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정말 부러운 능력이다.
“무섭지 않아?”
[거미들이 함께해 줘서 그런지 여기까지 오면서도 무섭지 않았어요.]
노랗게 땋은 머리를 한 그녀는 활짝 웃어 보였다.
이곳까지 오느라 더운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팔로 땀을 쓰윽 닦으면서도 거미가 떨어지지 않도록 배려까지 해 주는 그녀였다.
“그런데 왜 이런 길로 다니는 거야?”
[나쁜 사람들이 쫓아오고 있거든요. 티나와 거미를 실험실에 잡아넣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티나는… 거미가 죽는 게 싫어요.]
“……그랬구나.”
이 아이도 이렇게 쫓기다가 결국 붙잡혔구나.
타란티나의 괴팍한 성질과 거미 다리가 무서워 말도 못 붙였었는데, 어쩐지 조금 후회되었다. 말 한마디 정돈 걸어 볼걸.
평소 그녀가 내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무서워서 피하기 바빴는데.
이런 안쓰러운 모습을 마주하고 나니 좀 더 따듯하게 대해 주지 못했던 게 못내 신경 쓰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다시 한번 곁에 있던 소중한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언니도 힘내세요. 이 길을 쭉 가다 보면 출구가 연결된 큰 공간이 나오거든요! 거기엔 거미들도 많이 살아요.]
윽!
“나, 나는 거미는 진짜 너무 무서운데…….”
[무서워요? 흠…… 곤란하네요. 이렇게 착한데요. 거미는 언니를 해치지 않아요.]
티나는 제 어깨로 올라온 거미를 작은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나는 거미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티나의 말이 어쩐지 뭉클했다.
“거미가 많다면 대체 얼마나 많이 있다는 거야?”
[엄청 많아요. 어어엄청! 셀 수 없이, 많이.]
티나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들며 원을 그렸다.
그와 함께 내 심장은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며 추락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지는 걸 느끼며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티나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언니. 무섭다고 빠른 속도로 도망치거나 위협을 가하면 안 돼요.]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거미가 나한테 붙으면 어떡해?”
[바위처럼 가만히 있으세요. 그럼 금방 지나갈 거예요.]
“바위가 되란 말이지? 알았어. 네가 말한 대로 해 볼게.”
[언니라면 괜찮을 거예요. 그럼 티나는 가 볼게요. 이 별장을 꼭 탈출할 거거든요!]
그 활기찬 마지막 말에 나는 가슴이 짠해지고 말았다.
“티나, 여기로 쭉 가다간 크…. 크…….”
큰일 난다고 말해 주는 것도 역시 무언가의 힘으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과거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음을 알고는 있었다. 결국 티나를 이대로 보내 주는 수밖에 없나 보다.
[크…?]
“아니야…. 티나. 우리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똘망똘망한 그녀의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응! 언니! 우리 다음에 볼 땐 무섭지 않은 곳에서 만나요. 그때도 티나의 언니가 되어 줄 거죠?]
“……응! 그럴게.”
[티나는 머리 쓰다듬어 주는 거 좋아해요. 그러니까… 다시 만나면… 꼭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티나는 거미로 뒤덮인 자기 머리 꼭대기를 가리키며 귀엽게 얼굴을 붉혔다.
“알았어. 꼭 쓰다듬어 줄게.”
[그럼 언니, 안녕.]
티나의 환영은 곧 나를 통과해 지나쳤다. 손바닥 안의 붉은 보석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타란티나.
그 녀석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드시 이곳을 살아서 나가야겠다는 의지가 다시 생겨났다. 그렇지 않으면 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도 없겠지.
‘역시 토드한테 죽을 순 없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 쉬었으면 이제 갈까?”
때마침 뒤에서 토드가 재촉해 왔다. 아주 작게 말하긴 했지만, 그가 들을까 봐 신경 쓰였었는데 다행히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모양이다.
“응.”
나는 다시 무릎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떨어져 내리는 흙먼지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참이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티나의 말대로 넓어 보이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잠시나마 더욱 작아졌지만, 겨우 몸을 비틀어 나올 수 있었다.
파하!
살짝 떨어지듯이 빠져나오자 그냥 넓어 보이는 정도가 아닌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천장엔 고드름같이 생긴 돌들이 가시처럼 길게 내리뻗었고, 검은 웅덩이가 듬성듬성 바닥에 원을 그렸다. 미끄러워 보이는 벽은 막상 만져 보면 거칠었다.
“크윽!”
토드의 신음에 뒤를 돌아보니 출구 구멍에서 몸이 끼었는지 못 나오고 있었다.
거의 반쯤은 나온 상태였지만, 아마 골반에서 걸렸으리라고 짐작되었다.
“토드, 허리를 좀 더 비틀어 봐.”
아니, 말해 주지 말 걸 그랬나…?
이대로 나 혼자 가 버릴까. 그럼 토드가 날 죽이지도 못할 텐데.
마음의 소리가 귀에서도 울리는 듯했다. 매혹적인 속삭임에 정말 날아갈 듯이 발을 떼어 버릴 뻔했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의 소리가 나를 제지했다.
‘이대로 가 버리면 토드를 구하러 온 의미가 없잖아. 게다가 이렇게 된 채로 두고 간다면 여기서 그가 죽을 수도 있다고.’
베키와 노엘이 그렇게 된 사실을 알면 슬퍼하겠지.
흑…….
내가 노엘을 좋아하게 되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단지 그 이유뿐만은 아니란 걸 나도 잘 알고는 있었다. 단순하게도 이 녀석들이 귀신이든 뭐든 간에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고 만 것이었다.
실험체가 아닌 자유로운 몸으로 말이다.
어느새 노엘뿐 아니라 다른 녀석들한테까지 정이 들었나 보다.
“토드…. 나를 꽉 잡아.”
나는 몸을 비틀며 낑낑대는 토드를 향해 양팔을 활짝 내밀었다.
토드가 팔을 쭉 뻗어 내 어깨를 감싸듯 잡았고, 나는 몸을 뒤로 젖히며 힘을 주었다.
끄으으으악!
온몸을 쥐어짜듯 힘을 냈다. 그렇게 한참을 요리조리 끙끙대고 나서야 진전이 생겼다.
허리를 조금씩 비틀어 보던 토드가 마침내 코르크 마개처럼 뽁! 빠져나왔고.
“꺄악!”
“으윽!”
반동으로 인해 둘 다 바닥으로 쓰려졌다. 여전히 내 어깨를 꽉 붙잡은 토드는 내 몸을 덮고 축 늘어졌다.
“무거워…. 토드…….”
양팔을 옆으로 활짝 벌리고 뻗은 나는 어서 그가 비켜 줬으면 했지만, 생각보다 그의 행동은 느릿하게 이어졌다.
상체만 살짝 들어 올린 그는 그대로 엎드려선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
무언가 복잡한 심경이 잔뜩 담긴 얼굴이라, 나는 그저 그의 연한 푸른 눈동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토드…?”
“지금은 네게 입을 맞춰도 소용없는 거겠지…?”
“……응, 그래 봤자 이 몸의 진짜 주인은 아무것도 모를걸.”
그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 내쉬는 한숨이 깊은 괴로움을 토로하는 듯했다.
“나 말이야. 리사랑 서로 마음이 통했을 때 한 번도 입술을 맞춘 적이 없었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강제로라도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할 걸 그랬어.”
“글쎄 어차피 너는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그러지 못할 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떨리는 눈을 한 그가 내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내게 보내는 눈빛은 아니었다. 아마 그때의 리사를 떠올리고 있겠지.
“너는 언제나 다정했고…. 그녀를 아주 소중히 여겼으니까. 그녀가 원치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으니까.”
토드는 항상 그녀의 앞에서 밝게 웃으려 노력했고 활발한 척을 잘했다.
하지만 노엘과 다를 바 없는 집착을 가진 녀석이었다. 단지 노엘보다 밝고 긍정적인 연기를 잘했을 뿐.
어딘가 무서운 부분이 있는 것도 똑같았으니, 피를 나눈 형제라 해도 믿을 수 있겠다.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 그렇게 나를 잘 아냐고.”
좁아진 그의 미간이 똑바로 날 향했다.
나는 베키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 부분에는 과거 리사의 말을 전한 게 컸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토드에 대한 언급은 없어서 아쉬웠다.
그녀라면 토드에게 무슨 말을 전했을까.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을지.
하지만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굳이 내가 상상할 일도 아니겠지.
“나는 여기서 일어난 과거의 일을 볼 수 있어.”
“뭐…? 그게 가능해?”
아주 당황한 모양새였다. 베키도 그랬으니 놀랄 일이 아니긴 했다.
“그래서 알고 있어. 네가 그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웃기지 마. 거짓말로 날 현혹할 생각이라면 나한텐 안 통해.”
나는 붉은 보석을 통해 보았던 일들을 하나씩 시간 순서대로 차분하게 나열했다.
천천히 또박또박 얘기하자 그의 안색이 점점 달라졌다. 반응을 보니 멈추어도 되겠다 싶어서 대충 중간에서 끊었다.
이 얘기를 더 했다간 여기서 나가는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 이래도 못 믿겠어?”
“…….”
그가 뭔가를 유심히 고민하는 듯해 나도 더는 재촉할 마음이 없어졌다.
그보다 여기서 연결된 길을 찾아야 했는데…….
누워 있는데 위쪽 어딘가에서 토독토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도독. 토도도도. 토독토독.
그러더니 사방에서 토도독거리는 것이었다.
“토드…. 이게 무슨 소리지?”
말을 내뱉은 순간 거미들이 움직이는 소리란 걸 짐작했다.
토드는 급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몸을 이끌고 벌떡 단숨에 일어났다.
그의 눈매 또한 가늘어진 걸 보니 몹시 긴장한 모양이다.
얼떨결에 같이 훌러덩 일으켜 세워진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이내 숨이 멎을 것 같은 광경이 우릴 덮쳐 왔다.
***
노엘이 말한 시간이 되었지만 돌아오지 않자, 베키와 리마는 이대로 그를 두고 6층으로 합류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고민했다.
원래라면 고민 없이 올라가는 게 맞는 일이었지만, 차마 그리할 수 없었다.
“저… 베키. 어떡하지?”
츠스. 츠스. 츠스.
리마는 평소보다 산만한 소리를 내며 불안에 떨었다.
그 소리에 베키는 소름 끼친다며 머리카락으로 그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럴 때마다 리마의 몸통 마디가 삐그덕거리며 물결쳤다.
“조용! 조용히 좀 해! 이 벌레 자식!”
몸통의 마디들을 바들바들 비틀던 리마는 겨우 진정해선 엄마 잃은 눈으로 베키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심술이라도 났는지 금세 입을 삐죽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