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고?”
“무리하는 거 아니야. 하루빨리 완성해 보이고 싶어. 네가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면 매일 밤을 새워서 준비하고 싶기도 해.”
점점 노엘의 마음의 크기가 와닿는다.
언젠가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릴 것 같은데.
“노엘…. 혹시 지금 많이 피곤해?”
“많이 피곤했는데 네 얼굴 보니 바로 괜찮아졌어.”
그의 살짝 풀린 눈은 몹시 피로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토드를 내보내려면 어떻게든 노엘을 끌고 나가야 했다. 이렇게 밤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잠시 산책이라도 할까?”
말해 놓고 보니 어두운 복도를 걷는 게 산책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가자. 그렇지 않아도 네게 보여 줄 게 있어.”
노엘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부드럽게 들어온 손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꽉 조여 왔다.
나는 그를 따라 방을 나와 복도를 쭉 걷기 시작했다.
혼자 걸을 때랑은 역시 공기가 달랐다. 이렇게 캄캄한데 하나도 무섭지 않다.
잔잔히 두근거리는 심장은 아마도 설레서 뛰는 게 분명했다.
“여기야.”
노엘이 어느 방의 문을 열었는데, 오랜만에 풀과 꽃의 향기가 코로 훅 들어왔다.
넓은 방엔 햇빛도 들어오지 않고 물도 흐르지 않았는데, 생화와 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혀 믿어지지 않는 공간.
“이럴… 수가! 어떻게 이래?”
나는 놀이터에 풀어 놓은 아이처럼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구경했다.
누가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노엘은 그런 나를 역시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좇고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느새 그를 내 시야에 가두고 있는 나였다.
“노엘! 이거 봐. 진짜 예쁘지?”
“네가 훨씬 더 예뻐.”
어쩐지 요즘 들어 노엘이 얌전해진 것 같다. 원래도 얌전하긴 했지만 뭔가 다른 안정적인 느낌.
사랑을 갈구하던 과거의 노엘과 사랑받는 현재의 노엘이 무척 대비되어 보였다.
물론 내가 그에게 더 받는 쪽이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난 그에게 해 준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노엘. 혹시 나한테서 받고 싶은 거 있어?”
“받고 싶은 거?”
“응, 선물이라든가….”
“이미 받았는걸.”
“응? 뭘 받아?”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를 준 적이 없는데 말이다.
“네 마음. 난 그거 하나면 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급격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분명 여기 있는 붉은 야생화보다도 더 빨갛게 되었을 것이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나는 곧 용기를 내었고.
“그럼 그거… 소중히 해 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거든.”
이뤄지지 못할 사랑이라지만 떠날 땐 떠나더라도, 그에게 진심이라는 것만은 전하고 싶었다.
원래 있던 곳에선… 아마 노엘 같은 남자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평생 독신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확신했다.
“나……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 리사, 이게 꿈이면 어떡해?”
눈꼬리를 내리며 예쁘게 접어 보이는 그였다.
그러더니 쪼그려 앉아 풀 속을 뒤적거렸는데, 뭐 하나 했더니 야생화 다발을 하나 만들어냈다.
그 꽃다발을 내게 내미는 모습에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데려오는 거였는데.”
그의 섬세한 손이 내게 꽃다발을 가득 안겨 주었다. 세상의 온갖 좋은 향기는 다 여기에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이윽고 노엘이 내 뺨을 애지중지 감쌌다.
“고마워. 정말 아름다워….”
촉촉한 풀 내음과 달콤한 꽃향기를 뚫고, 그의 다정한 숨결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야말로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정신 차리자. 노엘이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야.’
마음속으로는 짙은 안개 속을 하염없이 걷고 있었지만.
그러다가도 그가 내게 호흡을 불어 넣을 때면, 그 뿌연 것들이 흩어져 날아가 버렸다.
***
리사가 노엘을 데리고 나간 후, 침대 밑에서 바로 빠져나온 토드는 곧장 그 뒤를 밟았다.
그들이 들어간 방의 문틈으로 모든 걸 지켜본 토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짓씹었다.
“토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그 목소리는 인기척도 없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베키….”
베키는 토드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리로 오라는 듯.
그렇게 따라간 곳은 방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서 뭘 그렇게 훔쳐보는 거죠?”
“…….”
“이렇게 음흉하고 음침한 구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렇겠지. 고작 어렸을 때 본 게 전부일 테니.”
“지금 본인이 음침하다고 인정하시는 건가요?”
베키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런가 보지. 난 원래 그런 놈인가 봐. 지금도 아주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거든.”
그렇지 않아도 예전과는 영 다른 분위기의 토드였다. 아주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했으니.
갑자기 연인을 잃게 된 남자는 원래 다 저렇게 되는 건지. 베키도 혼란스러웠다.
그를 완전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베키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진정 리사를 생각한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그녈 놓아주시는 게 어떨까요.”
리사가 탈출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가…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가 입술을 떨며 고개를 떨구는데 반짝이는 빛이 후두두 떨어지는 걸 보고 말았다.
베키는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 무엇도 지금은 그를 위로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저 그의 등을 괴물이 된 손으로 토닥여 줄 수밖에.
***
다음 날, 나는 제일 먼저 침대 밑을 확인했다.
밤에 노엘과 놀다 들어온 뒤로 기진맥진해선 눕자마자 잠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침대 밑엔 토드의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그제야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다.
오늘 4층 계단에서 토드와 만나기로 했었는데, 대체 또 무슨 얘길 하려고 그러나 다시 긴장되었다.
그렇게 바닥이 뚫릴 듯한 한숨을 쉬며 문을 열고 나왔는데, 북적거리는 활기가 나를 맞이했다.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는 노엘과 심란한 표정의 리마,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타란티나.
베키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알프레드,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앉아서 자는 인간 모습의 데릭.
각자 자기 자리인 양 차지하고는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이런 풍경은 어디 가서도 보지 못하겠지.’
내가 가만히 서서 멍하니 있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머물렀다.
그들의 따듯한 아침 인사와 함께 노엘의 훈훈한 미소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꽉 차오르는 이 느낌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이때까지도 잘 몰랐었다.
“누나. 이것도 먹어 봐. 이거 진짜 맛있어.”
리마가 건넨 치즈 케이크 한 조각조차 새삼스레 달라 보인다.
어쩌면 나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저한테도 주세요. 저도 먹고 싶어요.”
타란티나는 여전히 리마가 마음에 드나 본데.
“무슨 소리야. 지금 다섯 조각이나 네가 다 먹었잖아!”
리마는 아직 타란티나가 무서운 모양이다. 말은 저렇게 쌀쌀맞게 하고 있지만, 얼굴이 어딘가 공포에 질려 있다.
그 모습이 귀여운 나는 자꾸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리마는 리사 언니를 좋아하는 건가요?”
어깨가 축 처진 타란티나의 말에 노엘이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푸흡!
나는 입 안에 머금었던 홍차를 뿜어낼 뻔했다.
“그래. 난 누나를 좋아해! 너보다도 훠어얼씬 더!”
아니, 리마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누가 들으면 오해할까 봐 부연 설명을 하려는 찰나, 흥미진진한 얼굴의 알프레드가 껴들었다.
“설마, 이성으로서는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지!”
불쑥 소리 지른 건 나였다.
그러고 나니 괜히 열성적으로 뛰어들었나 싶은 후회가 들었다.
뻘쭘해져선 벌떡 일어난 것도 이제야 알아채고는 다시 다소곳이 앉았다.
알프레드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장난이었는데. 리사는 놀려 먹기 좋아. 크하하.”
어디 들어가 숨고 싶었는데, 노엘과 눈을 마주친 알프레드가 급히 당황해하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노엘이 알프레드에게 무슨 눈짓을 했을지 이젠 보지 않아도 떠올릴 수 있었다.
‘죽일 듯이 노려봤겠지. 그 입 다물라면서.’
다들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 새삼 토드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마음이 무거웠다.
“리사, 오늘은 데릭이 네 호위 기사야.”
노엘이 옆에서 작게 속삭였고, 나도 작게 중얼거렸다.
“응. 알았어! 근데 아직도 위험한 거야?”
“그럼, 방심해선 안 돼. 문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래…. 괜히 미안해서 그래. 도움만 받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 생각 하지 마. 너는 네 생각만 해. 내 생각이랑.”
또 얼굴이 타들어 가듯 열감이 차오른다.
어쩜 그런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지.
“오, 오늘도 몸조심하고….”
간신히 말을 더듬으며 입을 뗐다.
“너도… 무리해서 산책하진 말고.”
“응. 그럴게.”
노엘과 눈을 맞춘 나는 그와 함께 환한 웃음을 지었다.
노엘은 내가 도대체 무얼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
시끌벅적하고도 평화로운 아침이 지나갔다.
나는 데릭과 함께 4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설마 토드가 벌써 와 있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아직 토드가 없는 걸 보고는 가슴을 조용히 쓸어내렸다.
일단 붉은 보석을 먼저 찾는 게 중요했으니 말이다.
“데릭. 잠시 여기서 기다려 줄래?”
항상 그랬던 것처럼 복도의 소파에 데릭을 앉히려 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저기서 누워 자고 싶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벽 너머에 있을 환영 리사의 개인실일 것이었다.
근데 호위 기사 아니었나…?
뭐…, 상관없으려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데릭과 같이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개인실 문을 열어젖히니, 제집이라도 되는 양 침대 밑으로 기어서 들어가는 데릭을 볼 수 있었다.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돼.’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마침 딱 붉은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간이 의자에 놓인 그것을 집어 들자, 침대 위에 앉아 있는 환영 리사가 나타났다.
그 옆의 간이 의자엔 환영 노엘이 앉아 있었는데, 둘만 있는 이 공간의 공기가 아주 무겁다 못해 압박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