔거나.”
“기운이 다 빠졌다니….”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괴물마다 움직이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양이 다를 테니까.
어쨌거나 비상이었다. 방책이 모두 허물어졌으니 붉은 괴물이 떼를 지어 올라오는 순간 모두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해야 했다.
게다가 저런 유형의 괴물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희망적이지 못했다. 저것보다 더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남은 방책은?”
데릭이 어두운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멀쩡한 방책은 없었다. 여분으로 구석에 모아 두었던 것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부서진 참이었다. 주위는 온통 나무 조각들의 무덤이라도 되는 양 너저분했다.
“노엘, 일단 넌 리사에게 가 봐. 분명 소리를 들어 걱정하고 있을 거야.”
베키의 말에 노엘도 그러려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달려갔다.
***
벌컥!
“왁!”
깜짝이야. 하마터면 갑자기 열린 문에 치여 죽을 뻔했다.
계속해서 문에 귀를 붙이고 있던 나는 놀라 뒤로 자빠졌다. 굉음이 몇 차례 이어진 이후 머릿속이 하얘지고 멍해져선, 노엘이 달려오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노엘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반가워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노엘!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야. 큰 소리가 났어.”
다소 어두운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말았다.
“리사…….”
어딘가 정신이 다른 데에 있는 듯 굳은 낯빛을 보니 상황의 심각성을 알 것 같았다. 밖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느낌.
“차분히 얘기해 봐.”
나는 노엘의 양팔을 쓰다듬으며 호흡을 고르게 하도록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리사…… 방금처럼 절대로 밖으로 나와선 안 돼.”
“대체 무슨 일이기에. 다들 괜찮은 거지?”
“응, 다들 무사해. 그런데… 곧 더 큰 게 올지도 모르겠어. 방책이 모두… 무너졌어.”
세상에. 그 튼튼한 것들이 그렇게 다 쓰러졌다니.
우지끈거리던 무시무시한 소음은 방책들이 부서지는 소리였나 보다.
“어쩌다… 어쩌다가!”
“우리에겐 좀 버거운 녀석이었어…. 다시 올라온다면…… 게다가 동료들을 불러온다면….”
노엘의 눈동자가 얕게 흔들거렸다.
“그, 그럼 어떡해야 해?”
“어떻게든 막아 봐야겠지…. 다시 작전을 짜야겠지…….”
“나도! 나도 싸울래. 같이 싸우고 싶어!”
“아까도 말했잖아. 여기 있어.”
“싫어! 같이 갈래. 혼자 있는 게 더 무섭단 말이야!”
나도 별일이 없으면 가만히 있으려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겁에 질려 무력하게 떨고만 있을 순 없는 일이었다.
“제발… 제발 리사!”
“제발 부탁해. 노엘.”
“여긴 유일하게 결계가 쳐져 있는 공간이야. 우리에게 악의가 있는 존재는 결코 들어올 수 없어. 데릭이 침입했던 사건 이후로 내가 가진 마력석 전부를 써서 방어 결계를 쳐 놓았다고.”
“뭐……? 뭐야! 그걸 왜 이딴 데다 쓰는 건데! 밖을 방어하는 데에나 쓰지 그랬어.”
“……이딴 데라니. 잠깐 이리 와 봐.”
노엘이 침대로 향했고, 나는 흥분해서 씩씩거리면서도 일단 그의 말대로 다가갔다.
“리사. 넌 내 전부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제 입술을 잘근 깨물던 그가 갑자기 애절한 얼굴로 입술을 겹쳐 왔다.
“억… 노엘?! 흐읍….”
분명 지금 이러고 있을 때도 아니었거니와 그럴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을 텐데. 그런데도 강렬하게 몰아붙이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차츰 녀석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마치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그와 내가 붙어 버린 것 같다.
향긋한 냄새와 입 안의 쫄깃한 것이 자꾸만 구미를 당기게 만든다. 달콤하면서도 아찔한 감각이 이런 암울한 상황 따위 모두 잊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듯 작정하고 내게 달려들었다.
한바탕 정신을 놓던 중, 어느 순간 그의 손이 내 다리를 스치는 바람에 소름 비슷한 것이 올라왔다.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 때쯤이었다. 그가 내 발목을 세심하게 움켜쥐었다.
불길한 직감에 눈을 떴을 땐, 내 오른쪽 발목에 검은 족쇄가 채워져 있는 걸 깨닫게 되었다.
“노엘……?”
잔뜩 질겁한 나는 노엘의 옷깃을 꽉 잡아당겼다. 방금 막 시커먼 쇠사슬을 채운 사람치고는 무척 다정한 표정이었다.
“이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해.”
“뭐? 미안하면 당장 풀어 줘! 풀어 달란 말이야.”
나는 발목을 물고 있는 쇠사슬이 어떻게 벗겨지는 타입인지 확인하려 낑낑대며 살펴보았다.
그사이에 내 손을 빠져나간 그의 옷자락이 멀리 달아났다.
내가 다시 붙잡을까 봐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모양이었는데, 노엘은 금세 문고리를 쥐고 서 있었다.
“설마 이대로 가려는 거야? 가지 마. 제발! 이건 아니잖아….”
애절하게 부탁했지만, 그의 굳은 얼굴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절대로 풀어 주지 않을 거라고.
“미안…, 정말 미안해.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다시 돌아오면 바로 풀어 줄게. 그땐 네게 혼날 준비 단단히 할 테니까….”
“노엘…….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러니까… 너도 생각하고 있을래?”
“무얼….”
“어떻게 하면 내게 가혹한 벌을 내릴지 말이야.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게. 아, 물론 나랑 헤어지겠다거나 그런 건 빼고.”
“아니! 애초에 이런 짓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노엘은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꼭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그 족쇄의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으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그렇게 문이 닫히고 말았다.
“노엘!”
혹시라도 들을까 힘껏 불러 보았지만, 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하……? 와…….”
쩍 벌어진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믿기지 않아 크게 떠진 눈이 뒤집힐 정도였다. 뒤통수는 하도 당해서 남아나질 않는 듯했다.
심장이 파도가 치듯 크게 뛰고 있었다.
진정하자. 일단 진정…….
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기어코 나를 또 가두었다. 안 그래도 가두어져 있던 나를 한 번 더 가두었다.
확인 사살이 아닌 확인 감금 뭐 그런 건가.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나는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다시 살펴보았다. 쇠사슬은 침대 밑기둥에 튼튼하게 감겨 있었는데, 길이가 꽤 되는지 많은 양의 사슬이 뭉쳐 있었다.
‘일단 일어서 볼까.’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얼마만큼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해 보려 했다.
츠르륵.
족쇄에 달린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새삼 소름 끼쳤다.
그렇게 문 쪽으로 최대한 걸어가 보았는데, 생각보다 넓은 범위를 다닐 수 있었다. 물을 마신다거나, 화장실을 간다거나 하는 중요한 일은 모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은 침대에서도 가장 멀었고, 쇠사슬의 길이로는 딱 문고리를 잡지 못할 만큼만 다가갈 수 있었다.
쇠사슬을 끊어낼 무언가라고 해 봤자 위험한 무기들은 모두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넣어 놓은 상태였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슬도 굵어서 어지간한 힘으론 부술 수는 없을 것 같았으니,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진짜 무슨 벌을 줄지 고심이라도 해야 하나.
“진짜… 돌아오기만 해 봐. 노엘…….”
그러면서도 또다시 그가 잘못될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돌아온다고 했으니 믿어야겠지만,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구석에 있는 흔들의자에 풀썩 앉아 이마를 짚고 있던 찰나.
노엘이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누군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끼익.
주저 없이 열린 문 사이로 토드가 날렵하게 들어와 문을 닫았다. 누가 봐도 몰래 들어온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었다.
“토드? 네가 어떻게….”
네가 왜 여기에…. 하필 또 이런 때에 여긴 왜 들어온 건지.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대체 어디 숨어 있다 나온 건지 모르겠다.
“리사, 되게 오랜만인 거 같네. 그렇지?”
뽀얀 피부가 꼭 달빛 같다. 그런 피부가 발광하며 내게 해롭지 않아 보이는 미소를 날렸다.
“……여긴 왜 왔어! 지금 밖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줄 모르는 거야? 다들 고군분투하는 중인데…!”
내가 뭐라든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전히 밝은 얼굴로 끌어 올린 입꼬리를 얄밉게 유지할 뿐.
“물론 나도 도와주고야 싶지.”
“그럼 지금이라도 가서 도우란 말이야!”
“나 하나 없다고 못 지켜낼 녀석들은 아닐 테니까.”
“그 많은 방책이 다 파괴되었다고……. 속수무책으로.”
“그건 그 녀석들이 알아서 할 거고. 우린 우리 이야기를 좀 해야지.”
나 참.
나는 눈알을 한 바퀴 굴리며 돌아 버리겠단 표정으로 발목을 흔들었다.
철렁철렁.
내 발목의 족쇄가 흔들리며 쇠사슬이 소리를 내었고, 예상대로 토드의 시선을 빼앗았다.
“나 완전히 감금되었어.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간다고. 그러니 포기하고 돌아가.”
토드는 길게 늘어진 쇠사슬을 들어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그것을 쭈욱 위로 들어 올리자 내 다리가 함께 들썩였다.
“뭐, 뭐 하는 거야!”
다행히 그의 장난은 길게 지속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들어 올린 것으로 만족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조금 상기된 것 같았다.
“이렇게 네가 묶여 있으니까… 뭔가 기분이 묘하게 경쾌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