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벌레 자식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나 상처받았어.”
“지금 그게 중요해?”
“……너무해!”
리마는 차오르는 눈물을 꿀꺽꿀꺽 삼키며 콧물부터 쏟았다.
흘러내리는 콧물을 세 번째 다리로 스윽 닦는데 베키가 진지하게 물었다.
“너, 여기서 잠시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으아아! 그건 무리라고! 절대 안 돼.”
리마는 베키의 치맛자락을 세 번째와 다섯 번째 다리로 부여잡았다. 베키는 리마의 콧물이 묻었을까 봐 불쾌하다는 얼굴로 옷을 탁탁 털었다. 터는 김에 리마의 다리도 은근슬쩍 쳐냈다.
“……그럼 먼저 6층으로 올라가 있어.”
“뭐야? 그럼 넌 어떡하려고?!”
“노엘이 어쩌고 있는지 가 보게. 가서 조금만 살펴보고 나도 따라 올라갈게.”
“호, 혼자 괜찮겠어?”
리마는 이미 큰일이라도 난 듯 다리들을 덜덜 떨고 있었다.
“겁쟁이 주제에 나를 걱정하는 거야? 따라올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의리는 있는 리마였다. 이대로 베키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베키가 자칫 잘못되면 자신의 탓으로 돌려 괴로워할 게 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리마였다.
“가, 같이 가자. 베키 귀신! 나도 함께하겠어.”
잔뜩 울상을 짓는 리마를 보며 베키는 입꼬리를 은근히 들어 올렸다.
“그래, 그럼 잘 따라와.”
둘은 계단 근처를 벗어나 곧장 복도로 진입했다.
어째선지 복도에서 우글거리던 괴물들은 사라진 상태였는데, 둘은 의아해하며 북적거리던 근처의 방으로 달려가 보았다.
푸슉!
이윽고 맞닥뜨린 장면은 노엘이 괴물의 몸에서 검을 빼내는 순간이었다.
붉은 괴물들이 여기저기 힘없이 널브러졌으며, 그들에게서 나온 검은 액체들이 사방에 덕지덕지 튀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같이 생긴 덩치 큰 초록색 피부의 괴물.
방금 막 그것의 심장을 찌른 노엘이 깔끔하고 신속하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버렸다.
쿠궁!
거대한 괴물이 쓰러지자 검은 액체를 울컥울컥 뿜어냈다.
온몸이 검은 액체로 뒤덮인 노엘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그 눈이 서서히 베키와 리마에게 향했고, 베키와 리마는 입을 열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너희…, 지금쯤이면 올라가 있어야 할 시간일 텐데. 어째서 이리로 온 거지?”
낮고 묵직한 음성.
질문이 아닌 질타의 목소리였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도 마주한 듯 둘은 그저 대답도 못 하고 눈알을 떨었다.
휘릭!
노엘이 느릿하게 들어 올린 검을 허공에 휘두르자 마지막 남아 있던 까만 핏방울이 떨어져 나갔다.
노엘은 말 못 하는 둘을 뒤로하고 괴물들이 들어가려 애썼던 조그마한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몸이 끼어서 들어가지 못한 붉은 괴물의 잘린 몸통을 끌어내자, 막혀 있던 구멍에서 냉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이 굴이 어디로 이어졌더라…….”
그는 튀어서 묻어 있던 검은 액체가 눈으로 흘러 들어가자 손등으로 한 번 쓱 닦고는, 다시 베키와 리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만 있지 말고 온 김에 아는 게 있으면 말 좀 해 봐.”
방바닥은 온통 검은 액체와 괴물 시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걸 혼자서 다 베어 버리다니.’
베키는 동굴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었지만, 알려 주기가 꺼림칙해진 참이었다.
광기에 휩싸인 그가 토드와 리사를 찾는다 해도 토드가 무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던 베키는 별수 없다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어. 5층으로 이어져 있으니 올라가자.”
“그래? 그럼 그리 가야지. 어서 가자.”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노엘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시체들을 꾹 밟고 지나갔다.
“노엘…, 괜찮은 거야?”
더듬이를 프로펠러처럼 떨던 리마가 그의 등에 대고 소심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리사가 위험해…. 그러니 지금 내가 괜찮을 리가 없겠지?”
“…….”
어쩐지 소름 돋는 말투에 리마는 더 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렇게 셋은 다시 계단으로 돌아왔다. 5층으로 올라가는 길엔 다행인지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해. 왜 더 올라오지 않는 거지? 소리도 조용한 것이…. 꼭 누군가 일부러 괴물들을 멈춰 세운 느낌이야.”
“내가 아래를 좀 살펴보고 올까? 굴이 이어지는 곳은 5층 왼쪽 맨 끝 방으로 가면 돼.”
“그래, 부탁할게.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이니. 무리하진 말고.”
“응, 너도….”
리사를 구해 줘. 그리고 토드를 죽일 건 아니겠지?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삼킨 베키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리마, 너는 6층으로 가서 녀석들과 합류해. 겨우 하나 더 올라가는 거니 그 정도는 혼자 갈 수 있겠지?”
노엘이 하도 정신 나간 눈빛으로 쏘아보는 탓에 리마는 그럴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으, 응! 혼자서도 그 정도는 갈 수 있어. 조, 조심해…! 노엘.”
“그럼 어서 올라가 봐.”
그는 리마가 기어코 올라가는 모양새를 보고 나서야 자신도 갈 길을 가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츠스스스. 츠스스스.
리마는 눈을 부릅뜨고는 재빠르게 벽을 타고 올라가 버렸다.
리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노엘도 안심한 듯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점점 빨라지던 걸음은 어느새 뒤덮었던 검은 액체를 뚝뚝 떨구며 달리고 있었다.
***
타란툴라 같은 검고 큰 털북숭이 거미들이 하나, 둘, 셋…….
사방에서 나타난 거미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넓게 깔렸다.
“토, 토드……!”
나는 무의식적으로 토드를 인형처럼 안아 버렸다.
그 바람에 토드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를 내치거나 떼어내려 하는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설령 그러려고 하더라도 내가 더욱 딱 달라붙어 떼어낼 수 없을 것이었다. 한 마리도 무서운데 수백 마리가 나타났으니까.
지금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누굴 껴안고 말고가 무슨 문제란 말인지.
“티, 티나가 그랬어. 절대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고! 그럼 알아서 지나간대.”
나는 티나가 했던 얘기를 떠올리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네가 티나는 또 어떻게 아는 거야……?”
토드가 고개를 떨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궁금해하거나 말거나 더욱 밀착해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아예 그의 너른 가슴에 코까지 박고는 덜덜 떨고 있었다. 홀로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리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걸 느껴 버렸기 때문이다. 분명 털 달린 그것의 감촉이 선연했다.
거미를 만져 본 적은 없었지만, 그것이 아니고서야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올 것이 없지 않은가.
“흑… 토드…. 내 다리에 붙은 게 올라오고 있어…….”
그나마 뭐라도 껴안고 붙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토드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곳에 들어올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이 녀석이 미워지려고 하는데, 내 허리에서 무언가가 또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선 더욱 부르르 떨었는데 알고 보니 토드의 손이었다. 손 놓고 있던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았던 것이었다.
그러니 안정감이란 측면에선 조금 더 나았다. 어딘가에 포옥 그리고 꽈악 감싸져 있는 느낌에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
“조금만 참아. 지금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어.”
“흐으윽. 흐아으…….”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소리가 가까워져 계속해서 내 앓는 소리로 들리지 않게 메우던 중이었다.
토도독. 토도독. 토도도도독.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수백이니 무슨 거미 군단이라도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거미들에 파묻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다 들 정도였다.
그 와중에 다리에 있던 거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툭!
내 어깨 위로 무언가 있는 듯 없는 듯 간지럽게 내려앉았다.
거미가 뛰어오른 건가.
나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었다. 계속 반복되다 보니 꽉 다문 눈에서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내렸다.
“너…. 거미를 무척… 무서워하는구나.”
토드의 손 하나가 내 뒤통수로 올라와 머물렀다.
따듯하게 감싸는 그의 손이 괜찮다고 토닥이는 듯 느리게 문질렀다.
“넌 무섭지 않아…?”
“무섭진 않아. 근데 이렇게 많으니 조금은 무서운 것 같기도 하네.”
“지금은 얼마나 지나갔어?”
이 상황에서 차분하게 눈을 뜨고 있을 정도라니. 그가 정말 부러웠다. 세상엔 내 생각보다도 벌레 친화적인 사람이 많은가 보다.
“아직 한참은 남은 것 같아. 게다가 지금 네 등에도 이렇게나 많이 붙어 있고…….”
“흐으윽. 끄으으윽! 이제 말하지 말자. 말하다가 입 속에 거미가 들어오면 어떡해!”
방금 막 알았는데 나는 복화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도 이를 꽉 깨물어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나는 토드의 가슴에 더욱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공기조차 통과하지 못하도록 끌어당겼다.
하나뿐인 내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기를 반복하며 주의를 분산하니 좀 낫긴 했다. 거미가 내 몸의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보니 어깨에 있던 무게감이 어느새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리에서 느껴지던 털의 감촉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다… 지나갔나?”
귀를 기울이니 거미들 특유의 발소리도 이젠 없어진 것 같았다.
“아니……. 아직 많아.”
“그래…?”
이상하네.
정말인가 싶어 눈을 뜰지 말지 고민하다가 한번 떠 보려고 할 즈음.
토드가 상체를 더욱 숙여 나를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목덜미 위로 그의 따듯한 숨결이 닿을 정도였으니 아까보다도 훨씬 포근해지고 안정감이 들었다.
“나… 아무래도 거미가 무서운 거 같아.”
“뭐, 어?”
갑자기 안 무섭던 거미가 무서워지는 게 가능한 건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그래서 더는 눈도 못 뜨고 있겠어.”
“그, 그렇구나. 무서우면 너도 눈 감고 있어!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 아주 조금이지만.”
“응……. 너도 눈 꼭 감고 있어. 지금 되게 많이 지나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