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뜨거운 호흡이 여전히 가쁘게 이뤄지고 있었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움직임이 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도 모른다.
이젠 토드의 존재감도 희미하게 잊혔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포근한 향기를 들이켜며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제야 노엘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보게 되었고, 흰자만 보일 것 같았던 그의 눈알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눈빛이 나른하게 풀렸지만 말이다.
“이제 돌아가자.”
나는 아직도 그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나보다도 뜨거운 그의 체온이 내게로 흘러들었다. 그 온도가 기분 좋아 굳이 급하게 벗어나려 하진 않았다.
“응, 일단 돌아가서 얘기해.”
그런데 어쩐지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절뚝거렸다. 표정도 어딘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어디 다쳤어? 아픈 거야?”
“응……. 많이 아파.”
“어서 가서 치료하자. 내가 도와줄게.”
“응….”
순한 양으로 돌아온 노엘을 부축하려 했지만,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며 그저 내 손을 깍지 껴 꽉 잡는 그였다.
토드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언제 가 버린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갔기를 바랐다. 뒤늦은 부끄러움이 몰려들고 있어 무척 곤란했다.
“이리로 나가면 바로 굴 밖이야.”
이어진 길은 좁았지만 이전처럼 기어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허리를 약간만 숙이면 가볍게 걸어서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나와 노엘은 5층의 어느 작은 방으로 빠져나왔고, 곧장 6층으로 올라가 일행과 합류했다.
촘촘히 세워진 방책들 사이로 녀석들의 얼굴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반갑다 못해 조금 들뜨기까지 했다.
다신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끙끙대던 때가 언제였는지. 아직도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반가운 녀석들과 살아남은 자의 기분을 만끽하며 좀 더 말을 섞고 싶었는데, 노엘이 다시 쓰러질 것 같은 걸음걸이를 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알프레드는 노엘의 치료를 부탁한다며 내 등을 떠밀었다. 그러면서 노엘과 어떤 눈짓 신호를 주고받은 것 같았는데, 묘하게 음흉하다고 느껴진 건 기분 탓일까.
어쨌든 그 바람에 나와 노엘은 단둘이 방 안에 있게 되었다.
노엘의 방 안이 초를 켜지 않고도 환히 빛나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토드에게 받은 마력석 목걸이가 여전히 빛을 내고 있었는데, 영구적인 건 아니라고 했었다.
붉게 익은 감 같은 색깔에 어쩐지 낯 뜨거워졌다. 동굴에서 노엘에게 입을 맞추었던 게 떠올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노엘의 뺨에 손등을 대어 보니 몹시 뜨거운데 아무리 재도 아파서 생긴 열감은 아니었다.
“노엘, 잠시만 거기 서 있어 봐. 씻을 준비 좀 해 놓을게.”
그가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검은 액체가 뚝 떨어졌다. 저렇게 다니다간 이 방은 온통 검은 피로 뒤덮일 것이었다.
“씻겨 주는 거야?”
“응? 씻겨 주다니. 준비해 놓겠다고 한 말을 잘못 들었구나.”
“나 아픈데.”
“뭐?! 그, 그럼 어쩌지? 어디가 아픈 거야?”
“아파. 씻겨 줘.”
“아, 알았어! 그럼 잠시 기다리고 있어.”
내 말에 순순히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뭔가 또 그가 귀여워지려 했다. 저렇게 말을 잘 듣고 있으니 묘한 만족감이 몰려드는데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갑자기 애가 된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씻지 못할 정도면 어딘가 상처라도 생긴 모양인데.”
나는 중얼거리며 부지런히 그를 씻길 준비를 했다. 욕조에 따듯한 물을 하체가 잠길 정도만 받고, 그의 몸을 닦아 줄 부드러운 천들을 준비해 놓았다.
검은 액체의 농도가 진득해 보여 쉽게 닦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욕조에도 미리 물을 받아 놓았다. 욕조가 여럿 있는 게 이럴 때 참 도움이 되었다.
“노엘, 이제 들어와!”
터벅터벅.
그가 검은 발자국을 찍으며 방 옆에 있는 욕실로 들어왔다. 이때까진 그를 씻긴다는 것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그가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을 때부터 실감이 났다.
그저 단추를 푸는 행위 자체가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나가는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봐 주길 원하는 듯한 그런 끈적한 눈빛.
물론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단추 푸는 속도가 나를 자극하려는 건지 느려도 너무 느렸다.
아파서 그런 걸 수도 있으니 참으려 했지만, 차라리 내가 벗겨 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저, 노엘! 잠, 잠깐만!”
“…왜?”
이미 단추를 풀어내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검은 액체로 얼룩진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나는 갑자기 긴장해선 고인 침을 간신히 넘겼다. 꿀꺽하는 소리가 하도 커서 그에게도 들렸을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내가 벗겨 줄게.”
“…….”
하필 아직도 내 목에 걸려 있는 마력석이 타오르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화사하고 따듯한 빛이라 생각했건만, 지금은 왜 이렇게 화염에 휩싸인 것 같은지 모르겠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구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냥 알아서 스스로 벗게 놔둘 걸 그랬나. 천천히 단추를 풀게 내버려 둘걸.
하지만 이미 해 주겠다고 했으니 내가 해 줘야겠지…….
“어… 어딘가에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팔 내리고 편히 있어.”
아직 풀리지 않은 아래쪽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 손끝에 그에게 묻어 있던 검은 액체가 들러붙었다.
“리사, 네 손에 더러운 게 묻고 있잖아.”
이제 셔츠의 단추는 다 풀었으니 벗겨내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가 내 손을 멈추라는 듯 움켜쥐었다.
“어차피 씻어내면 되는걸? 좀 끈적거리긴 하지만 괜찮아.”
“그런데 그렇게 입은 채로 날 씻겨 주려고…?”
검은 원피스라 얼룩이 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차피 동굴의 흙까지 묻어 더러워진 옷이었다.
“지금도 더러운 상태긴 해.”
나는 노엘의 손에서 내 손을 가볍게 빼내었다. 그러고는 셔츠를 뒤로 젖혀 그의 팔 밑으로 훌렁 내려 버렸다.
검은 액체가 얼기설기 묻어 있는 가운데 탄탄한 근육의 굴곡이 훤히 드러났다. 생각보다도 매끄러운 피부라 어쩐지 눌러 보거나 만져 보고 싶은 호기심이 들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내 얼굴은 지금 엄청나게 붉어졌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리사도 씻어야 하잖아. 이렇게 된 거… 같이 씻을까?”
“뭐? 미쳤. 아, 아니! 그럼 내가 씻겨 주는 의미가 없잖아!”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훅 들어 올렸다. 잠깐 본 노엘의 얼굴은 어쩐지 요염한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왠지 자꾸만 이상해지는 것 같은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어, 눈을 감고는 그의 하의를 거칠게 끌어 내렸다. 분명 도와주려는 의도였는데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그렇게 얇은 하의 한 장 걸치게 된 그를 욕조 속으로 인도해 밀어 넣었다.
“물 온도 괜찮아? 너무 뜨겁진 않고?”
미용실에서 머리 감을 때 많이 들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날 줄이야. 안타깝게도 나는 누군가를 씻겨 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응, 좋아.”
“다행이다. 그, 그럼… 얼굴부터 일단…….”
물 묻은 천을 접어 든 손이 수전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덜덜 떨렸다.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부터 쓸어내렸다. 그다음은 볼… 코, 턱으로.
그렇게 얼굴의 검은 얼룩이 모두 닦였을 즈음 내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푸, 푸흐흐으…….
입으로 죽을 것같이 숨을 뿜어내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노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뭔가 곤란해 보이기도 하고 심각해 보이기도 한 진지한 얼굴이었다.
꽤 오래 함께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의 표정의 의미는 아직도 의아할 따름이었다. 역시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입술.”
내내 조용히 있던 그가 웬일인지 입을 열었다.
“입술…?”
“입술이 아직 덜 닦인 것 같아.”
“그래? 잠시만 다물어 봐.”
나는 그의 입술을 꼼꼼히 두드리며 닦아 주었다. 특별히 검은 물질이 묻어 있지는 않아서 깨끗해 보였는데, 그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혀로 한 번 훑었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아직도 뭔가 묻은 거 같아?”
이상한데. 하며 그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 검사라도 하듯 입술을 살폈다.
“아니, 그건 아닌데. 나 지금 너한테 조금 껄떡거릴지도 몰라.”
“응?”
짧은 순간 그의 입술이 가까이 있는 내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고는 놀라서 멈춘 나를 다독이듯 다시 한번 핥고 지나갔다. 이어서 내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가다듬으려 하자 그가 아직이라며 부드럽게 밀고 들어왔다.
그렇게 달콤한 척을 하더니, 이내 본성을 드러낸 그는 질기게도 휘감아 몰아쳤다. 틀림없이 내가 먼저 끊어내지 않으면, 이대로 세상이 붕괴하기라도 할 것 같았다.
“흡. 그만! 그마안!”
이 녀석은 환자였다. 환자에게 필요한 건 안정이었다. 괜히 이러다 상처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아니, 핑계였다. 내가 큰일 날 것 같아서 그런다. 주변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사실 내가 타오르며 내는 연기가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간신히 부드럽게 움직이던 얼굴을 떼어낸 나는 천천히 크게 심호흡했다.
“리사, 조금만 더…. 안 될까.”
물이 따듯해서 그런 건지 눈이 아주 훌러덩 풀려 버린 그였다. 그가 너무 몽롱해 보여서 혹시나 기력을 잃고 있는 건 아닌지 급히 걱정되었다.
“노엘, 어디 아파? 정신 차려 봐!”
나는 그의 턱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취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해서 손으로 찰싹찰싹 가볍게 때리기도 했다. 그랬더니 노엘의 눈썹 끝이 날카롭게 뻗어 올랐다.
“내가…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여?”
“어…?”
응,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