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60화 (60/145)

60화.

베키는 하얗게 질린 나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왜 그렇게 놀라?”

토드가 내가 자기 생일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말한 생일이 틀렸음에도 별말 없이 지나갔다. 아니, 역시 알고 있었다며 거짓말을 했다.

뭐지. 어째서?

“베키…. 토드가 내게 자기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었어.”

베키는 이제야 내가 왜 경악하는 줄 알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넌 알 리가 없으니…. 대충 찍었다가 틀렸겠구나.”

“……어쩜 그렇게 잘 알아? 무슨 몇십 년은 함께 지낸 사이 같아.”

“너라면 왠지 그럴 거 같았어.”

“그런데 내가 생일을 틀리게 말했는데도 토드가 맞다고 거짓말했어…. 이거… 무슨 뜻일까?”

베키는 다리를 꼬며 상체를 기울여 턱을 괴었다.

서늘한 숨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방 안을 온통 휘저었다.

“토드라면…… 그럴수록 아주 신중히 행동할 거야. 나도 그는 어릴 때만 접했기에…. 사실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긴 하지만 말이야.”

“신중히…….”

“기회를 엿보려는 걸 수도 있겠네. 네가 당장 그를 피해 다니지 않도록 일단은 방심하게 만드는 거지.”

“역시 그런 걸까? 사실 오늘 토드와 만나기로 했었어. 어떻게든 피하긴 했지만.”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피하는 편이 좋을 거 같아.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토드가 노엘한테 말하진 않으려나? 내가 다른 사람 같다고…….”

“글쎄……. 아주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반드시 노엘한테서도 도망가야 해.”

어쩐지 어깨가 조금씩 떨려 왔다.

다시 한번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긴장감이 내 목을 조여 왔다.

“베키…. 나 무서워.”

이럴 때, 베키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내 심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고, 힘들 때 잠시라도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없었더라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너는 무사히 돌아가는 것만 생각해. 돌아가고 싶다며. 그곳은… 분명 행복한 곳이겠지? 그걸 떠올려 봐.”

“행복한 곳?”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한 번도 원래 있던 곳을 자세히 떠올렸던 적이 없었다. 당장 살아남기도 급급했고, 적응하느라 온 신경이 줄곧 이곳에만 있었다.

그런데 그게 떠올려야만 기억되는 것이었던가. 저절로 생각나는 게 아니고?

어라, 내가 살던 곳은…… 어떤 곳이었더라?

놀랍게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처음엔 기억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희미해진 듯하다.

미약한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적어도 이런 괴물들이 넘치는 세상은 아니었다.

인간만이 사는 곳이었으니. 이런 건 내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에 네 친구와 가족들이 있었겠지? 그들도 떠올려 봐.”

얄궂게도 내 정보 역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마 있었겠지? 내게도 좋은 친구와 가족이.

그리고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할 테니까.

설마 이대로 영영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지, 불안해지니 속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그러자 나만 들리는 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네가 이곳으로 오면서 생긴 부작용인 것 같아. 분명 처음엔 잘 기억하고 있었겠지만, 지내기 시작하면서 일부분이 점차 사라졌을 거야.]

‘그런 부작용이라니. 그럼 이대로 정말 기억을 못 해?’

[걱정하지 마. 이런 경우,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면 자연스레 기억을 전부 되찾을 수 있어.]

‘그렇구나. 그렇다니 정말 다행이야.’

아주 만능이 따로 없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내가 붉은 보석의 이야기를 모두 들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힘내 봐야지. 내 뿌리가 되는 가족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내야 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날 응원해 주는 베키에게 조금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냐며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고마워. 베키…. 나를 이렇게 챙겨 줘서.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도…….”

“떠날 사람이라고 해서 무심하게 흘려보내면, 훗날 내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될 테니까.”

“베키…….”

“그냥 포기하고 죽으려던 날 살려 준 건 너였잖아. 너야말로… 그저 탈출이 목적이었을 텐데, 그런데도 목숨 걸고 나를 구했었지.”

이렇게 되돌아오는 걸까.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모르고 한 행동이었지만,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는 모양이다.

“이곳을 떠나고 나서도… 널 잊지 못할 거야.”

내 진심이 담긴 한마디에, 베키는 짓궂게도 무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절대 잊지 마. 나만 기억하면 열받을 거 같으니까. 네 꿈속에 하얀 귀신이 매일 찾아가 괴롭힐 거야.”

“…….”

그 말을 듣자마자 오싹했지만, 그렇게 꿈에서라도 베키를 계속 볼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모두 복도의 테이블 주위로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매일 아침 맞이하는 평화로운 일상.

나는 이 활기와 에너지가 정말 좋았다. 그래서 흐뭇하게 바라보던 중이었다.

갑자기 천장 모서리에서 검붉은 액체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액체는 위로도 흐르고 아래로도 흘렀다.

“저, 저게 뭐야? 다들 벽에서 떨어져!”

모두 일어나선 우왕좌왕하며 두리번거렸다.

“내 얼굴… 내 얼굴이…! 얼굴이 아파요. 아파!”

뚝뚝 떨어지는 액체를 맞은 타란티나의 얼굴이 녹아내렸다.

경악할 틈도 없이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날아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데릭의 목이 툭. 묵직한 소릴 내며 떨어졌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는 정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랐는데, 그것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모두를 절단하고 다녔다.

리마의 몸통이 반으로 쪼개졌고 다리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알프레드는 이미 팔이 다 떨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나는 베키와 노엘을 찾으려 급히 눈알을 굴렸다.

베키를 발견했을 땐, 어둠 속에서 나타난 커다란 손에 잡혀가는 모습이었다.

“베키!”

그리고 곧장 노엘을 눈에 담을 수 있었는데.

뾰족한 가시들이 박힌 줄기에 휘감겨 베키가 사라진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노엘!”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선 의식을 잃었는지, 눈은 뜨고 있었지만 검은 숯검정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박동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토막 난 그들의 일부로 가득 쌓였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를 애초에 낼 수조차 없었다.

숨만 쉬기에도 버거웠다.

이윽고 저 멀리서 나를 노리는 무언가가 빠르게 휘몰아치며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고.

검은 액체가 내 발밑까지 스멀스멀 접근해 왔다.

이제… 내 차례인가? 하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흡!”

벌떡 일어나 보니 노엘의 방이었다.

나는 들썩이는 어깨를 부여잡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심각한 갈증에 침대 협탁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니, 노엘은 언제나처럼 내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설마 이것이 꿈인가 싶어 그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 보았다.

따듯하고 옅은 바람이 나오는 걸 확인하니 금세 마음이 놓인다.

‘꿈을 꾼 거였어…….’

간신히 어젯밤을 기억해냈다.

베키와 헤어지고 나서 피로감에 침대에 누웠었고, 노엘이 돌아오기도 전에 잠이 들었었다.

그리고 꿈을 꾸다가… 지금… 이 새벽에 깨어났다.

‘끔찍한 꿈이었어. 다신 꾸고 싶지 않은 그런 꿈….’

예지몽은 아니겠지.

설마… 다들 정말 그렇게 돼 버리는 건 아니겠지?

불현듯 생긴 두려움에 다시 목이 타는 것 같아 물을 더 따라 마셨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을 것이다. 깨어난 게 기적이라면 기적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토드의 일로 신경이 많이 예민해져서 그런 건지.

그저 괜찮을 거라고 타이르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래. 꿈은 반대라고도 하잖아. 오히려 좋은 꿈일 수도 있고…!’

그렇게 목을 축이고 좀 진정한 후, 다시 노엘을 응시했다.

세상 평화로운 표정으로 쌔근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순하디순하다.

아기같이 자는 걸 보니 건드리고 싶어졌다. 나에게 온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좌르르 넘어가는 머릿결이 무척 부드럽다.

그렇게 계속해서 흑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 코, 입… 하나하나를 내 눈에 담아 보는데 왜 이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걸까.

“사랑스러워.”

갖고 싶어질 정도로 욕심이 생긴 건가. 하루에도 수십 번은 뇌세포가 분열되는 느낌이다.

“노엘,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이야. 짝사랑 아닌 짝사랑 같아.’

그렇게 한참을 홀려서 보다 보니 어느새 악몽으로 놀란 가슴이 진정되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잠자리에 들기 무서웠다.

그 꿈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아서. 하필이면 이어서 일어나는 꿈을 꿀까 봐.

두려웠다.

***

“노엘! 노엘!”

리사의 다급한 부름에 잠에서 깬 노엘은 벌떡 일어나 그녀를 살폈다.

처음엔 그녀가 깨어난 줄 알았는데, 눈을 감은 채로 부르르 떠는 걸 보니 꿈속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끔찍한 꿈을 꾸길래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그것도 하필이면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말이다.

“리사….”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조심스레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온통 식은땀으로 축축한 것을 보고 말았다.

“노엘…! 흑…….”

“나 여기 있어.”

갑자기 번쩍 들리는 리사의 손을 노엘이 가로채 갔다.

그렇게 꽉 쥐어 잡고는 제 몸을 덮어 안아 주었다.

차가운 몸이 자신의 체온으로 녹아내리길 기다렸다.

그녀를 꼭 제 품에 안은 다음엔 등 밑으로 손을 넣어 부드럽게 쓸어내리길 반복했다.

“무서운 꿈이라면 차라리 내게 넘겨…. 내가 다 가져갈게. 그러니 제발 일어나 봐.”

어르고 달래듯 소중히 감싸 안고 있자 그녀의 몸이 따듯하게 물들었다.

가빴던 숨소리도 점차 가라앉아 어느 정도 안정된 이후였다.

얌전해진 그녀를 보며 마음을 놓은 노엘은 그 이마에 입을 맞추려다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 누워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는지 감은 눈이 움찔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굳이 자는 척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왜 그랬는지 자신도 몰라 당황스럽던 참이었다.

깨어난 리사가 상체를 일으켰을 때도 계속 자는 척을 했다.

그녀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을 때까지만 해도, 난생처음 느끼는 온도에 뇌가 녹아내리는지 아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사랑스러워.”

아련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들어 버린 순간엔 결국 속으로 울컥하고 말았다.

“노엘,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연이어 날아든 리사의 마법 같은 목소리에 노엘은 슬며시 손을 말아 쥐었다. 따듯한 말이 제법 맹렬하게도 가슴을 파고드니 얼어붙어 있던 피가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 빠르게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녹아 버리다 못해 사라질 것 같은 온도는 결코 겪어 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