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뭐? 아, 알았어. 알려 줘서 고마워.”
내가 그를 끌어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그 힘이 내 온몸을 부숴 버릴 듯이 조여 왔다. 그렇다고 정말 숨이 막히거나 고통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말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슬며시 눈꺼풀을 위로 접어 올렸지만, 얼굴이 그의 품 안에 푹 박혀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목을 옆으로 틀려고 하면, 내 목덜미를 쥔 토드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저… 토드? 이제 다 지나간 거 같지 않아? 눈 떠서 한번 봐 봐.”
“그래…? 잠시만.”
그는 얼굴을 빠르게 빼꼼 드는가 싶더니 다시 내게 파묻어 왔다.
“……어때?”
“아직… 많이 있는데?”
“응? 정말…? 이상하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걸?”
“당연하지. 거미들이 지금은 움직이지 않고 있거든.”
뭔가 이상한데, 이 이상한 느낌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곳에 이러고 있은 지도 꽤 오래된지라 이젠 감도 떨어진 듯했다.
“잠시 내가 한번 봐도 될까?”
하도 이상해서 고개를 돌리려 힘을 주었는데, 토드의 손이 나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내 목을 꽉 감싸 붙들었다.
“아니, 보지 마. 그랬다간 네가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 녀석, 어차피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나.
“어차피 날 죽일 거라면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말했잖아. 이 동굴을 나갈 때까진 살아 있어야 한다고.”
“그랬지. 하지만 저쪽 끝에 출구가 얼핏 보였던 것 같아.”
“그래서 지금 널 죽여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는 거야? 무서워서 살려고 내게 안겨 벌벌 떨 때는 언제고…….”
“일단 내 목을 잡은 손 좀 놔줄래? 나도 내 눈으로 상황을 한번 보자니까?”
“……싫어.”
……?
얘가 뭐라는 거야. 대체 왜 이러는데!
“지금 장난쳐?”
나는 토드의 허리를 감았던 손으로 그를 밀어내길 시도했다. 새삼 그의 딱딱한 복부 근육이 느껴져 놀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미쳤어…? 그런 건 네 애인이랑 하란 말이야!”
“너잖아. 내 애인.”
나는 토드의 품에서 벗어나려 힘껏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꽉 조여 와 결국에는 제풀에 지쳐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딱 10초만 가만히 내게 안겨 줘. 그럼 풀어 줄 테니까.”
“10초……?”
10초쯤이야….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의문을 품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더욱 선명해지는 싸한 감각이 나를 휘감아 비틀어 버리는 듯했다.
10분 같았던 10초가 지나고, 토드는 군말 없이 내게서 몸을 떼었다. 고개를 든 순간 보인 건 그의 즐거운 듯한 미소였다.
무언가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거미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아까 다 지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였다. 이어지는 좁은 통로, 그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운 작은 공간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어두운 공간이었음에도 그 안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내 시선을 빨아들였다.
경계하며 가만히 보고 있으니 뒤에서 토드가 내게 귓속말했다.
“어쩌지? 우리의 진한 포옹을 녀석이 보고 있었던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설마설마하며 미간을 좁혔다.
“노엘을 말하는 거야?”
정말 노엘이라고?
“응, 잘 봐 봐.”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검은 실루엣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마력석이 내뿜는 주홍 불빛의 범주 안으로 들어온 노엘은 검은 액체를 뚝뚝 떨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그의 피인 줄 알고 놀라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의 피가 아님을 확인하고는 철렁하던 심장을 부여잡았다.
“노엘? 괘, 괜찮은 거야……?”
꼭 검은 액체로 세안한 사람처럼 얼굴의 절반이 감작감작했다. 상체는 말도 아니었다. 거의 검은 액체에 몸을 담갔다 나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찾기 위해 붉은 괴물들을 마구잡이로 베고 다니기라도 한 건지.
그의 손에 들린 차갑고 깨끗한 검만이 소스라칠 정도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리사…, 왜 저 자식 품에 순순히 안겨 있던 거야?”
이제야 토드가 10초만 가만히 있어 달라고 했던 게 이해되었다. 노엘이 보고 있던 걸 알고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홀랑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하지만 내 감각을 믿었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음은 분명했다.
내 힘만으론 토드에게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테니까. 게다가 계속해서 좁은 길을 비집고 오느라 몸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거미들에게 시달려 기운도 다 빠져 버렸다.
“노엘, 오해야.”
검은 액체 한 방울이 노엘의 머리카락을 타고 뚝 흘러내렸다. 그 떨어지는 한 방울에 잠깐 시선을 던지던 노엘은 곧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검은 액체가 들어가 스며든 한쪽 눈동자는 탁해져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저 손에 꽉 쥐어진 검에 지금 당장 베여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흉흉한 분위기였다.
“리사, 오늘 정말 즐거웠어.”
두려움에 사로잡힐 찰나 뒤에서 토드가 밝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바람에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룩 맺혔다. 나는 그가 더 이상 노엘을 자극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작별을 고하는 토드를 무시하고 노엘의 손을 맞잡았다. 검은 액체가 그의 손등을 타고 내 손으로 흘러내렸다. 차갑고 끈적한 느낌이 썩 좋을 리 없었다.
이 와중에 검은 액체로 뒤덮인 몸 어딘가에 상처가 있진 않을지 걱정되었다.
“돌아가자. 노엘….”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지만, 그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환하게 웃고 있는 토드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토드는 내 초조함을 읽었는지 더욱 활짝 웃으며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는데, 나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오랜만에 네 향기를 마음껏 맡은 거 같아. 리사, 다음에도 그렇게 나 좀 안아 줘.”
“토드, 그만해. 그런 거 아니잖아.”
기가 찼지만 나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낮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그는 더욱더 신난 모양이다. 그러는 모습을 보자니 갑자기 사람이 치졸해 보였다.
“정말 행복했어. 날 그렇게 꽉 끌어안아 주다니.”
토드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고, 기함한 나는 크게 뜬 눈으로 욕을 했다.
검은 액체를 뚝뚝 떨구며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노엘은 별안간 토드를 향해 그대로 돌진해 버렸다. 내 손을 놓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노엘은 어느샌가 토드의 목을 움켜쥐고 꾹 누르고 있었다.
벽까지 한순간에 밀어붙여진 토드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는데, 시선 역시 노엘이 아닌 나를 향했다. 눈앞의 노엘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은 눈동자였다.
“노엘, 그만!”
나는 곧장 달려가 둘을 떼어 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토드의 숨통을 당장이라도 끊을 기세인 노엘의 성난 팔을 붙잡은 순간 그 어마어마한 힘과 단단함에 놀라고 말았다.
내가 과연 노엘을 말릴 수 있을까. 생각조차 하기 버거울 정도였으나, 이대로 두었다간 토드의 숨이 정말 넘어갈지도 몰랐다.
나는 무섭게 웃고 있는 두 미친놈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무서워.’
당장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떻게 해야 노엘이 토드에게서 손을 뗄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그가 후회할 짓을 못 하게 막을지.
아아, 대체 어떻게 하면……!
“노엘, 알잖아. 나한텐 네가 최고라고.”
계획대로라면 그의 눈빛이 바뀌어야 했는데, 실패한 모양이다.
“……토드, 널 당장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거야.”
“…그렇다는데? 리사, 네 최고인 노엘이 날 죽이기 전에 한 번만 더 안아 주면 안 될까?”
“너 이 자식…!”
간만에 ‘최고’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노엘의 분노에 처참히 휩쓸려 간 모양이다. 효과가 전혀 없었으니, 재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를 데리고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좀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겠지. 심호흡한 나는 더는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실행하기로 했다.
‘하, 할 수 있어!’
하기도 전인데 벌써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윽고 나는 손을 뻗어 노엘의 턱을 잡아 나를 보게 했고, 그의 입가에 묻은 검은 액체를 쓰윽 문질러 닦아냈다. 그러고는 곧장 내 입술을 가져다 포개었다.
양 볼을 감싸 안은 내 두 손이 점점 미세하게 떨려 왔지만,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입술을 퍼부었다.
코앞에 관객이 하나 있다는 건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노엘이 더 돌아 버리기 전에 붙잡아야만 했다.
내 허세 가득한 입술 공세에 노엘의 힘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그의 입술이 활짝 벌어지며 나를 더욱 깊숙이 끌어들였다.
정신 차려 보니 언제부터인지 그는 토드를 놓아준 뒤였다. 토드를 잡던 그의 두 손은 내 턱을 감싸고 있었다. 목이 놓아진 토드는 그제야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헛기침을 해댔다.
눈을 뜬 나는 토드가 풀려난 걸 보고 안심했는데, 그런 내 시선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노엘의 붉은 눈이 나를 사로잡았다.
“노엘…, 이제 그만…!”
언제 벽으로 몰렸는지 차갑고 딱딱한 곳에 등이 닿아 깜짝 놀라 움찔했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노엘이 한 손으로 내 허리를 휘감아 제 몸에 더욱 밀착시켰다. 그러니 저절로 등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