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제야 데릭의 손 크기가 달라 보였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늑대 괴물로 변할 때마다 그 몸집에 맞게 손이 커졌던 것이었다.
정말 신기한 녀석이다. 두 가지의 모습을 다 갖고 있다니.
“그럼 이제 돌아가 볼까? 아니면 시간이 더 필요해?”
알프레드의 물음에 나는 환영 리사의 개인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음 퀘스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로 보아, 이번에도 이곳에서 붉은 보석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붉은 보석이 또 나타나면 바로 이어서 지켜볼 수도 있었을 텐데, 역시 다시 생성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얼마나 걸릴지 몰라, 오늘은 그냥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돌아가자. 아직 시간이 좀 남았긴 하지만… 애매하겠어.”
“나는 여기서 좀 더 자고 가겠다.”
데릭은 다시 처녀 귀신 같은 속도로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하필 자주 오는 곳에 저러고 있으니, 앞으로 여기 침대 밑은 항상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가 또 발목을 잡히기라도 하면 심장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자, 잘 자! 데릭. 다음에 봐.”
미인은 잠이 많다더니…….
나는 알프레드와 다시 6층으로 올라왔고, 노엘의 방 앞에서 헤어졌다.
오늘은 일이 빨리 끝났다고 하니 들어가면 노엘도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무도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청혼 준비를 틈틈이 하고 있다고 했었지.’
왠지 모를 죄책감과 함께 책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노엘은 청혼한 다음 날 결혼식까지 치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청혼을 받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혼까지 해 놓고 이곳을 떠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야말로 노엘에게 절대 해선 안 될 짓이겠지.
‘그 전에 반드시 탈출해야 해.’
이마를 짚고 잠시 쉬고 있었는데, 누군가 문을 쿵쿵 두드렸다.
노엘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적은 없었는데….
그럼 누구지?
“베키? 들어와.”
베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끼익.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토드였다.
“베키는 아니지만…, 여기 있었구나.”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세차게 일어났는지 의자가 뒤로 쓰러져 버렸다.
“토, 토드?!”
갑작스러운 토드의 등장에 숨이 턱 막혔다.
무엇보다 단둘이 있는 모습을 노엘이 보기라도 하면, 내가 귀찮아질 것이었다.
“찾아다니다 영 보이지 않아 와 봤더니 다행히 있었네.”
“날 찾아다녔어? 왜? 아니, 그보다… 우리 밖에서 얘기할까?”
차라리 복도의 테이블에 앉아 얘기하는 게 나으리라 판단했다.
“왜…? 노엘이 우릴 볼까 봐 그래?”
토드는 기어코 문을 닫고 들어왔다. 나가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사를 내보인 셈이었다.
“맞아. 난 노엘이 조금이라도 의심하거나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자꾸 그러니까… 정말로 그 녀석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
아직도 내 말을 허투루 듣고 있나 본데.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기세였다.
“정말로 좋아하는 거 맞아. 제발… 더는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들지 말아 줘.”
미소를 머금던 그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믿을 수 없어. 나는… 난……. 그럴 리가 없잖아.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니고….”
그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허망한 눈동자가 계속해서 질문을 하듯 쏘아붙였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저 단호히 대처하는 수밖에.
“미안…. 마음이 변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어……. 인제 그만 나를 놓아주지 않을래?”
“정말 마음이 변한 거야? 그사이에 이렇게 확 바뀌었다고.”
그가 쉽게 인정할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나 좋아했으니까.
거기다 노엘과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든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 토드도 이 몸에 집착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 변했어. 모든 게 다 변했어. 더는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어.”
정말 미안하다. 토드.
내가 돌아갈 때까지만 제발 도와주라.
맘 같아선 다 솔직히 불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답답한 숨만 입으로 겨우 새어 나올 뿐.
토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인제 와서 헤어지자니……. 우리가 어떻게 이어졌었는데…….”
갑자기 노엘이 들려주었던 오르골 상자의 멜로디가 떠올랐다.
등골이 오싹해지더니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정말… 더는 나도 할 말이 없어.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엔…….”
계속 죄지은 사람처럼 바닥을 보고 있었는데, 토드가 묵직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너… 리사 맞아?”
순간 너무 놀라서 고개를 확 쳐들 뻔했다.
나는 간신히 놀란 심장을 삼켜 버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며 꽉 쥔 주먹으로 모든 불안한 마음을 보내 버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 같아서….”
“원래 태도가 달라지면 사람도 낯설어 보일 수 있겠지…….”
설마 이 몸에 다른 사람이 빙의했다는 생각까지 할까 싶었다.
“그런가….”
“그럼… 인제 그만 나가 줘. 더 할 얘기가 있으면 나가서 하자. 노엘이 곧 돌아올 거야.”
다행히 잘 흘러가나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벽에 걸린 시계가 저녁을 가리킨 걸 보고 말았다.
안 그래도 급한 성질이 더 급해지는 듯했다.
나는 아예 그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자! 어서! 나가자고….”
낑낑대며 그의 넓은 등판을 밀었지만, 한 발자국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 나갈 순 없어.”
“시, 싫으면 어쩔 건데. 대체!”
“리사, 내 생일이 언제야?”
“뭐…?”
망할…….
“내 생일… 언제냐고.”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건데?”
하…… 어떡하지. 찍기엔 너무 광범위한데.
“네가 진짜 리사가 맞는다면 내 생일을 모를 리가 없잖아.”
그는 한층 여유로워진 얼굴로 고개를 내게 기울였다.
기울인 얼굴에 그림자가 내려앉자, 서늘한 분위기가 깔렸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생각하기를 반복하던 중, 일단 찍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틀리면…… 틀리면…, 나는 끝장인 건가.
이것이 마지막 발악이 되겠구나.
틀렸다고 말한다면 당장 도망쳐야겠지.
“오늘이잖아. 네 생일.”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오늘로 찍었다. 그러고는 토드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까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방을 뛰쳐나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토드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네가 잊을 리가 없지. 다른 사람일 리 없어.”
……맞췄다고?
와……. 내가 지금 찍어서 생일을 맞힌 거야?
나는 혼자 놀라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생일… 축하해 주지 못해 미안해.”
“나도 이런 상황에서 축하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럼 이제 나가 주는 건가?!
미치겠네.
발을 동동 구르며 화장실 급한 사람처럼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토드는 이번엔 방 안쪽으로 아예 더 깊이 들어가더니, 침대 쪽으로 가 걸터앉았다.
“토드…? 뭐 하는 거야.”
“좀 더 얘기하고 싶어. 아무리 이별을 고한다고는 하지만…. 너무 일방적이잖아. 나는 아직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걸.”
“그러니까 나가서 얘기하자고!”
속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속은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데, 저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먼저 나가면 녀석도 따라 나오려나 싶어서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참이었는데, 복도 근처에서 발소리가 접근하고 있었다.
틀림없는 노엘의 발걸음이었다.
지금 나갔다간 들키고 말 것이었다.
‘으, 으아아! 안 돼!’
나는 문을 다시 닫고는 침대에 앉아 있는 토드에게 달려갔다.
“토드. 노엘이 왔어!”
노엘이 들을 수 없도록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다급한 나와 달리 토드는 차분함과 평온함 그 자체였으니.
“그래? 잘됐네. 그럼 셋이서 이야기할까? 오랜만에.”
“우, 웃기지 마!”
“으윽!”
나는 토드의 팔을 잡아끌고 침대 밑으로 마구 구겨 넣었다.
그러다 팔심이 못 미쳐서 발로 벅벅 밀었다.
“여기서 나오지 마. 절대! 들키지 마. 알았어?”
얼떨결에 침대 밑에 구겨진 토드는 힘을 뺀 채 가만히 있었다.
특별히 저항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알았어.”
다행히 이번엔 협조해 주나 보다 하여 한마디 더 했다.
“내가 금방 노엘을 밖으로 유인할 테니 그때 밖으로 나가. 이번에도 알아들은 거지?”
“그럴게. 대신에 내일 또 나랑 만나.”
윽. 이 녀석……. 역시 쉽게 넘어갈 녀석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급하니 일단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지.
“내일 늦은 오후에 4층 계단 앞에서 봐.”
“좋아. 그럼 난 들키지 않고 있다 나갈게.”
토드는 이제야 흡족하다는 듯 환한 눈웃음을 지었다. 미소가 너무 환해서 침대 밑이 다 밝아질 정도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고는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끼익.
문이 열리고 노엘이 들어왔다.
“리사, 잘 있었어?”
나를 보더니 얼굴에서 꽃이라도 핀 듯 살아나는 그였다.
“노엘! 어서 와. 일은 일찍 끝났다고 들었어. 역시 청혼 준비 때문에 늦은 거지?”
“이런, 들켜 버렸네. 방심하게 했다가 놀래 주려 했는데. 좀 잊어버리고 있지 그래?”
노엘이 다가와 내 볼에 가볍게 입술 도장을 찍었다.
쪽.
바로 아래에서 토드가 이 소리를 들었을 생각을 하니 심히 심란하다.