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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69화 (69/145)

69화.

“난 아주 멀쩡해. 내가 없는 정신으로 너한테 이럴 거 같아?”

“…….”

뭐야……, 제정신이었나 봐.

“그렇게 무책임한 놈으로 보인 건가.”

“미안…. 뭔가 풀어져 보여서… 내가 오해했나 봐.”

나는 급히 그의 얼굴을 놓아준 뒤, 이번엔 그의 목과 어깨선의 검은 액체를 쓸어내렸다. 그의 피부에 잠깐씩 닿는 새끼손가락 끝의 감촉이 마치 딱딱한 젤리를 건드는 것 같았다.

빛을 내는 마력석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검은 액체를 벗겨낸 그의 목이 불그스름해 보였다. 노엘도 그걸 의식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간지러워…….”

욕조엔 검은 액체가 하얀 거품과 뒤섞여 물에서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가, 간지러워? 빨리할게!”

뿌연 김을 자꾸 들이마셔서 그런 걸까. 사실 몽롱해진 사람은 노엘보다도 나인 것 같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빨리하진 마. 천천히 해.”

“응? 빨리하지 마?”

“응…. 빨리하면 아파…….”

이상하다. 부드러운 천이라 아무리 박박 닦아도 아플 리는 없을 텐데. 게다가 내가 빨리한다고 특별히 힘을 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노엘의 피부는 고운 만큼 예민하기라도 한 걸까. 황족의 피부는 원래 그런 건가.

“알았어. 그럼 천천히 닦아 줄게.”

“응, 아주 아주… 천천히…….”

시야의 한쪽에서 그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는 것 같았는데, 이상해서 올려다보니 입꼬리가 다시 스륵 내려갔다.

기분 탓인가? 어째선지 목이 뻐근하고 뒤통수가 따끔하다.

이제 그의 넓은 가슴팍을 닦을 차례였다. 노엘이 의식했는지 허리를 꼿꼿이 세워 고쳐 앉았다.

“고, 고마워.”

내가 닦기 편하도록 배려했나 보다. 단단한 근육들이 서로 보란 듯이 영역을 촘촘히 지키고 있었다.

다시 슬금슬금 닦아 주며, 은근히 손가락 끝의 접촉을 혼자 조용히 즐기고 있을 때였다.

“뭔가 부끄러워. 나만 벗고 있으니까…….”

“응? 부, 부끄럽긴…….”

“설마 남자가 겨우 웃통만 훤히 드러낸 거 가지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

“…….”

정답이었다. 남자의 마음을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그럴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왜, 수영할 때 보면 남자들은 하의만 입으니까 말이다. 내게 있어 노출에 대한 부끄러움의 기준은 수영복에 맞춰져 있었다.

게다가 몸매가 좋은 사람들은 더욱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나만 이렇게 내보이는 건 불공평해.”

이 녀석과 있으면 이곳이 공포 게임 속이란 사실을 자꾸만 잊게 된다. 장르가 또 다른 데로 샌 것 같다.

“불공평하다니…. 그렇게 얘기하면 지금 내가 네 몸을 보려고 벗겨낸 것 같잖아.”

이제 훤히 드러난 그의 가슴과 배를 두고, 팔과 손을 천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잠시 불만스러운 입을 꾹 닫고 있던 노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리사, 덥지 않아?”

“음… 조금 덥긴 한데. 참을 수 있는 정도라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겠나. 더운 건 둘째 치고 코피라도 발사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중이었다.

“그래…?”

“응. 왜? 더워?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나….”

“아니, 전혀. 뜨거운 물 좀 더 넣어 줄래? 물이 좀 식은 거 같아.”

그래서 곧장 물속에 손을 넣어 어떤가 봤지만, 내가 느끼기엔 아직 적당히 따뜻했다. 어쩐지 이 녀석…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것 같다.

“조금만 기다려. 곧 다른 욕조로 옮겨 갈 거니까.”

노엘은 무척 실망한 표정으로 포기한 듯 다부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노엘의 팔과 등까지 모두 닦고 나니, 상체에는 상처 하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리는 멀쩡하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마 거짓말일까?

“후유….”

아니, 하체에 상처가 생긴 것일 수도 있으니 방심해선 안 된다.

“힘들지? 이제부턴 내가 할게. 정말 고마워. 리사.”

“어? 아, 아냐! 내가 해 준다고 했는걸! 아래도 내가 해 줄게. 어딘가 아프다고 했잖아.”

“…….”

물속에 숨겨진 하체로 손을 뻗으려 했는데 수면이 너무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이젠 다른 욕조로 이동시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엘, 저리로 옮겨 가자. 천천히 일어나 봐.”

노엘은 일어나려 무릎을 굽혔지만 어쩐지 일어나지 않고 멈춰 있었다. 표정도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니 내 심장은 다시 덜컹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왜 그래? 역시 많이 아픈 거야?”

“저… 리사, 이다음부턴 내가 할게. 그만 나가 줄 수 있을까?”

내게 아픈 부위를 숨기려는 걸까? 얼마나 심하게 다쳤으면 그러는 건지.

“보고 싶어. 괜찮으니까 나한테 보여 줘.”

“……뭐?”

“괜찮다고. 나한텐 숨기지 않아도 돼.”

“……지금 뭔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그럼 내가 모르고 말하겠어?”

“……안다고?”

갑자기 노엘의 얼굴이 급격히 붉게 타올랐다. 내가 걱정할까 봐 그러는 것치곤 어딘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다른 이유라고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상처가 아니면 대체 숨길 게 뭐가 있단 말이지.

“다 알아. 그러니 어서 일어나 봐. 물도 엄청나게 오염됐어.”

“잠깐만. 뭘 안다는 건지 일단 말해 봐. 너와 내 생각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심오한 분위기를 잡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아예 몸을 움츠리곤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미쳐 버리기 직전인 사람 같았다.

“다리 어딘가가 아파서 그런 거 아니야? 그… 상처가 크다거나… 깊다거나…….”

“뭐?”

“그래서 내가 걱정할까 봐 안 보여 주는 거 아니냐고….”

“…….”

천천히 스산하게 고개를 든 그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맑은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그의 미간이 쪼그라들고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진 걸 보니, 내가 잘못해도 확실하게 잘못 짚었나 보다.

“리사, 나 아픈 데는 하나도 없어. 상처도 하나 없어.”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얼굴을 활짝 펴며 눈을 곱게 휘었다.

“어? 뭐야. 아깐 아프다고 했잖아. 인제 와서 나가라는 이유라도 말해 주든가!”

나도 어이가 없어서 눈을 부릅뜨고 고집부렸다. 아픈 줄 알고 직접 씻겨 주려 했던 거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손 떼었을 것이었다. 뒤통수가 괜히 따가운 게 아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적절한 처방을 찾았는지 눈을 키웠다.

“그럼 둘 중 하나 선택해.”

나는 괜히 또 긴장되어서 팔짱을 끼고 집중했다.

“첫째, 내가 혼자 씻고 싶은 이유를 말해 줄게. 대신 나도 내 손으로 널 씻기게 해 줘. 지금 당장.”

“뭐… 뭣?!”

“둘째, 그냥 나간다.”

더는 고집부릴 이유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젖은 천을 미련과 함께 내려놓고 욕실을 나왔다.

***

간신히 리사를 쫓아낸 노엘은 욕조를 옮겨 앉은 후, 천으로 다리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못 말려……. 괜히 꾀병 부렸나.”

그녀의 지속된 정성스러운 손길에 간질거림이 극에 달했던 터였다.

왜 그런 진지한 눈으로 몸을 쓸어내리는 건지. 그녀의 시선 그 자체에 몸이 씻기는 듯했다.

게다가 자꾸만 느껴지는 그녀의 새끼손가락 끝 감촉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눈치가 빨라 그녀의 시선만 따라가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 접촉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이윽고 아래가 뻐근해져선 허벅지 안쪽이 뜨거워진 것을 차마 활짝 내보일 순 없었다.

“후, 답답해.”

아슬아슬했던 순간도 잠시.

욕실에 혼자 남겨지니, 토드와 리사가 안고 있던 장면이 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그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선 당장이라도 모든 걸 파괴해 버릴 것 같았는데,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잠시 잊고 있었다.

이쯤 되니 자신을 멸망으로 몰아넣는 이도, 빠져나오게 하는 이도 그녀였음을 새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나는… 난 어떡해야 해. 리사…….”

잔잔하던 물결이 굵은 곡선을 그리며 휘몰아치니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얼굴을 감싼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은 액체보다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토드에게 얌전히 안겨 있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자신을 저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 밑바닥은 지옥보다도 괴로운 곳일 것이다.

잊어야 하는데 아무리 애써도 잊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장면을 본 눈알이라도 모조리 파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리사의 얼굴도 볼 수 없다. 그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럼 이런 괴로움쯤은 견뎌내야 하는 거겠지.’

***

노엘이 목욕을 마친 뒤, 나도 막 씻고 나온 참이었다. 더럽혀진 검정 원피스는 더 이상 입기 불가했는데, 다행히 노엘이 다른 새 원피스를 마련해 주었다.

“이건… 조금 더 있다가 네게 선물할 예정이었어.”

입을 옷이 없어 고민하던 나는 붉은 원피스가 무척 반가웠다. 색깔이 워낙 원초적인 빨강이라 조금 망설였지만, 막상 입어 보니 귀여워 마음에 들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

신이 나선 그의 앞에서 소심하고 어색하게나마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잘 어울려. 예상한 것 이상으로 아름다워.”

어쩐지 목욕을 한 이후로 기운을 잃은 그였지만, 내가 하는 말엔 족족 성실히 대답해 주는 눈치였다.

“고마워. 노엘, 붉은색을 보니 왠지 기운이 나.”

그런 말이 있던 것 같다. 기운 없을 때 빨간 옷처럼 환한 원색의 옷을 입는 행동만으로도 기운이 난다는 그런 말.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정말 없던 에너지가 생기는 느낌이었다. 내게 생기가 돋아나는 느낌.

그런데 아까부터 축 처진 노엘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가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한 나는 곧 속으로 크게 경악하고 말았다.

‘아악…! 그러고 보니 아까 일을 아직 해명하지 못했어.’

잠시 잊고 있었다. 토드랑 안고 있던 걸 노엘이 똑똑히 지켜봤을 텐데.

그렇다면 노엘이 먼저 내게 물었을 법도 한데……. 왜 지금까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건지.

분명 괴로워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일 텐데. 환영을 통해 봤던 과거의 그는 질투의 화신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질투의 화신이 아니더라도 자기 연인이 다른 사람 품에 안겨 있는 걸 목격하게 된다면…….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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