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런데 왜 그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그럼 네가 날 두려워하고 도망갈까 봐 그랬지.”
“내가 도망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네가 도망가면 내가 원하는 대로 죽일 수 없게 돼 버리잖아. 난 아무도 모르게 널 죽이는 게 목적이거든. 누군가와 시비 붙을 틈도 없이 깔끔하게.”
바라보던 좁은 구멍에서 차디찬 바람이 스며들어 와 내 심장을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미약하게나마 바람이 흐르는 걸 보니 어딘가 출구는 있는 모양이었다.
기어 오며 흘렸던 땀들이 증발하니 머리도 텅 비운 듯 시원해졌다. 시원하다 못해 개운하고 상쾌해질 지경이었다.
“그럼 지금 죽이면 되겠네.”
머릿속이 상쾌해졌지만, 제정신을 되찾은 건 아니었다.
“미안한데. 여기선 곤란해. 그녀를 되찾으려면 시체라도 그 몸이 꼭 필요하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여기서 죽으면, 내가 시체가 된 그 몸을 이끌고 이 동굴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나 혼자서 끌고 가기도 힘들 거고, 앞으로 어떤 길이 나올지 모르잖아.”
공포로 가출했던 제정신이 갑자기 한꺼번에 돌아와 버렸다.
미친놈이었다. 토드가 이런 미친놈이었다니 눈이 저절로 까뒤집어질 노릇이었다.
“……?”
“그러니까 네 발로 일단 여길 나가 줘야겠다는 말이었어. 알아들었으면… 이제 갈까?”
내 어깨에서 고개를 뗀 토드가 눈을 마주쳐 왔다. 숨결도 닿을 거리에서 제 얼굴을 내게 들이민 것이었다.
코앞에서 스산하게 웃는 그를 보니 다시 한번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틀어 올라간 그의 입꼬리처럼 내 목도 비틀릴 것만 같았다.
“아니, 나 무섭… 무섭다고.”
그러니까 저기 들어가는 것도 무섭고.
너는 더 무섭다고!
내가 시체처럼 딱딱해져선 굳어 있으니 토드가 내 등을 떠밀었다.
그의 손이 등에 미지근하게 닿았을 뿐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 어서 가자.”
엄마…. 나 어떡해.
심장이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는 들을 수 있을 리 없겠지.
상큼하고 쾌활한 훈남인 줄 알았던 토드가 이런 쾌활한 미친놈일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나. 그가 노엘의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토드를 구하러 가라던 의문의 역적 같은 목소리는 역시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 목소리가 말한 대로 해서 잘못된 경우가 없긴 했지만, 결과는 좋았을지언정 과정은 험난했던 걸로 기억한다.
“토, 토드. 이번엔 네가 앞장서지 않을래? 그러면 조금 덜 무서울지도…….”
“그래? 흠……. 하지만 내가 앞에 있으면, 네 몸이 끼었을 때 도와줄 수 없잖아.”
토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앞으로 이것보다도 더 좁은 구간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거기다 몸을 비틀어야 하는 순간이 나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해서 빠져나가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라니. 뭐 이런 억울한 상황이 다 있을까.
“알았어…. 앞서서 어떻게든 가 볼게.”
“그래, 그래야지. 반드시 무사히 그 몸을 이끌어 줘. 상처 하나라도 생기면 내 가슴이 무척 아플 거야.”
토드의 곱게 휜 눈매를 보자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러던 중 그의 허리춤에 꽂힌 중간 크기의 검이 시선에 들어왔고, 내 눈을 의식한 토드가 검에 자기 손을 살며시 가져다 올렸다.
“왜…, 이걸 빼앗아 날 베어내려고?”
고개를 기울이며 날 올려다보는 그는 여전히 경쾌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긴. 하지만 이해해. 괜찮아. 나라도 당장 그렇게 했을 거 같거든.”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오싹한 미소를 피했다.
“그럴 거였으면 네게 오지 않았겠지. 난… 너를 구하러 온 거였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내가 네 정체를 알아챈 걸 알면서도 4층으로 내려온 거였어.”
“그렇다니까.”
“대체 왜 그랬을까……. 그건 꽤 궁금해. 멍청해서 그런 걸까?”
아니, 대놓고 보는 앞에서 멍청하다고 하다니.
머리꼭지가 뒤틀리는 느낌에 나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가까이 들이민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소심하게 살짝 밀어냈다.
마음 같아선 밀어 버리는 게 아니라 빡! 때려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를 자극해서 좋을 일은 없겠지.
확실한 건 이 동굴 안에서만큼은 그가 날 죽일 염려는 없다는 것인데, 그럼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굴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자 주둥이가 되살아나는 듯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난 네가 노엘과 베키의 친구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어. 네가 잘못되면 친구들이 슬퍼할 테니까.”
“…….”
말똥말똥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짧은 순간 움찔했다.
“그러니까 나더러 멍청하다고 하진 말아 줘. 물론 네가 그들의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땐 마음껏 비웃어도 좋아.”
“…….”
할 말을 마친 나는 비좁은 동굴로 몸을 구겨 넣었다.
부스스스. 내 몸에 닿은 흙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져 내렸다.
콜록.
대답 없이 내 말을 경청하던 토드도 곧장 내 뒤로 따라붙었다.
“네 정체를 아는 사람…. 나 말고 또 있어?”
“베키.”
“베키가 알고 있었다고?”
“응….”
“그런데도 널 살려 두었다는 소리야?”
“어.”
“이해가 가지 않는군. 게다가 나한테까지 숨기다니…….”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옆으로 꺾이는 길을 마주하게 되었다.
간신히 옆구리를 비틀며 비집고 들어가자 이번에는 바로 올라가는 길이 나왔다.
거의 일어서야 오를 높이였고, 실제로도 엉거주춤 일어선 후에야 그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무슨 개미굴에라도 들어온 것 같다. 차라리 개미굴이었으면 나았으려나? 두더지도 이렇게 힘들게 다니진 않겠다.
그래도 아까보단 좀 적응되었는지 두려움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무슨 길이 나올지 몰라 극도로 긴장되는 건 여전했다.
계속해서 좁고 어려운 길을 기어가다 보니 다시 땀을 흘릴 정도로 더워졌다.
‘쉴 곳이 필요해……. 쉬고 싶어.’
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려면 계속해서 오르막을 기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네발짐승이 될 것만 같았다. 두 다리로 다닐 때가 너무 그리웠다. 조금이라도 넓은 공간이 나와 주면 좋을 텐데.
힘이 다 빠져서 결국 멈추고 말았다.
“힘들어?”
예상대로 뒤에 있던 토드가 한마디 했다.
“조, 조금만 쉬었다 가자.”
헉헉.
나도 모르게 참고 있었는지 숨이 급격히 차올랐다. 물속에서 깊숙이 잠수라도 하다 나온 것 같은 기분에 폐가 아플 정도로 들쭉날쭉하며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그렇게 풀썩 엎드린 채로 뻗어 버렸고, 뒤에서 토드도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힘을 놓았다.
“넌 거짓말도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어. 리사라는 이름에 어떻게 자기 이름인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가 있어?”
거친 숨이 조금씩 가라앉는 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리사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진짜 내 이름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이 몸에 빙의하기 전 내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진짜 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가족의 얼굴도, 내 진짜 이름을 잊은 것도 부작용이 원인이겠지.
“그냥…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내 이전 이름도, 가까웠던 인물도 기억이 전혀 안 나지만 말이야.”
“그래.”
“이곳을 빠져나가면… 정말 날 죽일 거야? 나를 죽이면 그녀가 돌아온다는 거 확실해?”
“확실해. 내 맘은 변하지 않아.”
“그런데 네가 살인자가 되어도… 리사가 널 좋아해 줄까? 고마워할까?”
“…….”
“나는… 고맙지 않을 것 같아.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한 게 나 때문이라면… 죄책감만 들 것 같거든.”
“…….”
“아무튼 네가 날 죽이면……, 내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그녀에게 이르러 갈 거야. 네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고.”
이런 대화를 하며 농담이 나오냐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농담이 아닌 진심이었다.
엄청난 원한이 맺혀 베키보다 더 무시무시한 귀신이 될지도 모르겠다.
산소가 또 부족해지나…? 싶은 찰나 방금 막 쭉 뻗은 오른손에 매끄러운 것이 만져졌다.
고개를 간신히 들어 보니 붉은 보석이 손에 걸려 있었고, 인지하자마자 환영이 나타났다. 이런 곳에서 붉은 보석을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필이면 거미줄이 사방에 처져 있는 환영이었는데, 이게 환영이 아니었다면 아마 내 무덤은 이 자리였을 것이다.
촘촘하고 탄탄해 보이는 거미줄이 아예 좁은 구멍을 틀어막기도 했다. 닿지 않는 환영 속 거미줄이었지만,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하기엔 충분하고도 넘쳤다.
‘이…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눈물이 찔끔 나선 기어 다니는 검은 털북숭이 거미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내 얼굴보다도 큰 거미 다섯 정도가 사방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이쪽으로 기어 오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아이인데…….’
티나라고 했던가?
분명 붉은 보석의 이야기에서 보았던 여자아이였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다시 보니 확실히 타란티나였다. 타란티나의 얼굴을 아주 작게 축소하면 나오는 이목구비.
타란티나도 융합 실험의 피해자였지. 혼자 이곳으로 도망이라도 쳤나.
[언니…. 이곳으로 계속 가면 나갈 수 있어요?]
내 바로 앞까지 기어 온 티나가 말을 걸며 멈추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나는 뒤에 토드가 있단 걸 의식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응, 나가는 곳이 있어.”
어린아이의 작은 몸이라 그래도 나보단 수월하게 다니는 모양이었지만, 거미줄이 아이의 온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곧 거미 하나가 티나의 머리에 모자처럼 올라탔고, 다른 하나는 등에 껍질처럼 딱 달라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보고 있기조차 힘들었지만, 환영이라 떼어내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실 환영이 아니었더라도 거미를 내 손으로 떼어 줄 순 없었을 것 같은데, 그대로 기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티나는 거미줄과 거미들을 보고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다행히도 거미를 무서워하진 않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