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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게임의 집착남이 나를 쫓는다-59화 (59/145)

59화.

환영 리사가 먼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노엘…. 내일이 토드의 실험일이래.-

-알아.-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와 달리, 환영 노엘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닥친 것이었다.

-이번에도… 네가 토드를 어떻게든 살려 줄 수 없을까?-

-네가 그럴 줄 알고 막아 보려 했었어. 그런데 이젠 전시회도 없어졌고…,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그럴… 수가.-

-미안해…….-

그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었는데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환영 리사에겐 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텐데.

지금도 토드에 관한 유의미한 말이 아니면 듣지도 않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토드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겠지.

환영 노엘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대단해….’

어쩌면 나는 줄곧 저런 사랑을 갈망했을지도 몰랐다.

저렇게 날 좋아해 준다면, 정말 변치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흔히 말하는 예쁜 사랑이란 것. 나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도 더 잘해 줄 자신 있는데.

-그런데 왜 하필 토드야…?-

환영 리사의 눈 밑이 더욱 그늘지고 눈동자의 초점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와 토드 둘 중 하나를 고민한 거였다면서. 왜 하필 토드냐고….-

-…….-

-너일 수도 있었는데…. 네가 선택받았어야 했는데…….-

-리사….-

환영 리사는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저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듯 괴로워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토드도 구해 주지 못하는 너 따위… 이제 필요 없다고.-

나는 차마 환영 노엘의 상처받은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상처만 받았겠는가. 충격이 클 것이 아주 분명하다.

내가 저런 말을 들었다면, 정신 차리라고 그녀를 한 대 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런 순간에서조차 다정하겠지.

-미안해.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쓸모없어서. 하지만 노력할 거야.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게.-

화 한번 내지 않겠지.

-그래? 그 말… 정말이야? 무엇이든?-

-그럼, 무엇이든 다.-

-그러면 네가 들어가겠다고 해.-

-들어가다니…?-

-토드 대신 네가 실험실에 가겠다고 해. 그렇게 해서라도 토드를 내 곁으로 살려 보내 달라고.-

나는 뒤틀리는 속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지금 경악하는 건 나뿐인 건가.

‘그런 말을 듣고도 설마 가만히 있는 건 아니겠지?’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가 곧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영혼이 죽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슬프고 말고 할 감정조차 보이지 않는 시들어 버린 영혼의 모습.

불안한 예감은 적중하기 마련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얘기해 볼게.-

‘와. 미쳤어.’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환영 리사는 그걸 또 좋다고 금방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정말이지! 지금! 바로 지금 가서 얘기해.-

그런데 초점이 여전히 없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닌 건 현재 진행형이었다.

-갔다 올게. 쉬고 있어. 이거 꼭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 노엘은 물을 한 컵 따라 주고는 쓸쓸히 방을 나갔다.

나는 환영 노엘을 따라 나가려다가 환영 리사의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선 넘는 행동으로 오만 가지 정이 다 떨어진 참이었는데, 저 서글픈 눈물의 의미가 궁금했다.

‘설마 반전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가만히 서 있으니 곧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 내가 무슨 짓을……. 지금 내가 뭐라고 말한 거야…?-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눈동자가 촉촉이 반짝였다.

-노엘…?-

그녀는 이미 떠난 환영 노엘을 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야 제정신이라도 든 건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양팔을 감싸 안았다.

-노엘에게… 그런 말을 해 버렸어……?-

본인도 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가뜩이나 건강도 안 좋은데, 순식간에 입술이 새파래지고 얼굴은 핏기가 다 빠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들리지도 않을 그녀를 향해 중얼거렸다.

“노엘한테 왜 그랬어. 그렇게 후회할 거면서….”

혼자 허공에 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즉각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놀라서 뒷걸음질이라도 쳤을 텐데, 지금은 너무 속상해서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환영 리사가 내게 말을 걸어 주기를.

[제정신이 아니었어……. 토드 생각에만 매몰되어 있었어….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는데. 그것이 진심이라도… 노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렇게 생각해 봤자 이미 한참은 늦었는걸.”

[지금이라도 가서 붙잡고 싶은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나는… 이번 주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야.]

“이번 주를 넘기지 못한다니?”

[나 줄곧 시한부로 살아왔거든. 점점 죽어 가는 희귀한 병을 앓고 있었어. 물론… 모두에겐 비밀로 하고 있었고.]

“뭐……?”

충격이었다. 그래서 눈 밑이 항상 푸르스름한 거였구나.

죽을 정도의 병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는데.

[나는 죽기 전까지 노엘에게 상처만 주고 가려나 봐. 그에겐… 항상 받은 것밖에 없는데.]

“…….”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이성의 끈을 풀고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환영도 모두 그 눈물에 흘러내리듯 사라져 버렸다.

다시 어둠에 둘러싸이고, 잠시 멍을 때리던 나는 침대 밑의 데릭을 깨우려 쪼그려 앉았다.

어쩐지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데릭…. 일어나 봐.”

무거운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나가겠다.”

데릭이 손을 뻗어 바닥을 짚고 몸을 비틀며 기어 나왔다.

한숨 푹 잤는지 눈이 아직도 감겨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그가 내 머리 위로 손바닥을 활짝 펴 살포시 올려놓았다.

“얼굴이 좋지 않다. 괜찮은 건지 묻고 싶다.”

“아…. 고마워, 데릭. 곧 괜찮아질 거야.”

내가 들어도 힘없는 목소리이긴 했다.

새삼 데릭이 걱정을 다 해 주니 빨리 기운을 차려야 할 것 같았다.

***

나와 데릭은 복도로 나와서 계단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직 계단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토드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어쩌면… 지금쯤이라면 계단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자 저절로 걸음이 딱 멈추어졌다.

옆에서 걷던 데릭도 멈추어선 나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데릭….”

“……?”

“나 좀… 노엘의 방까지 한걸음에 날려 보내 줄 순 없을까?”

토드와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최근 환영 토드가 내게 경고했던 것도 그렇고, 베키도 누누이 말했는데.

이젠 직감조차 그를 만나지 말라고 하고 있었다.

“한걸음에 날려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빠르게 데려다줄 순 있다.”

“그럼 그렇게 해 줘. 무슨 방법이든 괜찮으니.”

나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데릭이 날 어찌할 줄 알고 이리 말하는 것인지….

말해 놓고 보니 갑자기 불안해져선 급히 그를 말리려 했는데.

휘릭!

회오리 같은 바람이 데릭을 감싸더니, 그가 거대한 늑대로 변했다.

“어… 그러니까… 이건 무슨 의미야?”

“내 등에 탄다.”

“그, 그래도 돼? 으악!”

내가 망설일 틈도 없이 거대한 검은 손이 내 허리를 감싸 들어 등에 올려놓았다.

검푸른 털이 수북이 나 있어 상체를 딱 붙이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어쩌면 토드도 날 못 보고 지나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나는 데릭의 털을 꽉 쥔 채 깊숙이 엎드렸다.

“간다. 잘 붙잡아야 한다.”

“걱정하지 마. 꽉 잡았어!”

이윽고 정수리부터 등골까지 찬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계단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는데, 토드가 4층으로 내려오는 게 시선에 걸렸다.

이제 막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늘 못 본다고 얘기는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고개를 들고 외쳤다.

“토드! 나 오늘은 안 되겠어. 그러니 기다리지 마.”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자, 라고까지 말하고 싶었는데, 데릭이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 버려 그러지 못했다.

뭐, 알아서 가겠지.

나와 눈이 마주친 건 확실하니 그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

노엘의 방으로 돌아온 나는 기다란 소파에 뻗어 누웠다.

노엘이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토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찜찜해서일까. 오늘 붉은 보석의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일까.

착잡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애초에 토드가 난리 치는 바람에 억지로 한 약속이긴 했지.’

분명 협박 같은 약속이었다.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죄책감을 덜어내려 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토드가 두드릴 때랑은 다른 소리라서, 베키인 걸 단번에 알아챘다.

문을 열고 들어온 베키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웬일로 찌들어 보이네?”

“후유…….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너는 별일 없지?”

“오늘도 문이 부서질 뻔한 걸 간신히 복구했어.”

“그랬구나. 베키…. 나… 잘하는 거겠지?”

“왜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어?”

“나도 도와야 하는데…. 이렇게 혼자 돌아가겠다고 붉은 보석이나 찾고 있어서 어쩐지 미안해.”

“어차피 네가 나서 봤자 별 도움도 안 돼.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

“…….”

언제나 냉정하게 말하는 그녀였지만, 가끔 위로 아닌 위로가 되는 느낌을 받곤 한다.

“토드와는 별 이상 없지?”

“말도 마. 토드가 이 방까지 들어와서 노엘 몰래 숨고 난리가 났었어.”

“뭐? 그 정도일 줄이야….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네.”

“맞다, 베키! 혹시 토드 생일이 언제야?”

“토드 생일? 아직 멀었지. 몇 개월은 더 있어야 해.”

“뭐, 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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